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숙(연극평론가/숭실대 교수)
최원종 연출
차근호 작
이종무 이경규 김규도 박희정 유종연 김수민 강기혁 김동현 이석진 신무길 출연
2021.12.21.-12.26 홍대다리 소극장
극단 명작옥수수밭이 근현대사 재발굴 시리즈로 2021년도에 쏟아낸 작품들의 성과가 화려하다. 2021년 1월 22일부터 1월 31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한 최원종 연출 차근호 작의 <깐느로 가는 길>로 한국극작가협회의 대한민국 극작가상을, 5월 20일부터 6월 1일까지 한양레파토리 씨어터에 공연한 최원종 연출 차근호 작의 <타자기 치는 남자>로 대산문학상 희곡상을 받았다. <패션의 신>은 극단 명작옥수수밭의 2021년 마지막을 작품으로 1964년을 배경으로 한 공연이다. 패션과 1964년의 연관성에 궁금증을 자아낸 작품이다.
- 이중의 딜레마
공연이 시작되기 전 무대는 의상실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프랑수아 장 브티끄’라는 간판이 있고, 1960년대 의상이 걸려있다. 프랑수아(이종무 분)는 한국 최초로 파리에서 패션을 공부한 디자이너이다. 그가 얼마나 쟁쟁한 인물인지는 그에게 조언을 해 주는 사람이 피에르 가르뎅이고, 그의 성공을 축하해 줄 사람이 샤넬과 크리스티앙 디오르라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어떻게 1950년대부터 파리에서 유학을 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성공한 디자이너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와 활동하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예술가로서의 자부심만큼은 확고하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조수 루이(김규도 분)가 “훌륭하다”는 찬사를 해도 그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완벽”해야 직성이 풀리는 장인이다. “완벽”한 작품을 위해서라면 위험한 모험도 마다 않을 열정이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프랑수아의 내면적 가치는 다소 모호하다. 고아원 출신 루이를 파리로 유학 보낼 계획을 하고 그에게 불어 공부를 격려하는 점에서 그는 꽤 괜찮은 인물이지만 모델을 디자이너가 만든 옷을 잘 볼 수 있게 하는 ‘옷걸이’로 취급하고 자신의 고객에 대해 ‘돼지 목에 진주 귀걸이’한 것으로 비하하거나 자신을 후원해준다면 개든 돼지든 상관없다고 하는 태도에서는 비인간적인 면모가 있다.
사건은 프랑수아에게 육군방첩부대 방산도 대령(박경주 분)이 찾아와 군복을 주문하는 데서 시작한다. 군복을 만들기 위해 구태여 패션 디자이너를 찾아온 이유는 세계 군복 콘테스트에서 한국이 꼴찌를 했고, 내년 대회에서만큼은 꼴찌를 면하기 위해서이다. 방산도에게 대한민국의 군복이 ‘북괴’의 군복보다도 못하다는 것은 몹시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예상치 못한 주문이라 주저하는 프랑수아를 설득한 인물은 루이이다. 프랑수아 장이 대한민국 최고의 디자이너이고 ‘패션의 신’이니 당연히 세계 최고의 군복을 만들 것이라고 부추긴다. 루이가 군복 만드는 일을 부추긴 것은 군인에 대한 각별한 호감이 영향을 주었다. 루이는 6.25 전쟁고아이다. 그래서 북한 군복을 가위로 찢고 싶은 충동을 느낄 만큼 공산당에 대한 루이의 적대감은 깊다. 루이에게 북한과 같은 공산군은 악이며, 공산군을 쳐부수는 것이 선이다. 루이가 전쟁에 나가고 싶은 것도 부모의 생명을 앗아간 것에 대한 복수이다.
