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무(공연과이론을위한모임 회원)
이 원고는 <한국예술연구>(journal.kreca.or.kr) 37호(2022)에 게재된 ‘올바름은 反미학인가?’라는 서평의 후속 글이다. 서평 대상 저서는 <미학적 연극에서 올바름의 연극으로>(김방옥, 서울: 연극과인간, 2022)인데, 이 책에는 최근 연극창작의 흐름에 있어서 매우 흥미롭고 진취적인 논제와 주장을 담고 있다. 건전한 비판이 허용되는 건강한 비평문화가 복원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희원으로 서평을 썼다.
PC극의 소재주의
책의 저자에 따르면, “진정성이 있는 연극, 의미있는 이슈와 메시지를 품고 있는 연극이 더 감동을 주는 시대”(17), “정치적 무책임을 벗어나 의미와 가치를 다시 살려내고 추구하는 시기”(23; 괄호 속 숫자는 해당 저서의 쪽수를 의미합니다)가 도래했습니다. 이전 시기를 “정치적 무책임”에 허우적거린 시대라고 밑줄 긋는 그 이분법에 대해선 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메시지와 의미를 중시하는 이 경향은 선택된 소재가 작품의 주제와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못하거나 형식의 필연성과 조우하지 못하고 구호로 고립되고 마는 위험이 있습니다. 이른바 소재주의입니다. PC적 소재가 미학체계 내부로 자연스레 습윤되지 못하고, 무리한 끼워넣기에 의해 이질적이고 탈맥락화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의제들이 그 연극의 진정성이나 연극적 감흥을 담보해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빈약한 연극성에 대한 변명이 되면서 상투성에 머무를 수도 있다.”(19) 정확한 지적입니다.
소재주의는 주제적 다양성을 제한합니다. PC의 제한된 주제 범위는 다양성과 삶의 총체성을 포괄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PC극은 좋은 연극이지만, PC극이 지배적인 생태계는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소재의 협소화와 유사 주제의 반복은 결국 매너리즘과 자기복제를 피할 수 없고, 기시감의 피로에 지쳐버릴 겁니다. 예술이 윤리에 강금 당하는 반미학적 사태가 예견됩니다. 의미와 메시지를 중시하는 편협한 소재주의는 정치성이 결핍된 연극을 유치하고 나태한 것으로 질책하고 유희와 쾌락을 죄악시하는 엄숙주의와 한패입니다. PC적 경건함과 진지함에 대한 몰두는 연극 본래의 익살이나 웃음을 경박한 것으로 간주하고, 동시대성이 ‘결핍된’ 순수한 지적 탐구나 예술적 탐미를 죄악시할 수도 있습니다. 로맨틱 코미디나 장르물에 저속한 상업극이라는 낙인을 찍어온 대학로의 정서를 고려하면 결코 기우만은 아닐 겁니다.
미학의 수난
그가 후순위로 밀어낸 ‘미학’이라는 개념은 갈피를 잡기 힘들 정도로 중의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미학적 언어는 당분간, 혹은 결국, 정치적 언어가 되기를 요구하는지도 모른다.”(262)란 문장에서 미학은 윤리와 대결하는 순수한 미적 지향성을 뜻합니다. 물론, “당분간”은 가능하지만 “결국”은 맞지 않습니다. 미학이 정치를 말할 수 있지만, 정치가 미학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무대는 연단이 아니고, 극행위는 선동이 아니며, 대사는 구호가 아닙니다. 그러다가도 “연극이 사회운동 그 자체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연극평론은 사회비평이 아니다. 평론가에게 역시 중요한 것은 연극미학이다.”(192-193) 같이 책의 논지와 대척에 서는 엇갈리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이때 미학은 예술의 정체성을 담보하는 중핵적 가치가 됩니다.
