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란 무엇인가?’
너무 거창하다. 질문을 바꾸자.
‘나는 무엇인가?’
너무 모호하고 막연하다. 질문을 합쳐보자.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조금 낫다….
인류가 태동한 이래 지금까지 종교, 과학, 철학, 예술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이 하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 ‘존재’에 관한 물음일 것이다. 때로는 이것 때문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불사하고, 이것 때문에 서로 화합하며, 이것 때문에 위대한 예술작품이 탄생하기도 한다. 어쩌면 인류가 공통으로 해결해야 할 유일한 숙제는 바로 이 ‘존재’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연극 <Be> (채수욱 작/연출)의 줄거리를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다. 서로 가족 관계인 네 사람의 ‘현존재’들이 이미 세상을 떠난 한 사람의 가족을 추억하며 각자가 기억하는 존재에 대한 철학적 담론들을 쏟아내는 것이다.
‘현존재’라는 말은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에 의해 제시된 개념으로, 독일어 원어로는 ‘dasein’이라고 하는데, ‘da’는 ‘거기에’라는 의미이고 ‘sein’은 바로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 말의 의미를 살펴보면, 우리가 존재자라고 부르는 이미 실존하고 있는 각각의 주체들은 모두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무언가 다른 존재들이 같이 뒤섞여 있으며 우리는 ‘거기에’ 기반하고 더불어서 존재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존재’란 ‘나’라는 본질이 따로 있고 ‘타자’라는 대상이 따로 있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타자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인 일원론적 세계관에서 그 의미를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자가 배제된 완전히 순수한 나 자신은 발견할 수 없는 것인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을 인식할 때이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한줄기 빛조차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 홀로 있을 때 느끼는 근거를 알 수 없는 ‘불안’을 바로 죽음을 인식한 순간 발견할 수 있는 순수한 자신이라고 말한다. 즉, 타자(그것이 공간이든 시간이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가 배제된 순수한 존재라는 것은 죽음을 인식하는 ‘불안’ 이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이제 작품 속으로 다시 들어가 보자. 작가가 의식적으로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구성을 했든 아니든 이 작품 속에는 실존적이고 현상학적인 철학적 질문들과 그에 대한 나름의 대답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철학적 질문들에 함몰된 채 작품을 무겁게 끌고 가지는 않는다. 연출은 자칫 무겁고 어렵게 들릴 수 있는 철학적 담론들을 마치 농담을 던지고 잡담을 늘어놓듯 객석에 툭툭 던져 놓는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무거워지고 지루해졌다고 판단이 되면 재빨리 진짜 농담들을 풀어놓아 삽시간에 분위기를 가볍게 전환시키는 영리함도 보여준다. 비록 철학적 담론들을 이야기 하고는 있지만 현장에서는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그냥 웃고 즐기며 몸으로 극을 받아들이고, 질문에 대한 답은 집에 가서 각자 알아서 생각해 보라는 듯 말이다.
이처럼 유쾌하고 경쾌한 연출의 성향은 작가이자 연출인 채수욱의 전작인 <무지개의 끝>과 마찬가지로 무대장치와 공간에 대한 기발한 의미 부여와 각종 오브제들의 재기발랄한 트랜스폼으로부터 도드라지게 표현되는데, 이것은 작품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결과를 낳는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 작품의 무대장치이자 대도구로 사용되는 사물함이다. 처음 극이 시작되었을 때는 그저 단순한 사물함이나 장식장처럼 보이던 이 사각형의 밋밋한 구조물은 극이 진행되어 가면서 때로는 식탁과 의자가 되고 때로는 소파가 되며 심지어 버려진 버스 정류장으로도 변신하면서 기발한 의미의 변화를 이끌어 낸다. 마치 영화 트랜스포머의 변신 로봇을 보는 듯한 기분이다. 이것은 관객에게 꽤나 흥미롭고 재미있는 시각적 즐거움도 주지만, 한편으로 작품의 주제를 전달하는데 더할 나위없는 역할을 담당한다. 바로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의 해석인 것이다.
존재란 본질적으로 규정된 하나의 고정관념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변신할 수 있는 트랜스포머라는 것. 이것이 바로 사물함의 변신이 말하고자 하는 작품의 주제가 아닐까 한다.
물론 작품에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아쉬웠던 점이 바로 작품의 서사성이다. 극의 서사성이 약하면 제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로 중무장을 한다고 해도 작품은 시간이 흐를수록 지루해지고 힘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스토리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묻어나지 않는 철학적 담론들은 철학 강의를 듣는 것만 같은 연극적 오류에 빠지게 만들고, 캐릭터와 아이디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반쪽짜리 사과를 먹는 찝찝한 기분이 들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통해 극단과 연출가의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하게 만드는 건, 작품의 작가이자 연출가이며 배우로도 활동하는 채수욱이라는 존재에 대한 가능성 때문이다. 그는 연극계에서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이른바 ‘패륜아’(극작과 연출, 배우를 다 섭렵하고 있기에 남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의미)다. 그의 작품은 그래서 바로 그의 삶 자체와 맞닿아있다. 자신을 어느 한 분야에 고정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변신하는 것. 그렇게 자신을 분열시켜 새로움을 탄생시키는 것. 분열이 곧 창조이며, 하나의 죽음이 하나의 탄생이라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연극이라는 장르를 수행해 가는 존재들이 기본적으로 장착해야 하는 트랜스포머적 자세가 아닐는지…. 그리고 그 트랜스포머적 사고로 존재와 삶을 바라볼 때 우리는 무의미한 존재자로서의 개별적 존재가 아닌 삶의 맥락 속에 살아 숨 쉬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존재자들이 될 수 있지 않을는지….
모든 존재가 한 점으로부터 출발했다는 빅뱅이론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별 하나 하나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은하수 전체를 바라봐야 한다는 니체의 말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와!!!
전문가의 감상평은 확실히 다르네요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