아티스트 프랑수아에게 군복 만드는 일은 심리적으로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디자이너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인데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사람”을 위해 옷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이에게는 이 일이 복잡한 일이 아니다. 빨갱이는 아름답지 못한 사람이므로 모조리 없애버려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 일을 하는 대한민국 군인을 위해 아름다운 군복을 만드는 것은 전혀 모순된 일이 아니다. 이처럼 프랑수아에 비해 루이의 생각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그러한 생각은 북한군에 의해 전쟁고아가 되었기 때문이고 대한민국 정부의 지배 이데올로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수아가 군복의 주제를 고민하다가 생각해 낸 것은 ‘홍익인간’이다. 이는 루이나 방산도가 기대했던 ‘멸공’, ‘반공’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홍익인간’의 컨셉에 맞춘 군복은 그 패턴, 색감, 스타일이 전형적인 군복과는 매우 다를 수밖에 없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주제를 자비를 상징하는 커다란 연꽃으로 표현한 것이다. 커다란 붉은 색 연꽃은 적에게 과녁이 될 정도로 눈에 띈다. 이처럼 군복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는 군복이 방산도의 마음에 들 리 없다. 그래서 방산도는 프랑수아에게 일주일간의 군대 체험을 제안한다. 바다를 보지 못한 사람에게 배를 만들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군대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 군복을 만들라고 한 것이 잘못이라며 일주일간의 군대 체험을 제안하고 그 대가로 프랑수아가 꿈꾸는 패션 학교를 약속한다.
프랑수아에게 군대 체험은 디자인에만 치중하여 기능을 고려하지 않은 자신의 미흡한 점을 몸소 깨닫는 기회가 된다. 그런데 보완점을 모두 파악했다고 생각한 시점에 의도치 않게 미군들과 함께 군비행기에 실려 베트남으로 가게 된다. 베트남에서 그는 표적이 될 만한 군복을 입은 탓에 쉽게 베트콩의 포로가 되어 동굴에 갇힌다. 여기서 그는 죽은 줄로 알았던 파리 유학시절 연인 아멜리(박희정)를 만나게 된다. 아멜리가 조국을 위해 자신을 떠나 일급 저격수, 북베트남의 반미 혁명 전사가 된 것이다. 그녀는 대한민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는 것은 베트남 통일을 방해하는 것이며 명분도 없다는 베트콩 상부의 메시지를 프랑수아 편에 보내는 것으로 그의 무사귀환을 돕는다.
프랑수아가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적군의 메시지를 들고 돌아오자 간첩으로 몰리게 된다. 방산도는 베트남 참전이 우리가 살기 위한 국가적 선택이라고 말한다. 미국은 한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 나라가 파괴되고 내 가족이 죽는데 살려야지.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무조건 살려야지! 이건 명분의 문제가 아니야! 생존의 문제야, 생존!” 프랑수아는 명분과 생존 사이에서 딜레마를 겪게 된다.
베트남에 한국군을 보내 주한 미군의 철수를 막아 생존을 지키거나
베트남의 통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한국군을 보내지 않아 명분을 지켜야 한다.
생존을 따르냐 명분을 따르냐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생존을 따르자면 베트남에 있는 연인이 위험해진다. 명분을 따르자면 자신이 위험해진다.
이 딜레마에서 프랑수아는 처음에 아멜리의 입장이 되어 명분을 앞세우지만 방산도가 총구를 얼굴에 들이대자 생존을 구걸하며 목숨을 부지했다. 프랑수아가 아닌 어느 누구라도 베트남을 위한 명분보다는 자신의 생존이 우선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군복을 완성하기 위해 의상실로 돌아온 프랑수와에게 더 심각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루이가 베트남전에 신청했다는 것이다. 참전하려는 루이의 의지는 확고하다. 루이에게 베트남 참전은 도덕적인 일이다. 자신의 부모를 죽인 원수 “빨갱이라는 악을 없애”는 것은 명백히 선한 것이다. 프랑수아는 루이가 총을 겨눌 적군이 바로 아멜리와 같은 베트콩이라는 점에서 갈등이 시작된다. 자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아끼는 루이가 아멜리와 싸우게 될 것을 생각하자 큰 혼란에 빠진다. 방산도의 총구 앞에서는 명분과 생존의 딜레마 중 생존을 선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자신이 아끼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진영에서 총구를 맞대는 상황에서는 어찌할 바를 알 수 없다. 이제 프랑수아는 처음으로 전쟁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원치 않는 전쟁을 위한 군복을 자신이 만들어야 해서 더욱 견디기 어렵다. 자신이 만든 군복을 입은 루이가 죽거나 죽이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프랑수아에게 이 상황은 무엇으로도 피할 수 없는 ‘벽’이자 ‘한계상황’이다. 실존철학자 야스퍼스는 ‘상황’과 ‘한계상황’을 구분한다. 야스퍼스에게 ‘상황’은 나에게 이익 또는 손해인 것, 기회 또는 제한을 의미하여 지금 현재의 상황을 피해 다른 상황으로 들어서게 할 수 있다. 방산도의 총구 앞에서 명분과 생존 중 선택하는 상황이 바로 그렇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더 좋은 상황으로 전환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한계상황’은 ‘상황’처럼 변화 가능한 것이 아니다. 한계상황은 우리가 거기에 부딪히고 난파하는 하나의 ‘벽’과 같다. 야스퍼스는 ‘상황’을 ‘의식’에 속하는 것으로 ‘한계상황’을 ‘실존’에 속하는 것으로 구분한다. 한계상황을 자각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계상황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의 변화, 실존의 자각이 생긴다는 말이다. 그래서 “한계상황을 경험하는 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존재의 도약이다.” 한계상황을 인식하게 되면 어떠한 상황 변화를 위한 노력에도 극복되지 않고, 무시할 수 있거나 망각하거나 객관적인 위로로 극복되지 않는 단절과 분리의 고통을 떠안게 된다. 고독한 프랑수아는 새로운 의미에서 자기 자신, 자기의 고유한 실존을 발견한다.
