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곤(극단 노을 예술감독)
서계동 국립극단 문제로 연극계가 시끄럽다. 서울역 뒤 현 서계동 터에 복합문화공간을 지어 일부를 국립극단이 사용하도록 한다는 계획에 대한 반발이다. 2010년 법인화라는 이름으로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밀려나던 때와 달리 연극계는 대부분 한목소리로 반대하고 있다. 물론 이후 구체적인 대안에 대해서는 여러 다른 생각들이 있겠지만 일단 현재 계획을 폐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논의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인 듯하다.
연극인들의 삶은 팍팍하다. 연극만 하면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투잡이니 쓰리잡이니 하는 얘기가 결코 낯설지 않다. 그러니 삶의 여유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선지 분명히 자신과 관계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연극계 문제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거나 잘못된 점을 찾아 지적하며 바로잡을 것을 요구하는 등과 같이 적극적인 행동을 하는 이는 별로 많지 않다.
과거 연극 또는 예술 관련 입법이나 정책 입안을 위해 뛰어다닐 때 국회의원이나 관료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조언이 “수치화된 경제적 효과를 제시하라”는 것과 “울어야 젖을 준다”는 것이었다. 헌법에도 명시하고 있는 예술 진흥의 필요성을 경제적 수치로 입증하라는 것도 어처구니없지만 울지 않으면 굶어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야만적인 태도 앞에서는 그만 절망감에 다 포기하고 싶어진다.
예술인복지법을 제정할 때 모든 국민이 복지 대상인데 왜 예술인만을 대상으로 복지법을 따로 만들어야 하느냐는 반론이 많았다. 그때 예술의 비효율성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며 도자기를 깨는 도공의 예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도자기를 100개 깨고 하나를 남기는 도공과 도자기를 1000개 깨고 하나를 남기는 도공을 비교할 때 당연히 전자가 후자보다 유능하다고 하겠지만, 예술적인 관점에서는 자신의 기준으로 단 한 치의 오차도, 티끌 하나만큼의 결함도 허용하지 않아 1000개를 깨버릴 수밖에 없는 후자가 훨씬 훌륭한 예술가일 가능성이 높은 법이다.
이 설명은 경제성을 좋아하는 관료들에게도 적절하다. 1000개를 깨고 남긴 도자기 한 점의 가격이 100개를 깨고 남긴 한 점보다 10배 비싸면 경제성이 같다고 할 텐데 실제로는 100배 1000배 10000배가 될 수도 있다고 하면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래서 자코메티의 가느다란 철사 모양 조각품 하나의 가격이 우리 돈으로 1000억을 넘어가지 않느냐는 말을 덧붙이면 그때야 어렵게 고개를 끄덕인다.
예술에는 일반적인 경제 논리가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초고도의, 아니, 초초초고도의 집중력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거의 무한정으로 투입하며 작업을 하고도 자기 기준에 못 미친다 싶으면 그 순간 가차 없이 깨버려야 한다. 그 세계에 빠져보지 않은 이들은 왜 그렇게 어리석은 일을 하느냐며 비웃는다. 자식이나 형제들에게 그렇게 엄청나게 고생하고도 자코메티처럼 될 확률은 너무도 낮으니 그런 위험한 일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말린다. 사실 자코메티조차도 살아서 자기 작품이 1000억 원에 팔리는 희열을 맛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결국 예술가로 하여금 작업을 하도록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의 힘이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예술의 힘이다. 그러니까 예술에 미쳐서 예술을 하는 것이다. 예술에 미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겠는가? 그렇게 하는 예술에서 밥이 나오고 쌀이 나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 1000개의 도자기를 깨는 동안은 쫄쫄 굶어야 한다. 더욱이 그렇게 고생해서 남긴 1개도 바로 밥과 쌀로 연결된다는 보장이 없다. 가끔 죽은 뒤 명예를 안겨다 주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처절하게 고통스러웠던 삶을 온전히 보상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도 굶어 죽을 수는 없다. 많은 연극인들이 투잡 쓰리잡에 나서야 하는 이유이다. 예술답게 예술을 하려면 미쳐야 한다. 그렇게 온통 정신을 예술에 쏟아야 하는데 물리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한다. 당연히 예술 작업에 쓸 에너지가 딸리게 될 수밖에 없고 그러니 마음의 여유마저 없어질 것은 당연하다. 그런 사람들한테 연극계 문제를 찾아 지적하지 않는다고 질책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 자신의 문제에 무관심하냐고 비난하는 것도 타당치 않다.
