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연극 1,000편에 대한 보편 지원
글_오세곤(연극평론가)
코로나 19는 온 세상을 바꿔 놓았다. 그중에서도 연극은 그야말로 근본이 흔들리는 위기를 맞고 있다. 직접 만나는 것이 문제 되는 상황에서 현장성이라는 특성을 지닌 연극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인류가 있는 곳에는 늘 연극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너무도 쉽게 그 소멸을 예측하는 것은 참으로 섣부른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임시방편으로 써본 영상화라는 방법을 마치 획기적 대안이라도 되는 듯 호들갑을 떠는 것은 참으로 민망하다.
어떤 예술이건 한계를 갖고 있다. 그 한계를 달리 표현하면 곧 특성이다. 연극의 특성 중 현장성은 불편한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한계야말로 예술성을 이루는 바탕이 된다. 아마도 어떤 예술이건 불편함이 없다면 방종으로 흐르면서 치열한 예술성은 성립하지 못할 것이다. 연극을 영상화하면 그것은 기록물이거나 영화와 같은 다른 장르의 예술이 되고 만다. 그러니 아무리 직접 만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해도 영상을 가지고 연극의 대안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코로나 19 이후 극장은 변할 수 있다. 극장의 구조, 객석의 구조, 객석의 수, 입장 방법, 관람 방법 등이 모두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제작 단가도 달라지고 그에 따라 관람료나 지원금의 수준 및 체계도 완전히 달라져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장성을 특성으로 하는 연극에게 그 현장성을 포기하고 비대면 영상 송출을 통해 관객을 만나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때는 이미 연극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연극 교육에서 실제 공연을 제공하기 어려워 불가피하게 영상을 통해 관람하도록 하는 것은 앞으로 어떻게든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할 일이다. 실제 공연물이 아닌 영상 기록물이라는 차선 내지 차차선의 교육 방법을 쓰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즉 연극 교육을 위한 광범위한 콘텐츠 제작이 필요한데 그 중심은 역시 현장성을 유지하는 공연 자체가 되어야 한다.
연극의 현장성은 직접성, 일회성, 시간성이라는 세부 성격으로 구성된다. 다시 말해 연극은 한 번 공연되고는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남는 것은 기록뿐이다. 연극의 기록에는 대표적으로 평론가의 기록과 영상 등의 방법을 통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연극은 평론이건 영상이건 기록의 대상이 되기가 무척 힘들다. 수많은 연극 작품이 무관심 속에 공연되고는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버리고 만다.
예술은 실패의 확률이 높다. 그러나 그 낮은 확률을 무릅쓰고 끝없이 시도하는 가운데 명작이 탄생할 수도 있다.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지는 수많은 연극 작품 중에 그런 명작이 있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평론이건 영상이건 최소한의 기록이라도 남길 방법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나름의 선택 기준이 있겠지만 평론가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예술기록원의 기록 대상에 들지 못한 작품 중에도 명작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 1년에 공연되는 연극이 몇 작품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1,000편이라고 가정해 보자. 모든 작품에 평론가를 5명 파견하고 영상 기록을 남기려면 예산이 얼마나 들까? 평론 사례비를 30만 원씩 5명에 150만 원으로 하고 영상 촬영 예산을 150만 원 정도로 잡으면 전체 30억 원이 드는 사업이 될 것이다. 그럼 1년에 작품 100편을 보는 평론가 50명이 필요하고, 촬영을 위한 인력 또한 구성하기 나름이겠지만 상당수가 필요하다.
이에 더해 각 작품에 대해 일반 관객용 관람권을 1,000만 원어치 정도씩 구입해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코로나 19 이후 달리진 환경을 감안하여 관람권 가격은 1매당 5만 원 정도로 한다 할 때 200명의 유료 관객을 보내 주는 셈이 될 것이다. 앞서 기록 예산까지 하면 총 130억 원이 드는 사업이 될 텐데 한 분야 예술을 살리는 데 이 정도의 예산은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아이디어를 보탠다면 200명의 관객들이 작성하는 개괄 평가와 5명의 전문 펑론가들의 심층 평가를 활용하여 여러 방향의 사후 지원 작품들을 가려내는 것이다. 그중에는 일반 관객과 평론가 양쪽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작품도 있을 것이고 둘 중 한 쪽에서만 좋은 평가를 받는 작품도 있을 것이다. 물론 양쪽 모두에서 안 좋은 평가가 나올 수도 있다. 어쨌든 양쪽의 평가가 일치하면 일단 믿을 만한 것이고, 엇갈리는 경우에도 나름의 해석이 가능할 텐데, 각각에 맞게 추가 지원의 방향을 정하면 좋을 것이다.
이렇게 대규모의 보편 지원과 그 과정에서 드러난 방향성에 맞는 사후 지원을 결합하여 실행한다면 아마도 연극계는 크게 활력을 얻게 될 것이고, 또 만에 하나 사장될지도 모르는 귀한 작품에 대해서도 언제고 다시 찾아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예술은 대단히 예민하다. 지원사업을 아무리 정교하게 설계해도 그 예민함을 충족시키기 어렵다. 그래서 필요한 게 단순 명료한 보편 지원이다. 그것이 아무런 효과 없는 허공에 물뿌리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워낙 실패 가능성이 높은 것이 예술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과감한 시도가 필요하다. 섣부른 효과성 평가 같은 것은 잊어야 한다. 그렇게 그냥 언젠가 되겠지 하면서 우직하게 믿고 계속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 예술이 여기저기서 힘차게 싹을 틔우고 무성하게 가지를 뻗는 아름다운 모양을 보게 될 것이다.
코로나 19라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사태를 맞이한 지금 연극을 포함하여 모든 예술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하고 무늬만이 아닌 실제로 활력을 제공할 올바른 정책을 마련하고 펼쳐 주기를 강력히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