2. 기능이 아닌 삶으로써 패션
군복과 패션의 연결이 생소한 것은 아니다. 패션의 역사를 살펴보면 군복이 패션에 미친 영향은 상당하다. 자본과 기술이 집약된 군대가 최상의 제품을 개발하는 곳인 만큼 군대에서 검증된 디자인과 기능이 대중의 선택을 받아 일상에 흘러들곤 한다. 예컨대, ‘위장’, ‘변장’이란 의미의 ‘카무플라주’ 룩, 견장 같은 디테일로 장식한 밀리터리 룩, 경쾌한 스트라이프 패턴의 네이비 룩, ‘야상’이라 불리는 야전 재킷, 군화인 콤배트 부츠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군대 패션 중 가장 오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트렌치 코트이다. 트렌치 코트는 습하고 추운 참호에서 전투하는 군인들을 위해 몸을 따뜻하게 보호하고 통기성, 내구성, 방수성을 고려하여 만든 옷이다. 이를 버버리의 설립자 토머스 버버리가 1차 세계대전 중에 자신이 개발한 옷감인 개버딘으로 만들어 ‘버버리 코트’가 되었다. 애초에 레인 코트로 만들어졌다가 활동성을 높이기 위한 등 부분의 주름, 수류탄을 걸 수 있는 고리, 소매를 걷고 작업할 수 있도록 고안된 손목의 조임 끈, 바람의 방향에 따라 좌우로 여밀 수 있는 더블브레스트, 총을 어깨에 편하게 대도록 덧댄 어깨 고리 등은 모두 군인을 위한 기능적 요소였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남녀 모두가 즐기는 대중적인 패션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만약 프랑수아처럼 ‘홍익인간’의 컨셉으로 군복을 만든다면 전쟁에 대한 관점은 어떻게 달라질까? 과연 ‘홍익인간’은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그것이 군복의 기능에 부합할 수 있을까? 대중적인 패션으로까지 사랑받을 수 있을까?
패션은 단순히 무엇을 입고 어떻게 보일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코코 샤넬은 “패션은 내게 불어오는 공기 속에 있으며 바람 위에서 태어난다.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고 들이마신다.”고 했다. 패션을 단순히 옷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총체로 보는 관점이다. 프랑수아가 군복에 담을 주제를 고민했을 때 그는 군복을 입은 군인이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디자인했다. 애초에 프랑수아가 생각한 ‘홍익인간’은 루이나 방산도가 생각하는 것처럼 빨갱이는 ‘악’, 적을 죽이는 것은 ‘선’이라는 이분법과 거리가 멀었다. 그런 프랑수아가 마주한 딜레마는 그가 살고 있는 시대와 그가 추구하는 가치의 충돌이다.
취조실에서 겪은 생존이냐 명분이냐의 딜레마 상황에서 프랑수아는 쉽게 생존을 선택했지만 루이의 베트남 참전을 계기로 맞이한 한계상황에서는 어떤 군복을 만들 것인가의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그의 실존적 결단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고독한 단독자가 되어 자신의 가치를 완벽히 승화시키는 군복을 만든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 놓아야 할 정도로 위험한 작업이다. 그는 이미 취조실에서 협박과 살해 위협을 당했다. 그가 살기 위해 만들어야 하는 군복은 당시의 이분법에 근거한 적군을 잘 죽일 수 있는 군복이어야 한다. 그러나 프랑수아가 만든 최종 작품은 그가 군대체험을 통해 얻은 보완점을 반영한 군복이 아닌 반전(反戰)과 평화의 이미지를 극대화한 하얀 꽃으로 장식된 드레스(박현주 의상)이다. ‘죽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는’ 군복에 대한 반전(反轉)의 드레스이다. 프랑수아는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인지를 작품으로 표현한다. 그는 자신의 최후의 걸작을 위해 그 자신이 모델이 되어 자신의 삶과 실존을 증명해 보인다. 그것은 적군을 죽이는 살상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서 존재감을 부여한 옷이다.