미학은 정반대로 유미주의적 퇴폐성을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미학지향적이었던 자신의 과거를 부정할 때 주로 사용되는데, 사회성이나 공동체 의식 없는 예술지상주의적 경향을 일컫는 듯합니다. 그는 “1980년대부터 2000년대 말까지는 어떤 내용이나 스타일이건 그 나름의 연극미학적 완성도를 우선적으로 중시”(166)했고, 자신은 “민중, 민족, 반서양, 반독재, 이런 구호를 내세우는 <…> 정치저항 일색의 풍토가 싫어 그것을 비판하는 제도권 평론가”(222)였다고 고백합니다. 그후 세월호 참사와 블랙리스트 사건, 미투 운동을 거치면서 PC극으로 ‘전향’했고, 과거 자신이 탐닉했던 미학주의를 반성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1980년대를 소환하는 방식인데, 40년 연극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던 그때가 지금 그의 연극관과 가장 유사한 시대라는 겁니다. 그는 “1970년대 연극은 미학의 시대”, “1980년대는 이데올로기의 시기”(312)이고, 1990년대~2000년대 “연극과 비평계는 주로 연극성 자체의 미학적 유희에 도취되고 연극세계 내의 주고받기 놀이에 탐닉하는 경향이 있었다.”(78)고 설명합니다. 특히 2000년대 초를 “황홀한 (해외)공연들을 보며 복간된 <연극평론>지에 아름다운 리뷰를 쓰던 시절”(8)로 회상합니다. 그는 “1980년대 말, 마당극이 끝나갈 무렵, 민족극이라는 명칭의 연극들을 너무 많이 보면서 힘들었”(423)는데, 단순한 선악이분법, 이념성에 경도된 천편일률적 내용이라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2019년) 그는 “너무 강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을 것 같은 극들을 관극순위에서 밀어놓곤 했”(423)습니다. 진정성과 정치성을 중시하는 시대가 “다시” 도래했다는 표현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가 PC극을 통해 복권한 시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가장 힘들었던 1980년대입니다. “강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1980년대가 2010년대에 부활한 겁니다.
자, 정리해보겠습니다. 1980년대 “정치저항 일색의 풍토가 싫어 그것을 비판하는 제도권 평론가”의 미학은 그릇된 미학입니다. 정치적 이슈나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미학은 불가능합니다. 연극은 출생과 형식 자체가 이미 사회적이고 정치적입니다. 고전을 원본 그대로 재현한다고 사회성이나 동시대성 없는 공연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미학적이라면 정치적입니다. 성공한 미학은 고도의 정치적 효과를 발산하며 동시대적 가치를 토출합니다. 텍스트는 낡아도 미학은 동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성을 거부했던 그의 1980년대 미학은 옹졸하고 뒤틀린 것이었습니다. 이분법에 빠진 미학인 겁니다.
이제 그는 정반대 편에서 “의미있는 이슈와 메시지”를 옹호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햄릿>을 (현대적 해석 없이) 텍스트 미학적으로 충실하게 재현한다고 동시대성이 없는 공연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미학적이라면 정치적입니다. 어설픈 연기와 어눌한 연출력, 서툰 표현미학은 “의미있는 이슈와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정치성을 상실합니다. 정치성을 앞세운 그의 현재 입장은 역시나 이분법에 빠져있습니다.
이분법을 축으로 180도 위치전환한 그의 변신은 과정도 ‘드라마틱’ 합니다. 세월호 참사와 미투 운동이 격렬한 전환점이었습니다. 블랙리스트 사태와 촛불시위로 이어진 그 격랑에 멀쩡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미학적 취향을 폐기하고 고통스러웠던 1980년대의 정치적 파토스에 투신하는 그의 개심은 과도하게 격렬합니다. 마치 자기부정의 쾌감에 도취된 듯합니다. 자신의 과오와 실책을 모조리 부정했을 때 삶이 정화되고 갱신되는 짜릿함이 있습니다. 그 쾌감을 정당화하는 것이 바로 죄책감입니다. 그는 “요즘 청년여성연극인들의 사투를 보며 늘 일종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124)합니다. PC에 무지했던 과거를 반성하면서 절필까지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 개인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자신에게 전가하는 것은 부조리합니다. 반성은 아름답지만, 자기비하는 안 될 일입니다.
죄책감은 행위교정을 위한 동기로 작용할 때만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그걸 넘어서면 (부정적 의미의) 톨스토이즘이 됩니다. 자기부정을 통한 갱생을 강조하고, 세계를 동화적으로 단순화하여 흑백논리에 빠지며, 사명감을 앞세워 메시아주의에 경도되는 겁니다. 물론 괜한 생각입니다. 오히려 그는 180도 위치전환 후 불안정한 착지로 인한 현기증에 시달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 젊은 연극계가 혹시 거대한 리허설, 자기만족적인 자기성찰의 공동체, 정치적 올바름의 실험실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 교조적 이론을 앞세우며 자기도취나 자기합리화에 빠졌던 1980~90년대의 마당극이나 민족극이 이데올로기 붕괴 이후 급속히 퇴조했던 사실을 되새겨볼 필요도 있겠다.”(301)는 발언에서는 애정 어린 충고나 사려 깊은 중립성이 아니라, 설핏 드러나고만 불안감과 회의의 여운이 느껴집니다.
