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로> 이태림 역, 이유정
김소연_ 연극평론가
페르소나. 화제의 연극을 직접 무대에 선 배우와 함께 구석구석 살펴봅니다. 배우와 함께 나누는 캐릭터, 연기, 연극 이야기.
붉은 바탕, 그에 대비되는 목탄 질감의 검은 색으로 그려진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해골.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문장. “사랑아 입맞춰라 죽음아 타올라라” 그림에 다시 시선을 두면 해골의 오른편 끝이 흐려지면서 번져가는 모습이 불길에 휩싸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화로>의 포스터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죽음을 무릅쓴 뜨거운 사랑 이야기일까. 그렇다. <화로>는 사랑 이야기이고,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다. 그리고 뜨거운 이야기다. 그런데 사랑만 뜨거운 것이 아니다.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더 뜨겁다.
‘중년의 끝물’, 초로에 들어선 판교와 태림은 40년 만에 우연히 해후한다. 긴 시간의 헤어짐에도 불구하고 둘은 첫사랑을 한눈에 알아보고 이루지 못한 사랑을 다시 시작한다. 당연히 이들의 사랑에도 험난한 장애가 펼쳐진다. 초로의 사랑이라고 지레짐작할 것이 아니다. 은퇴라든가 늙어가는 육체의 문제가 아니다. 판교는 자신의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님이다. 경제적으로도 건재해 보이는데 자식들과의 갈등을 유산으로 제압해버린다. 그에 비하면 태림가든 사장님 태림의 상황은 넉넉지 않다. 영 장사가 시원치 않은 태림가든을 정리하려고 내놓았다. 하지만 태림도 아직은 스스로 몸을 움직여 자신의 삶을 건사할 수 있다. 물론 노년의 사랑에 등장하게 마련인 갈등도 있다. 둘 모두 각각 가정을 꾸렸고, 자식들의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태림은 중증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을 돌보아야 한다. 고됨과 애달픔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식에 대한 애달픔이란 것이 어리고 자라고 성하고 성치않고 때문만은 아니다. 그리고 다시 만난 판교는 태림의 태림의 애달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도리어 이들의 사랑을 가로막고 나서는 것은 장성해서 제각각 가정을 꾸리고 있는 판교의 자식들이다. 유복하다면 유복하다 할 판교이지만, 바로 세상이 말하는 ‘복’이 갈등의 씨앗이다. 다시 만난 첫사랑과의 재혼을 극렬히 반대하는 자식들은 태림을 향해 서슴없이 ‘꽃뱀’이라고 몰아부친다.
‘격정 멜로’를 표방하는 이 연극은 사랑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떨림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는다. 태림과 판교는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다시 사랑을 시작한다. 이들의 사랑은 그저 노년의 고독이라든가 삶에 대한 회고가 아니다. 이 연극에는 장면을 맴돌고 있는 고양이들이 등장하는데, 태림가든 마당의 풍경이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양식적인 코러스가 되기도 한다. 풍경처럼 혹은 양식적인 주석처럼 등장하는 고양이들은 태림과 판교의 사랑이 반성적이고 성찰적인 것만이 아니라 (이것은 노년의 사랑이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랑이 그러하다) 육체적 욕망을 지우거나 배제하지 않고 둘의 사랑의 한가운데에 놓는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의 뜨거움은 그 욕망의 열도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뜨거움은 이들의 사랑을 가로막고 나서는 장애에서 비롯된다. 판교와 태림은 이 장애들 앞에서 주저하거나 우회하지 않고 거침없이 부딪치면서 나아간다. 그 거침없음은 한편으로 이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가 우회할 수 없을 만큼 가혹한 폭력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이 장애에 맞서는 이들 역시 폭력을 동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사랑 앞에서 서슴없이 ‘꽃뱀’이라고 몰아붙이는 자식들만으로도 막장드라마에서도 보기 드문 탐욕과 폭력일 것이다. 