결국 연극인들은 울지 않는 아이가 되어 버린다. 아니, 어쩌면 울 힘도 없는 아이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물리적 생명을 유지하느라 쫓기는 연극인들과 그들로 이루어진 연극계는 어떤 일이 생겨도 조용할 뿐이다. 가끔, 정말 가끔 시끄럽다가도 금방 잦아들고 만다. 그렇게 울지 않으니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연극과 연극인들은 죽든 말든 내버려둬도 상관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연극과 연극인들이 다루기 쉬운 만만한 존재라는 것은 이번 서계동 국립극단 사태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2010년 법인화 이후 국립극단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을 가진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블랙리스트 사태로 잠시 국립극단이 부각되었지만 그 중심은 국립극단이 아니라 블랙리스트였고, 관심의 초점은 예술위와 문화부, 국정원과 청와대 등이었다.
10여 년 전 법인화 반대의 목소리를 쉽게 잠재웠던 문화부는 더욱 능숙하게 계획을 세우고 밀어붙였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와 협의도 하고 자문도 구했겠지만 어차피 그건 모두 답이 이미 정해진 상태에서 벌이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그렇게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리면 이후 반대해 봤자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잠시 시끄럽다 조용해질 것이다. 큰 방향은 유지한 채 미세한 조정으로 생색을 내면 그에 찬동하는 세력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앞서 요식행위에 참여했던 이들을 포함하여 연극계에서 목청깨나 높이는 이들이 중재자를 자임하면서 기꺼이 나서줄 테니까 말이다.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전문가 자문을 거친다.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관련 분야의 전문가 자문을 받았다고 하면 훨씬 책임이 덜해진다. 그런데 누구로부터 자문을 받을지 정하는 것은 철저히 공무원들의 몫이다. 그러니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편한 자문을 받을 수 있다. 편한 자문이란 원래 정해진 커다란 방향을 인정하고 정당화해 주는 자문을 뜻한다. 물론 아주 작은 부분을 큰 목소리로 지적하면 기꺼이 수용하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한다. 그것으로 관련 분야의 의견을 존중했다는 유연한 모양까지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 맞추기가 실질적인 내용까지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즉 어떤 정책의 성공 여부는 현실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에 따라 결정될 텐데 방향을 미리 정해 놓은 편하고 안이한 자문으로는 결코 그렇게 생산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물론 현란한 수치 장난으로 마치 긍정적인 듯 결과를 조작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더욱 심각하게 현실을 왜곡·악화시키는 전형적인 배임 행위일 뿐이다.
정책은 낱낱이 공개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알면 시끄러워진다면서,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면서 비밀리에 진행하다가 거의 막바지에 발표하고 밀어붙이는 것이야말로 정책 실패의 가장 흔한 과정이다. 자문도 편해서는 안 된다. 자문은 최대한 까다로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치 손님처럼 와서 눈치껏 손을 들어주는 말랑말랑한 자문위원이 아니라 불편한 말도 거침없이 뱉어내는 부담스러운 자문위원을 선택해야 하고, 또 그들에게 내밀하고 자세한 정보를 가능한 한 많이 제공해야 한다. 아무리 유능한 전문가라도 듬성듬성 부실한 정보만 담긴 서류 몇 장을 잠시 들여다보고 정확한 문제를 찾아 지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정책을 펼치기가 너무 어렵다고, 아니, 불가능하다고 불평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면 어쩌겠는가? 아무리 어렵고 복잡해도 그 길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생물과 같은 연극 현장을, 나아가 예술 현장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번 서계동 국립극장 사태는 대단히 잘못된 일이 틀림없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정책을 만들고 실행하는 정부 부처 공무원들의 깊은 각성을 촉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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