3. 닫힌 무대와 열린 무대의 효과
최원종 연출은 <패션의 신>을 닫힌 무대와 열린 무대로 구분하여 사용한다. 프랑수아가 옷을 만드는 양장점, 방첩부대의 취조실은 닫힌 무대로 군대 연병장, 비행 중인 비행기 안, 베트남의 정글과 베트콩의 아지트인 동굴, 파리의 노천카페는 열린 무대이다. 닫힌 무대는 사실성을 강조한 반면 열린 무대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공간이다. 각 장면이 모두 독립적으로 연출되다가 닫힌 무대와 열린 무대가 혼재하는 장면이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베트남에서 돌아와 양장점에서 상상 속의 아멜리와 현실의 루이 둘 다와 교차하며 대화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 바로 이 환상 속 아멜리와의 대화장면이다. 이 장면은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부분임에도 효과적으로 보여주지 못했다. 프랑수아는 환상 속 아멜리에게 자신이 도망자였음을 고백한다. “양심에서 도망쳤고, 약속에서 도망쳤고, 이 나라에서 도망쳤어. 내 안은 텅 비어 있어. 이 껍데기. 그 총으로 나를 쏴 줘.” 실존의 자각을 보여주는 핵심 장면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약화되었다. 프랑수아가 그 동안의 삶을 도망자로 살아왔다는 반성과 이제까지와 다른 삶을 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돋보이지 않았다. 현존의 태도에서 실존의 자각으로 전환되는 장면을 이토록 맥 빠지게 한 요인은 무엇일까? 프랑수아는 프랑스에서의 성공을 위해 위장 결혼을 하고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한 인물이다. 군대를 피했고, 전쟁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부유한 사모님들을 위해 옷을 만들지만 그들이 개든 돼지든 상관없다는 무심한 태도였다. 모델을 옷걸이로 생각하는 권위적인 디자이너였다. 그런 그가 이 장면에서 스스로를 반성한 후에는 이전과 전혀 다른 태도로 바뀐다. 이후, 방산도 앞에서 자신이 모델이 되어 자신의 최고 걸작을 입고 등장할 때, 모델은 옷걸이가 아니라 “옷을 빛내주는 런웨이의 배우”라고 자신의 바뀐 태도를 관객에게 확인시켜 준다. 그의 작품은 이전의 주제인 ‘홍익인간’을 더 완벽하게 표현한 것으로 서로 싸울 마음을 앗아가는 옷이다.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해서 웃기만 할 수 있는 군복이라고 소개한다. 이러한 전환을 이해시킬 장면이 바로 아멜리와의 환상 대화인데 그 장면을 효과적으로 연출하지 못해 프랑수아의 죽음이 갑작스럽고 당혹스럽게 느껴진다.
이 장면 외에도 파리의 노천 카페의 장면이 다소 느슨했다. 사랑하는 남녀의 로맨틱한 장면이라 밝고 화사했지만 두 배우의 부조화 때문인지 다른 장면들과 달리 어색했다. 그 원인이 무엇일지는 재공연을 위해 더 고심하기를 바란다.
희망을 말하는 한자어 ‘희(希)’자에는 집단이 함께 직물을 짜는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다. 직물을 짜는 것은 옷의 재료를 만드는 일을 넘어, 한 사회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만드는 일이다. 직물을 짜는 것은 그저 옷의 재료를 만드는 일을 넘어 한 사회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짜는 일이다. 이것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이것은 연극이 하는 일이기도 하다. 서로 바라보기만 해도 웃을 수 있는 그래서 아무도 죽일 수 없고 죽지 않는 군복이라는 발상이 신선하다. 패션과 베트남 참전을 엮은 기발한 발상과 프랑수와 역을 잘 소화한 배우가 돋보인 연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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