연극 <어나더 컨트리(Another Country)>
글_ 조서영
원작 줄리안 미첼(Julian Mitchell)
연출 이수인
제작 PAGE1
장소 서경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스콘 1관
일시 2020.06.10 ~ 2020.08.23
연극 <어나더컨트리>는 국가라는 경계 안에서 존재하는 개인의 정체성을 실낱 없이 드러낸다. 원작인 줄리안 미첼의 영화 <어나더컨트리>를 기반하여 무대 위에서 새롭게 그려낸 이 작품은 청춘의 좌절과 비극을 관객들에게 보다 생동감 넘치게 전달한다. 1930년대 대공황과 파시즘을 겪은 영국을 배경으로 했다는 점과 트웬티투, 프리펙트 등 다소 어려운 용어의 반복적인 사용으로 우리로 하여금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그들의 시대공간과 현재 우리 사회가 겪는 딜레마는 비슷한 양상을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계급을 위한 계급의 재생산과, 억압과 규율에 맞서는 자유의지, 시대의 청춘이 가지는 이상과 좌절 등 연극 <어나더컨트리>를 설명하는 수많은 키워드는 요컨대 ‘개인을 묻는 연극’으로 정리된다.
연극 <어나더컨트리> 속에는 다양한 학생들이 등장한다. 그중 주인공 ‘가이 베넷’과 ‘토미 저드’는 명문이라 불리는 학교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다. 가이 베넷은 동성애자이며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하코트와 학교에서의 은밀한 열애를 즐긴다. 한편, 토미 저드는 마르크스주의를 열망하는 혁명가적 면모를 지녔는데, 권위주의적인 체계에 뒤덮인 학교를 부정하고 끊임없이 투쟁하고자 한다. 학교는 강력한 학생회의 권위와 기숙사의 규율로 물들어 있고, 그 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학교의 시스템에 저항한다. 반면, 학교의 방식을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지독히도 고수하려는 이들도 있다. 바로 학교의 학생회 ‘트웬티투’와 기숙사 선도부인 ‘프리펙트’이다. 학생 ‘바클레이’, ‘멘지스’, ‘델러헤이’, ‘샌더슨’, ‘파울러’는 모두 학교가 가져온 사상을 신봉하는 이들이다. 그 중 기숙사장이자 학생회인 ‘바클레이’는 온화한 리더십을 가지고 비교적 융통성 있는 성격을 지녔지만 철저히 원칙에 의해 가려지고 만다. 기숙사장이 된 후 오랫동안 답습되었던 학교의 악행을 처단하려 하였으나 누군가는 악행을 막기 위해 악행이 필요하고, 결국 돌고 돌아 악습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만 것이다.
특히 ‘파울러’의 경우 기숙사 선도부 즉, 프리펙트로서의 자부심이 강하며 원칙주의자이기까지 해 가이 베넷과 토미 저드와 같은 이단아들을 몰아내기 위해 늘 긴장하고 철두철미한 삶을 살아간다. 이때, 파울러는 학교가 만들어 낸 괴물 같은 존재이다. 군대식의 교육과 잘못된 원칙을 향한 신봉자, 그것이 바로 파울러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파울러는 특히나 토미 저드와 자주 부딪히게 되는데, 이를 사회의 축소판으로 바라보았을 때 규율과 비규율의 대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토미 저드는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하여, 계급사회를 극화하는 학교의 규율을 부정하는 인물이다. 그릇된 사회적 규범을 타파하려는 토미 저드를 향해 규율을 강요하는 파울러는 그저 적대할 수밖에 없는 인물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파울러의 선도는 훈계라는 이름의 폭력성을 기반으로 한다. 이에 토미 저드는 이러한 폭력성으로부터 벗어나려 하고 꾸지람 받는 하급생 워튼까지도 지켜내는 모습을 보인다. 주로 극 중 내내 흥분하고 분노성을 지닌 캐릭터 파울러와 고지식한 듯 차분한 여유를 가진 캐릭터 토미 저드, 이 둘이 가지는 입체적인 구도는 청춘의 대립이라는 작품의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사실 처음 작품을 접했을 때 ‘가이 베넷’은 상대적으로 매력적인 캐릭터로 느껴지지 않았다. 토미 저드와 같이 엘리트적인 열망을 보여주기보다 작품 초반, 그저 여기저기 꾀를 피우는 모습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능글거리고 때로는 장난 끼 넘치는 아이 같은 모습에 다소 작품의 분위기에 걸맞지 않은 가벼운 캐릭터인가, 혹은 배우의 캐릭터 해석에 의한 연기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서사가 진행될수록 가이 베넷은 ‘깨닫는 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현실적으로 학교 내부를 살펴보아도 트웬티투, 프리펙트, 혹은 토미 저드와 같은 엘리트적인 인물들은 극소수이다. 하지만 학교의 사상에 자신도 모르게 익숙해져 있는 이들은 다수이다. 가이 베넷은 이러한 대다수를 표방한다. 어쩌면 현 사회 속 청년들의 모습을 담아낸 극사실주의에 가까운 캐릭터일 수도 있다. 규율이 불편하지만 세상을 뒤바꾸는 일은 꽤나 귀찮다고 느끼며, 한편으로는 뒤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그저 ‘살아’가는, ‘안일함’과 사회적 ‘무력감’의 산물들. 때로는 가이 베넷처럼 차기 학생회에 대한 꿈도 꾸고, 설레는 연애도 꿈꾼다. 하지만 그것이 규율 앞에서 완전히 무너져버렸을 때 비로소 깨닫는다. 인간 존엄을 상실한 시스템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겠다고. 이로써 가이 베넷은 학교의 무늬를 벗어나 ‘개인’으로 성장한다.
우리 세대의 청년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자라난 우리는 공동체의 문제보다 오히려 개인의 문제에 눈을 뜬다. 그것이 잘못되었는가? 물론 공동체적인 규율과 도덕성이 개인의 문제보다 축소되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개인을 존중하기 시작한 사회는 수많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인권의 문제, 환경의 문제, 사회의 문제 등 우리가 간과했던 각각의 문제가 이제야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지난날과 달리 ‘개인’이 눈을 떴기 때문이다. 개인의 취향이 드러나고, 생각이 표출되면 그 많은 정체성과 가치관들이 모여 새로운 사회를 구축해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 사회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이처럼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을 묻고 있다. 작품 초반에는 개인의 정체성이 뚜렷해 보이는 토미 저드를 통해, 작품 후반에는 진보성을 가지고 가치관을 뒤바꾼 가이 베넷을 통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개인이란 무엇인가?’, ‘국가란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인가?’, ‘청춘의 이상과 신념이란 이 시대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는 것인가?’
연극 <어나더컨트리>는 제목처럼 ‘다른 세상을 꿈꾸는 청춘들의 기록’이다. 또, 작품 외적으로는 우리가 잊고 살았던 우리 안의 정체성과 권리의 존중을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다. 처음 공연장에 앉아 시작 전 멍하니 무대를 바라봤던 때와 공연이 끝나고 그 여운을 잊을 수 없어 멍해지던 순간을 떠올린다. 우리의 다음을 상상하게 하고, 스스로를 기록하게 하는 작품은 얼마나 좋은 작품인가. 이제는 우리도 다른 세상을 시작할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감히 이야기 해본다.
다양성이 존재하는 사회, 그 다양성이 존중 받는 사회, 그 속에서 시너지를 발휘하는 개인의 역량이 모여 새로운 사회로 발돋움하는 게 아닐까….다른 세상의 주체로서의 청년들에게 응원을 보냅니다.
한 편의 연극을 본 듯 그려집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