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서현(연극평론가)
온갖 우주영웅물의 주제곡을 들으며 흥얼대던 관객들은 막이 올라감과 동시에 곧 한 가정의 비극을 마주하게 된다. 제목은 우주적으로 발랄했건만, 처음부터 반전이다. 젊은 부부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하고 있다. 아이의 엄마는 넋이 나간 듯 죽은 아이를 찾고 남자는 아내마저 정신을 놓을까 두려워하며 그녀를 달래고 있다. 아내의 슬픔이 분노가 되어 남편을 향하는 순간 그의 서운함과 스트레스도 폭발한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주고받은 후, 아내는 급기야 아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남편에게 묻고 그의 어깨를 칼로 찌른다. 남편이 쓰러져 있는 사이 그녀 또한 사고사로 목숨을 잃는다.
‘우주기사’는 아이와 아내를 연달아 잃은 후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린 김봉팔이 구성해낸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이다. 살아내기 위해 상상 속의 삶을 선택한 김봉팔. 그는 죽은 아내 한공주가 좋아했던 과자를 ‘오로라 공주’로 모시며 문안인사까지 드린다. 이에 그의 처남은 고전 히어로 장르의 보조 캐릭터 류의 하나인 ‘바둑이’를 자발적으로 연기하며 매형을 보살핀다. 망토를 휘날리며 날아다니는 김봉팔은 전투복과 검을 찾아오기 위해 모친이 경영하는 세탁소에 들른다. 아들로부터 ‘미세스 스칼렛’이라 불리는 어머니이지만 실성한 아들이 끼니라도 거를까 걱정이다.
이 작품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주요갈등이 김봉팔의 현실 속이 아닌 환상 속에서 펼쳐진다는 점에 있다. 즉 김봉팔을 아는 현실 속 인물들-처가 사람들은 물론 그의 모친까지-이 모두 그의 안타까운 상황을 용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김봉팔 또한 현실적 갈등 상황에 놓이지 않는다. 작품이 진행되는 내내 정신이 돌아오는 바로 전까지 그는 마음껏 환상의 세계를 누빈다. 연출 또한 그가 환상의 세계에서 만나는 ‘비둘기 마녀’와 그녀의 하수인들의 모습을 형상화하는데 더 많은 공을 들였다. 오로라 공주를 가둔 훌라후프를 돌려가며 요란하게 등장하는 비둘기 마녀의 코믹한 출현이나 평범한 지하철역 행인들이 순식간에 비열한 중간보스의 모습으로 둔갑하는 장면의 상상력과 표현이 재기발랄하다. 적절한 음악 또한 이 장면의 효과를 증대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코믹 환상물에 머물지 않는다. 작품 안에는, 실수 한 번에 고급 호텔 셰프에서 부랑자로 전락한 ‘나부랑’과 매일 서울역에 나와 비둘기 모이를 주는 한 ‘오복순’ 할머니의 독백이 비중 있게 등장한다. 이들의 독백은 부분적으로-특히 나부랑의 독백-군더더기를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이지만 김봉팔의 사연에 사회적 맥락을 덧붙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돈이 없으면 자식도 치료할 수 없는 세상, 한 번의 실수로도 추락 가능한 세계, 자식들이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그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세태는 공통적으로 현대 사회의 비인간성을 드러낸다. 김봉팔, 나부랑, 오복순 할머니 모두 이 사회의 잔인함에 상처 받은 인물로 그들의 방랑과 기행엔 다 이유가 있다.
비둘기 마녀의 근거지가 서울역이라는 나부랑의 농담을 ‘박사님’의 조언으로 받아들인 김봉팔이 오복순 할머니와 결투를 벌이는 장면은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다. 치열한 결투 끝에 김봉팔은 ‘비둘기 마녀’에게서 구출한 과자봉지를 끌어안고 아내 한공주의 환영을 본다. 그는 원망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위로에 드디어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 원래의 자신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작품의 초반과 피날레의 격렬한 감정 표출은 다소 절제되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젊은 배우들의 열의 있는 연기가 인상적인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오복순 역을 맡은 심혜주 배우의 할머니 연기가 훌륭했다. 돈만 보이고 부모는 안 보이는 자식들의 행실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그녀의 자조 섞인 짧은 독백에는 단순한 슬픔이 아닌 텁텁한 회한이 묻어났다.
이 작품은 감당 못할 충격과 슬픔으로 인해 방황하는 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돌아보게 한다. 멜로적 측면이 강하긴 하지만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설정의 재미가 확연하므로 몇 가지 보완을 통해 더 묵직한 작품으로 개선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는 아직은 한 시간 정도에 그치고 있는 이 작품의 공연시간을 늘리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김봉팔의 환상은 단계별 결투 장면의 연쇄에 가까우며 그의 현실 또한 사건전개보다는 그의 주변 인물들을 독백을 통해 배경처럼 제시하는 데 주력하고 있는데, 이 모든 요소들의 유기적인 결합을 위해서는 여기에 사건을 추가해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푸념조로 반복되는 개개 인물들의 대사를 덜어내는 대신 이들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면 ‘한 명의’ 김봉팔이 아닌 ‘모든’ 김봉팔들을 보듬는 작품으로 거듭날 것이라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