그 폭력은 태림을 향하는 것이면서 판교에게도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판교가 일방적인 희생자인 것도 아니다. 판교는 며느리의 외도를 의심하면서 손자의 DNA 검사를 의뢰하고 아들에게 이혼을 종용한다. 그런 아버지 앞에서 아들은 동성애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고통을 고백한다. 판교와의 사랑이 시작되고 태림이 겪는 것은 ‘꽃뱀’이라는 폭력만이 아니다. 자식들은 그녀의 과거를 캐고 그녀가 장애인 성매매를 했다는 사실을 고발한다. 판교를 만나기 전 지나간 사랑은 리벤지포르노를 유포하고 그것으로 돈을 번다. 그녀는 성매매로 처벌받고, 리벤지포르노를 유포한 전 남자친구를 살해한다. 이 모든 폭력과 폭력이 판교와 태림의 사랑에서 시작되고 부풀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연극을 따라가다보면, 이 연극이 전개하고 있는 ‘뜨거운’ 사랑이라는 것이,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를 거침없이 돌파해가는 그 ‘뜨거움’을 위해 세상의 폭력을 무대 위에 전시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더구나 판교와 태림의 사랑 앞에 나타나는 장애란 왜 태림을 향한 폭력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일까. 자식들의 난폭한 방해가 판교에게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그 직접적인 폭력은 태림을 향하는 것이다. 태림이 겪는 리벤지포르노 유포는 판교와 태림의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로 그려지기에는, 그 사건 자체의 폭력성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크다. 장애인 성매매는 어떤가. 태림에게 성매매는 범죄가 아닌 노동이다. 그러나 성인이 된 아들이 겪고 있는 성적 욕구와 욕망의 문제와 태림의 장애인 성매매가 연관되면서 장애에 대한 대상된, 그래서 폭력이 될 수도 있는, 연민이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연극이 이러한 의심과 우려를 설득해냈는가에 대해 흔쾌히 답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실마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결국 판교와 태림의 사랑, 긴 인생을 살아낸 이들의 사랑이다. 판교는 태림의 리벤지포르노를 보고 투신할 만큼 충격을 받지만, 목숨을 구한 판교가 태림을 다시 만나는 것은 태림이 피해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태림 역시 마찬가지다. 태림은 리벤지포르노의 피해자로 물러서지 않고 가해자의 처벌을 요구하고 직접 실행한다. 판교와 태림의 주변사람들은 이러한 사건을 선정적으로 소비하지만 판교와 태림은 그러한 세상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다. 이것은 그저 노년의 혜안과 같은 무한한 이해인 것은 아니다. 도리어 살을 섞는 흥분과 욕망을 제거하거나 감춰두지 않는, 사랑과 삶에 대한 성실성 같은 것이 아닐 수 없다. 노년은 삶을 마무리하는 시간이 아니다. 삶은, 그 마지막까지 스스로가 살아내는 시간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마지막 동반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마저도 삶의 선택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을 열어내는 데에는 무엇보다 태림의 역할이 크다. 유산을 둘러싼 다툼, 혼외자, 동성애, 장애인 성문제, 성매매, 불치병, 살인, 동반자살 등등 범죄와 선정적 사건들이 태림을 가로막는다. 이 사건들의 선정성에는 우리 사회의 여성에 대한 폭력적 시선이 배면에 놓여 있다. 그러나 태림은 그러한 시선에 자신을 가두어두지 않는다. 이 연극의 뜨거움은, 세상의 폭력 앞에 움츠러들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지켜내는 태림의 당당함에서 그 열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태림으로 분한 이유정을 만났다.
“배우를 해서 내가 쌓은 자산은 아픈 사람, 약한 사람, 소외된 사람에 대한 공감 능력”
김소연: 오랜만에 무대에서 본 것 같다. 반가웠다. 여러 작품이 있었지만 그래도 <남자충동> ‘달래’가 오래 남아있다.
