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도 이런 걸 다 생각하고, 그걸 하진 않지만

윤서현

2017년 서울시립십대여성건강센터의 지원으로 개발된 <우리는 적당히 가까워>는 이후 몇 차례 낭독극 공연을 거쳐 2019년 성미산마을극장에서 본 공연이 올려졌다. 이 작품은 대중매체를 통해 만들어진 왜곡된 성 관념의 영향 하에 있는 아이들이 또래에게 성적 이끌림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품게 되는 질문들을 일상적 대화를 통해 유쾌하고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지배와 학대의 수단, 조롱과 죄책감의 원인으로 이해되고 있는 성 관념을 인간의 탄생과 죽음 사이를 잇는 일상의 성 관념으로 회복시키려 한다.

ⓒ 신촌문화발전소

교육연극의 목적을 공유하고 있는 이 작품은 안전한 성생활을 위한 콘돔 사용법은 물론 질외사정의 임신가능성, 또는 성병이나 임신중지가 야기할 수 있는 상황들, 십대여성건강센터의 존재 등 청소년이 알아야 할 기본적인 주요정보를 자연스러운 전개 속에서 적절한 순간 무겁지 않게 제공한다.

재미있는 지점은 이 작품이, 첫사랑의 감정과 몸의 이끌림에 혼란스러워하는 십대들의 모습을 조명하는 한편, 이 아이들의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주지 못하는 어른들의 모습 또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비판의 대상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병세가 깊어진 명의 할아버지 천수까지도 사랑이라는 것을 ‘마침표로 끝나는 정의’가 아니라 ‘물음표로 끝나는 질문’으로 표현하고 있듯(“또 뭐, 보고 싶고. 그러면 그게 사랑하는 게 아니겠냐?”) 작품은 이 문제가 누구에게나 영원히 풀리지 않는 문제라고 말한다. 어른들이 답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청소년들 또한 교도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이 작품의 전제이다. 어른들은 그저 자신들도 답을 찾지 못한 매일의 질문을 청소년들과 공유할 뿐인 것이다. 상담 선생님 선아는 청소년이 성관계를 맺기 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10개의 질문이 담긴 리스트를 메밀차와 함께 처음에는 노을이에게, 다음번에는 명이에게 건넨다. 처음 노을이를 상담했을 때에는 일단은 입시가 제일 중요하다는 둥 하나마나한 ‘꼰대’ 같은 대답만 늘어놓았던 선아가 두 번째 명이와 함께한 상담에서는 조금 더 진솔해진다. “어른들은 이런 걸 다 생각하고, 그걸 해요?”라는 명이의 질문에 선아는 “… 잘 안 그래요”라고 대답하는데 그 대답이 명이에게는 성과 사랑에 대한 그 어떠한 명확한 대답보다도 더 큰 위안이 된다. 어른들도 우리와 똑같은 고민에 빠져 허우적대며 사는 구나. 작가가 작품 속 간간히 심어놓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세대와는 무관한, 인간 모두의 존재론적 동질감을 상기시킨다.

ⓒ 신촌문화발전소

이번 2022년 신촌문화발전소에서의 공연은 관객참여형 낭독극 형식이었다. 무대에는 나무 의자들은 물론 천정에서부터 늘어뜨려 설치된 긴 그네들과 연두색 거대 짐볼들이 곳곳에 설치되었다. 관객들에게 대본집이 주어졌고, 연출의 진행멘트가 스태프의 빠른 타이프로 무대 뒷벽에 즉각 활자로 영사되어 청각장애인들의 접근성까지 높였다. 관객들은 연출의 역할분배에 따라 배우와 짝을 지어 희곡의 장면들을 읽게 되는데 그네나 짐볼 위에 앉게 되어서인지 예상 외로 유연한 목소리 연기를 보여주는 관객들이 있었다. 관객들과 대사를 맞추는 배우들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낭독극에 처음 참여하는 이들의 심리적 장벽을 낮추어주었다.

이래은 연출은 이오진 작가의 원작 희곡이 지닌 정보적 측면을 더욱 강화시켰다. 장면과 장면 사이, 관객들은 연출의 진행에 따라 무대 바닥에 놓여있거나 벽에 꽂혀있는 종이를 펼쳐 그 위에 쓰인 정보들을 함께 읽어간다. 여기에는 디지털 성범죄 사건일지, 임신중지 합법화를 위한 투쟁의 결과들, 성담론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도서나 영화 목록 등이 적혀 있어 최근 몇 년간의 시간 동안 무엇이 변했는지 곱씹어 보게 한다. 기대만큼 크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저 작은 변화인 것도 아니다. 공연의 막바지에는 성담론에 대한 자신의 감각이 최근 몇 년 간 어떻게 변했는지 스스로 타진해보고 이를 공유하는 시간도 마련되어 있다.


ⓒ 신촌문화발전소

이번 공연은 <우리는 적당히 가까워>가 성미산마을극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무대화되었는지에 대한 창작 경험을 공유하는 시간이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작가나 연출이 작품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공연 중 이오진 작가가 2022년의 감각으로 써내려간 새로운 한 페이지가 대본집에 추가된다. 여학우들의 사진을 마음대로 공유하고 자위도구로 쓰는 것에 죄책감이 없는 경진과 주먹다짐을 하게 된 명이 상대의 마음이 “아프건 창피하건 괴롭건” 관심 없는 것 자체가 폭력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포함되었다. 이래은 연출 또한 등장인물인 명과 노을이 각자 서로를 생각하며 자위하는 장면을 은유적으로 연출하기까지 어떤 고민의 과정이 있었는지를 관객에게 이야기해준다. 이 과정에서 미투 운동 이후 2020년 제정된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KTS)을 인용하고 성적 묘사가 포함된 장면을 표현함에 있어서 창작인들 사이에서 어떠한 논의들이 있었는지 짧게 언급된다.

신촌문화발전소에서의 <우리는 적당히 가까워> 공연은 희곡 텍스트를 중심으로 창작과정 공유, 관객 수행성의 증대, 배리어프리의 확대, 청소년 교육연극으로서의 효용 등 다층적 목표를 견지하고 진행된, 최근 몇 년 간 창작자들의 고민을 관객들과 함께 나누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고민을 공유하는 것이 최고의 위안이라는 깨달음을 준 메밀차향 가득한 선아의 상담실처럼 말이다.

ⓒ 신촌문화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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