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연극시장은 처연하고 애처러운 지경이며, 폐쇄적 게토와의 조짐도 뚜렷하다는 편집장님의 말씀에 동감하며, 저도 정말 가슴이 답답해 옵니다.
물론 저도 비평의 기능과 역할에 편집장님의 의견에 너무나 동감합니다. 하지만 이게 어디 평론가만의 책임이겠습니까? 따라서 저는 이 기회에 어째서 우리의 연극이 발전하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연극이 기술적으로 발전을 멈추고 있는가를 제 나름대로 말하고 싶습니다. 특히 연기와 연출에 대해서 문제를 한번 거론하고자 합니다.
1. 우리 성악계는 스스로 연주 당사자들이 자기들의 노래하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한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목소리를 들어줄 스승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고 동료의 조그마한 충고에도 귀를 기울입니다. 자기들에게 맞는 스승을 만나는 것을 중요시해 세계를 뒤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지금 유럽무대를 휘잡는 테너 윤정수씨가 유투부에 나와서 스코틀랜드에서 맹인인 스승을 만난 이야기를 들려줄 정도입니다.
그런데 한국연극은 스승의 소중함도 동료배우나 선배의 조언도 비평의 목소리도 거부합니다. 일단 우리 배우들은 남의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외국처럼 보이스나 연기코치가 존재하는 시스템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런 곳에서 비평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되레 평론가가 무식하다고 하면서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2. 목소리를 내어 연주하는 장르 중에 오로지 연극만이 더블배역이 없습니다. 우리의 오페라, 판소리, 뮤지컬은 물론이고 무용이나 발레도 모두 더블 배역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름 대가를 지불하는 국립극단이나 시립극단, 도립도 더블이 없이 한사람이 다 소화합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편집장님이 원하시는 레파토리시스템을 우리 연극판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죠. 아예 개념조차 없습니다.
3. 그러니 연기자끼리도 경쟁이 없습니다. 아예 이를 포기하고 즐기는 곳이 연극판입니다. 한마디로 상대로부터 애초부터 재능과 기술의 차이를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더블을 죽음보다 더 경멸하고 싫어합니다. 그러니 남의 조언도 들으려 하지 않고 남과 비교하여 자신의 기량을 확보할 정보를 얻을 기대를 포기하고 있으니 무얼로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다 평론도 구체적으로 연기와 연출을 거론하지 않으니 천년이 지나도 우리 창조자들의 기량향상과 발달은 기대가 난망입니다.
4. 거기다 한국연극은 레파토리화할 변변한 고전이 없습니다. 또 모두가 그걸 도모할 생각도 자신도 없는 게 현실입니다. 그러니 매번 한번 쓰고 버리는 창작극으로 세월을 보냅니다. 그러니 비평도 당연히 새로 등장한 희곡의 내용을 설명하는 게 전부일 수밖에요. ‘앵콜’을 할 고전이 많아야 연출도 배우도 새롭게 시도를 도모하며, 전작들과 비교하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할텐데, 대충 연출하고 연기하고 연말이나 연극제에서 상한번 타고 버려버리는 게 숨길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비평이라도 전부 나서서, 신작 공연에 서로간에 갑론을박을 시도해야 창작자들이 긴장할텐데, 솔직히 ‘이번에 이 공연은 내가 쓸테니 넌 다른 것 써’ 이런 식으로 비평에도 경쟁이 없으니 누가 긴장하겠습니까? 그러니 창작자들은 평론가 욕 한번하고 끝냅니다. 혹독한 비평이 마이동풍이 될 수밖에요. 이런 분위기니, 평론가도 창작자와 자주 마주치는 사이인 좁은 판에서 ‘두리뭉술, 눈치비평’이 전부일 수밖에요. 그냥 무난하게 비평하고 끝내는 게 도리라는 생각이 드네요.
5. 일본연극은 기량을 위해 극단의 선배로부터 익히는 도제식 교육이 발달하고, 중국은 러시아로부터 물려받은 교육시스템이 발달했다는 평가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가르칠 선배도, 교육시스템도 없으며, 거기다 일본이나 중국은 대대로 전해오는 자기들만의 전통연극이 강하고 번성해, 기량의 대물림이라도 가능한 게 현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창작극을 해도 자기들의 전통연극을 통한 배우의 기량향상과 연출력의 발전이 가능한데, 우리는 이마저도 없으니, 아무리 궁리를 해도 우리의 연극이 살아날 희망은 전무하다는 생각뿐입니다.