이유정: 아기였을 때다. (웃음) 지금은 연극보다는 음악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음악은 창작자로서는 나에게 오랜 소망이다. 나 스스로 길을 찾아가고 있는데 최근에 내가 하는 작업에 대한 이름을 만들었다. ‘탈장르 보컬’ 이다. 시간을 두고 공부하고 훈련하고 있다. 이제는 조금씩 공연을 하고 있다. 연극을 어릴 때 시작했는데, 그동안 활발하게 작업하지는 못했다. 강렬한 좀 진을 빼는 역할을 하다보니 연극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그러다보니 연극만 생각하면 너무 힘들고 힘이 빠진다. 연출들이 나한테 원하는 것이 그런 강한 역할들인 것 같다. 그런데 또 나도 왠만한 작품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계속 강한 역할을 맡는 것 같다.
김소연: <화로>의 태림도 엄청난 사건을 통과해가는 인물이다. 쉽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을텐데 어떻게 맡게 되었나.
이유정: 최원석 작가가 대본을 보낸다고 하는데, 보내지 말라고 했다. 다른 배우 알아보라고도 했다. 육십 대 노인들의 격정 멜로라고 설명하길래 내가 막 웃었다. 웃으니까 코미디 아니라고 진지한 멜로이고 비극이다고 하더라. 그러니 나는 자격미달이다 그랬다. 그런데 나한테 보내야 된다고 집요하게 그러더라. 그래서 저렇게까지 하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겠지 했다. 사실 그때 음악을 준비하고 있어서 흔들릴까봐 보내지 말라고 했다. 받아놓고도 한동안 열어보지도 않았다. 결국 대본 받고 일주일만에 읽어봤는데, 작품을 보면 안 할 수가 없다. 나는 함께 사는 세상이고 그래서 서로 공감하고 교감하고 나눴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다. 아픈 사람, 약한 사람, 남들이 잘 쳐다보지 않는 소외된 공간, 이런 거에 대한 관심이 많다. 처음 이야기를 듣고 웃었다고 했는데, 읽고 나니 우리가 삶에서 부딪히는 늘 고민하게 되고 고통을 겪게 되는 여러 사회적 문제들을 함축하고 있었다. 둘이 너무 아프다. 태림이 겪고 있는 일들을 생각하면 너무 속상하다. 이런 이지매가 없다. 읽고 나니까 가슴이 먹먹하고 무거워졌다. 최원석 작가와는 <변태> 이후에 오랜만에 만나는 거다. <변태>도 그렇고 최원석 작가는 불편한 진실, 불편해서 외면하는 진실을 끄집어낸다. 누군가는 해야되는 거다. 그래야 그 산을 넘어갈 수 있다. <변태> 때도 대본을 보냈는데, 보지 말았어야 하는데 보니까 해야되는 거다. 그 작품을 올리면서 극단 인어가 창단되었다. 그게 십년 전이다. <화로>는 극단 인어 창단 십 주년 작품이다.
김소연: 극단 인어의 주요 작품에 계속 참여하고 있다. (웃음) <화로>의 태림도 엄청난 사건을 겪는다. 그걸 무대 위에서 살아내야 한다.
이유정: 내 삶도 힘든데, 연극은 조금 재밌는 거 하고 싶은데 그런 생각도 있지만, 또 늘 이런 선택을 하게 된다. 비껴갈 수가 없다. 연출에게 많이 도와줘야 한다, 나 혼자 버티려면 힘들다고 했다. 연출이 나에게 요구한 가장 큰 거는 단단한 돌처럼 버텨내야 한다는 거다.
김소연: 이 작품은 창작산실 올해의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창작산실은 쇼케이스 과정을 거치는데, 그때보다 연령이 내려간 것 같다. 노년의 사랑이라고 했지만, 관객들은 중년의 사랑으로 보기도 했더라. 그런데 노년이냐 중년이냐 그런 세대적 특징보다, 고통 속에서도 혹은 고통에 맞서는 당당함이 먼저 다가오면서 쇼케이스와는 작품이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쇼케이스 심의과정에서 이 작품에 대한 여러 논의가 있었는데, 사실 결과만 발표되지만 어떤 결과든 만장일치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사건의 선정성, 태림이 놓여 있는 폭력적 상황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았다. 당시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질문했었는데, 최원석 작가가 그런 우려에 대해서 더 고민해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이 사건의 선정성을 그리는 작품은 아니다, 관객들을 만나서 비판받을 것이 있다면 비판받겠다, 그렇게 대답했었다.
이유정: 그렇다. 엄청 고통스러운 상황이다. 그런데 사실 배우 이유정도 세상을 살면서 늘 겪는 것이기도 하다. 꼭 똑같은 사건이 아니더라도 그렇다. 최근 연극계에서도 미투가 크게 벌어졌다. 많이 변화하고 있지만 폭력적 상황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할 수 없다. 세상 어디에나 늘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연극이 어떤 극단적 사건을 드러낸다고 하지만, 현실은 이보다 더하다. 내가 직접 겪었냐 아니냐일 뿐이다. 앞서 아픈 사람, 소외된 사람, 뭔가 힘없는 사람에 대해 관심이 많다고 했는데, 배우로서 재산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키워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겪지 않았음에도 작품을 하다보면 내 일처럼 느껴진다. 중요한 것은 폭력적 상황에 놓여 있는 인물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이다. 태림이 선정적 사건을 보여주기 위해 있는 인물이 아니다. 불편함이라면, 무대 위에 태림은 지워지고 선정적 사건만 남는 것일 거다. 하지만 태림은 그러한 폭력적 상황에서도 살아내는 인물이고 그녀의 살아냄을 보여주어야 한다.
김소연: 그렇다. 작품에서 폭력적 상황이 계속되는데, 사건의 폭력성을 드러내려면 태림이 폭력의 피해자에 놓여야 할 것 같은데 그러다보면 사건의 선정성이 더 강화되고, 그렇다고 태림이 겪고 있는 아픔이나 그런 것을 놓치면 사건의 선정성은 비껴갈 수 있겠지만 폭력성이 깊이 있게 다뤄지기 어려울 것 같다. 이유정 배우의 태림을 보면서 폭력성에 대한 반응과 그러나 피해자로 남지 않고 폭력을 맞받아치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수행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유정: 연습을 할 때 일단 나로부터 출발한다. 작의라든가, 구조라든가 그런 걸 따지고 분석하지 않고 그냥 태림의 상황에 나를 놓고 내가 느끼는 것을 그대로 쏟아놓는다. 함께 한 배우들은 다 알겠지만, 계속 울었다. 너무 마음이 아프다. 대본을 읽을 때마다 울었다. 그렇게 아픈 걸 다 쏟아내야 태림이 나에게 들어올 자리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내 안에 태림을 가두어두어서는 안 된다. 연극은 공동작업이다. 나는 연출을 믿는다. 연출이 보고 있다. 내가 느끼는 태림이 이렇다, 현재 내 솔직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출이 나를 만들어 줄 거라고 신뢰하기 때문에 내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는 거다. 그전에 같이 작업을 해봤고, 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 정이 많고 눈물 많고. 그래서 그때는 그냥 내가 가지고 있는 내 상태다.
김소연: 무대에서 보여준 태림과는 전혀 다르다.
이유정: 두 달의 연습과정이 있는데, 초반에는 많이 슬프고 많이 아프다. 그런데 작가는, 연출은 태림이 버티고 서 있으라고 한다. 어찌 보면 태림이 버티고 서기까지 그녀가 살아온 세월이 축적되어있을 거 아닌가. 자신을 향해 폭력이 행사되는데 버티고 서는 것이 하루 아침에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시간 상처 입고 넘어지고 깨지면서 그 세월을 통해서 그렇게 굳건해졌을 거다. 그렇게 태림이 살아낸 세월을 이유정은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에 경험하는 것이다.