우리의 연극시장은 처연하고 애처러운 지경이며, 폐쇄적 게토와의 조짐도 뚜렷하다는 편집장님의 말씀에 동감하며, 저도 정말 가슴이 답답해 옵니다.
물론 저도 비평의 기능과 역할에 편집장님의 의견에 너무나 동감합니다. 하지만 이게 어디 평론가만의 책임이겠습니까? 따라서 저는 이 기회에 어째서 우리의 연극이 발전하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연극이 기술적으로 발전을 멈추고 있는가를 제 나름대로 말하고 싶습니다. 특히 연기와 연출에 대해서 문제를 한번 거론하고자 합니다.
1. 우리 성악계는 스스로 연주 당사자들이 자기들의 노래하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한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목소리를 들어줄 스승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고 동료의 조그마한 충고에도 귀를 기울입니다. 자기들에게 맞는 스승을 만나는 것을 중요시해 세계를 뒤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지금 유럽무대를 휘잡는 테너 윤정수씨가 유투부에 나와서 스코틀랜드에서 맹인인 스승을 만난 이야기를 들려줄 정도입니다.
그런데 한국연극은 스승의 소중함도 동료배우나 선배의 조언도 비평의 목소리도 거부합니다. 일단 우리 배우들은 남의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외국처럼 보이스나 연기코치가 존재하는 시스템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런 곳에서 비평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되레 평론가가 무식하다고 하면서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2. 목소리를 내어 연주하는 장르 중에 오로지 연극만이 더블배역이 없습니다. 우리의 오페라, 판소리, 뮤지컬은 물론이고 무용이나 발레도 모두 더블 배역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름 대가를 지불하는 국립극단이나 시립극단, 도립도 더블이 없이 한사람이 다 소화합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편집장님이 원하시는 레파토리시스템을 우리 연극판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죠. 아예 개념조차 없습니다.
3. 그러니 연기자끼리도 경쟁이 없습니다. 아예 이를 포기하고 즐기는 곳이 연극판입니다. 한마디로 상대로부터 애초부터 재능과 기술의 차이를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더블을 죽음보다 더 경멸하고 싫어합니다. 그러니 남의 조언도 들으려 하지 않고 남과 비교하여 자신의 기량을 확보할 정보를 얻을 기대를 포기하고 있으니 무얼로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다 평론도 구체적으로 연기와 연출을 거론하지 않으니 천년이 지나도 우리 창조자들의 기량향상과 발달은 기대가 난망입니다.
4. 거기다 한국연극은 레파토리화할 변변한 고전이 없습니다. 또 모두가 그걸 도모할 생각도 자신도 없는 게 현실입니다. 그러니 매번 한번 쓰고 버리는 창작극으로 세월을 보냅니다. 그러니 비평도 당연히 새로 등장한 희곡의 내용을 설명하는 게 전부일 수밖에요. ‘앵콜’을 할 고전이 많아야 연출도 배우도 새롭게 시도를 도모하며, 전작들과 비교하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할텐데, 대충 연출하고 연기하고 연말이나 연극제에서 상한번 타고 버려버리는 게 숨길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비평이라도 전부 나서서, 신작 공연에 서로간에 갑론을박을 시도해야 창작자들이 긴장할텐데, 솔직히 ‘이번에 이 공연은 내가 쓸테니 넌 다른 것 써’ 이런 식으로 비평에도 경쟁이 없으니 누가 긴장하겠습니까? 그러니 창작자들은 평론가 욕 한번하고 끝냅니다. 혹독한 비평이 마이동풍이 될 수밖에요. 이런 분위기니, 평론가도 창작자와 자주 마주치는 사이인 좁은 판에서 ‘두리뭉술, 눈치비평’이 전부일 수밖에요. 그냥 무난하게 비평하고 끝내는 게 도리라는 생각이 드네요.
5. 일본연극은 기량을 위해 극단의 선배로부터 익히는 도제식 교육이 발달하고, 중국은 러시아로부터 물려받은 교육시스템이 발달했다는 평가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가르칠 선배도, 교육시스템도 없으며, 거기다 일본이나 중국은 대대로 전해오는 자기들만의 전통연극이 강하고 번성해, 기량의 대물림이라도 가능한 게 현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창작극을 해도 자기들의 전통연극을 통한 배우의 기량향상과 연출력의 발전이 가능한데, 우리는 이마저도 없으니, 아무리 궁리를 해도 우리의 연극이 살아날 희망은 전무하다는 생각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