김소연: 태림이 중년을 지나가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은, 판교와의 사랑의 빛깔보다 어찌보면 폭력적 상황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에 밀리지 않는, 폭력에 대한 태림의 태도와 연관하여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 같다.
이유정: 태림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예를 들면 사랑이 다시 찾아왔고 거부하기 힘든 어떤 에너지가 나한테 왔는데, 전 남자친구에 의해서 리벤지포르노가 터졌다. 내가 계획한 일이 아니지만 내 과거의 어떤 관계에 의해서 현재에 어떤 충격적 사건이 벌어진다. 사실 이런 사건들이 세상에 넘쳐난다. 나 개인으로는 여러 생각들이 들 수 있다. 잘 단도리 하고 헤어지지 그런 생각들. 하지만 태림은 그렇지 않다. 의외의 충격적 상황이 닥쳐왔고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런 생각에 빠져들지 않는다. 도리어 이 폭력적 상황에서 스스로가 자신을 지키는 거다. 아마도 태림은 그런 상황들을 무수히 겪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원망하거나,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님에도, 혹은 그 사건을 일으킨 타자를 원망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거다. 그것이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김소연: 태림이 살았던 세월을 두 달동안 쌓아가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 무슨 말인지 더 분명하게 다가온다.
이유정: 나는 작가나 연출을 믿는다. 그가 만들고자 하는 세계가 있는 것이다. 물론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것은 그의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작가와 연출도 그 과정에서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혀간다고 생각한다. 어떤 때는 내가 더 객관적으로 볼 때도 있다. 작가와 연출은 작품에 너무 깊이 들어가 있으니까. 이 작품에서는 크게 의견이 부딪치지는 않았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이렇게 슬프고 아픈데, 연출은 슬픔이나 아픔을 드러내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뭘 원하는지 알겠는데, 안 되는 거다. 단단한 돌처럼 버텨라. 그건 내 몫이다.
“폭력은 늘 반복된다, 그걸 어떻게 끝내야 할까”
김소연: 엄청 폭력적인 상황에 놓여있는데, 아파하지 말고 슬퍼하지 말라는 것, 버틴다는 것이 자칫 남성판타지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사철과의 관계에서 태림은 아마도 그를 만날 때는 진심이었을 것 같다. 헤어질 때에도 단호하지만 매몰찬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떤 점에서는 사철과의 관계가 어머니처럼 품어주는 것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이유정: 그럴 위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연출이 잘 잡아줬다. 내가 좀 헤매고 그러면 그런 지점에서는 이거는 이렇게 가야 해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했다. 사실 그렇게 직접적인 디렉션은 많이 없었다.
김소연: 또 사철에 대한 처벌을 스스로 직접 행한다. 한편으로 그것이 내가 준 사랑을 폭력으로 되갚은 데에 대한 응징으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 판교가 사철을 찾고 있다보니 마치 판교를 대신해 처벌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유정: 어떤 행동, 어떤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한 가지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을 한다. 태림에게 가장 핵심적인 것은 내가 끝내야되겠구나, 내 손으로 끝내줘야되겠구나, 사철은 이런 폭력을 계속 반복할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태림은 그동안 끊임없는 폭력에 노출되어왔다. 그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지켜왔다. 그런데 폭력이라는 게 바뀌지 않는거다. 늘 반복된다. 누군가 응징하지 않으면 반복될테니까. 그래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거다. 이 폭력이 어떻게 다시 반복될지 모르니까.
김소연: 폭력에 대한 처벌이라지만, 살인도 폭력이다. 왜 태림이 그러한 폭력을 감행해야 하는지, 그 처벌이 왜 태림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지 의문이 남았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모든 것을 내어주는 남성판타지적 인물과 태림을 갈라서게 하는 것 같다. 한 가지 질문이 더 남아있다. 판교와의 동반자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응징이라고 하지만 태림도 막다른 길에 들어서 있다. 사실 이 장면은 두 배우도 중요하지만 이미지 코러스 등 연출이 많이 드러나는데, 사랑의 완성이랄까 그런 낭만성이 강조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살인도 그렇고 동반자살도 그렇고 자기파괴적인 선택이랄 수 있는데, 태림이라면 동반자살과 같은 자기파괴적 선택을 사랑의 완성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유정: 하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다가왔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장면은 사실 논리적 분석으로 만들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떤 상황이 있고 거기에 뛰어드는 것에 가까웠다. 그것을 사랑의 완성을 위한 선택으로 볼 수도 있고, 그것이 판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의 선택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장면은 어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어떤 답을 가지고 그걸 그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다시 생각해도 그 순간의 태림을 어떤 이성적인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김소연: 어떤 점에서는 다 채워놓지 않기 때문에 인물과 사건에 대한 거리가 생기기도 하는 것 같다. 연출에서도 코러스나 밴드음악 등 양식성을 두드러지게 하는데 때로는 낭만성을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건과 인물에 거리를 두고 보게 하기도 한다.
이유정: 인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그런 것 같다. 인물에 푹 빠지는 과정이 필요하고 또 들어가 있기만 하면 안 되니까 다시 거리를 두고 볼 수도 있어야 한다. 아쉬움이 있는데, 극장에 들어가기 직전에 코로나에 감염되었다. 엄청 많이 아팠다. 체력적으로도 한계였다. 마지막 공연 때는 다섯 번정도 무대 위에서 쓰러질 뻔했다. 그래서 마지막 밀도를 만들어내는 데에 아쉬움이 남는다.
김소연: 마지막 공연을 봤는데 전혀 몰랐다.
이유정: 관객들이 알아차릴 정도면 사고인 거다. 같이 무대에 선 동료들은 알더라.
김소연: 지금까지 인물의 해석을 두고 이야기했지만, 태림이 단단히 버티고 서있는 것에는 이유정 배우의 아우라에서 비롯되는 것도 있다. 이유정 배우의 날카로움, 물러서지 않는 단단함도 태림의 단단함을 만들고 있다. 그것이 이 연극을 더 깊이 있게 하는 것 같다.
‘페르소나’ 캘리그래픽: 유진규
인터뷰 사진: 이자경
<화로> 공연사진: 창작산실
이유정
1991년 <서푼짜리 아르바이트>(대학로극장)에서 처음 무대에 섰다. 음악과 연극 모두를 공부하고 싶어서 현대극단에서 짧은 극단 생활을 했고 이후에는 따로 적을 두지 않고 활동해왔다. 현재는 ‘탈장르보컬’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공부하고 공연하고 있다.
주요작품
연극 <길 떠나는 가족> <오필리어> <남자충동> <바람의 정거장> <변태>,
뮤지컬 <넌센스> <아가씨와 건달들> <장보고, 열리는 바다>
음악 <새로운 아시아의 영혼을 찾아서> <이상의 봄>
극단 인어 <화로> 2021 창작산실 올해의신작 연극 공연일자: 2022.2.19.~2.27공연장소: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작 연출 최원석 | 조연출 남동현 표민지 | 안무 조하영 | 음악 이나영 | 무대 김충신 |조명 박준범 | 의상 김정향 | 분장 박정미 | 무대감독 최귀웅 | 기획 이정경 | 홍보 박현욱 | 사진 윤성광 이주필 | 영상 안상우 출연 | 장용철 이유정 최보희 윤국로 이규빈 이경민 차정호 지근우 이음 백효성 김요영 신대철 김애린 조안나 장희영 이나영 오정민 한규남 |
- 무료정기구독을 원하시는 분은 ohskon@naver.com으로 메일을 보내주세요.
- 리뷰 투고를 원하시는 분은 ohskon@naver.com으로 원고를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