조급증은 멀리 가지 못한다
저자는 “진보적 청년연극인”의 활동에 있어서 진정성이란 표현을 수시로 반복합니다. 다양한 진정성의 개념 중 어떤 성격의 것을 말하는지 명확하진 않지만, 창작의 절박함, 진지함, 성실함 등의 의미를 지닌 듯합니다. 세상을 향한 분노를 “밖으로, 몸으로 고함으로 외쳐봤자 소용없다는 조용한 절망감”(330) 같은 것이 “날것의 다큐멘트들”을 직설적으로 호출하여 실재성을 표출하게 된다는 겁니다. PC극의 미학적 결함이 되레 윤리를 도드라지게 하고, 실재극의 드라마 거부가 허구의 공허함을 폭로한다는 겁니다. 미학을 따질 경황도, 드라마를 구축할 여유도 없다면, 제가 보기에 조급증입니다.
폭우가 쏟아진 지난 2022년 8월 9일 새벽, 신림동 반지하(banjiha)에 살던 발달장애인 ㄱ(47)씨와 동생 ㄴ(46)씨, 그리고 ㄴ씨의 딸(13)이 익사했습니다. 땅을 치고 통곡할 일입니다. 영화 <기생충>이 떠올랐습니다. 사회적 불평등과 부자의 계급적 위선을 ‘명징하게’ 표현한 명작입니다. 2020년 전 세계 영화상을 휩쓸었고, 한국에서는 천만 명 이상이 봤습니다. 모두가 그 영화를 극찬하고 그 주제에 깊이 동조해도 세상은 대번에 바뀌지 않습니다.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고 <기생충>의 성취가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혁명”은 ‘완성’이 아니라, 완성에 대한 끝없는 모방입니다.
연극이 2,500년 동안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가나 선동가가 하듯이 금방 타올랐다 꺼지는 성급한 외침이나 사색이 누락된 손쉬운 대안에 발을 담근 덕이 아니라, 상황을 정교하게 재구성하고 짜임새와 수사학을 덧입혀 그 자체로 음미의 가치가 있도록 미학화한 덕입니다. 성마른 호통과 화끈한 고함은 당장은 속이 시원하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만, 사태를 해결하는 진득한 끈기와 변화하는 현실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단은 부족합니다.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면 우체국에 가서 전보를 쳐라.”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의 말입니다. 응급한 메시지가 있는데 한가하게 영화나 찍고 있다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그걸 못 견디는 조급한 사람은 예술 대신 전보를 쳐서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메시지가 급할수록, 그 의미가 중할수록,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어야 합니다. 예술은 대증요법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오래 가고 멀리 가고 보편적이며 고차원적인 연극입니다.
전망부재와 이율배반
PC극의 가장 큰 목표는 정치적 논제에 관한 올바른 인식 확장과 그 입법화일 겁니다. 저자의 평론활동도 그런 정치적 의도에 부합합니다. 글쓰기를 통해 최종적으로 부당한 제도나 현상을 바로 잡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런 장기구상을 전망(perspective)이라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 연극계가 앓고 있는 크나큰 불공정 중 하나는 연극인의 (경제적) 삶입니다. 연극활동을 통해 정당한 수입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한 연출가는 “한국의 연극평론가들은 현재 한국의 연극현실이 어떠한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거나, 연극을 만드는 존재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 공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197)을 표했습니다. 저자는 이 주장이 “과장된 이분법”(197)이라고 규정하며 우리 편도 충분히 고통스럽다고 항변합니다. “많은 젊은 비평가들 역시 이 사회의, 연극계의 나쁜 경제 생태계로부터 안전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197)는 겁니다. 옹색한 변명입니다. 고통스러운 삶을 놓고 불행경쟁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 참담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불철주야 고민해야 할 판에 ‘우리 편에도 힘든 사람(아마도 강사 평론가를 말하는 듯합니다)있다’고 되받아친 형국입니다. 그 “과장된 이분법” 외부에 있는 저자가 창작자들의 처참한 삶을 개선해달라고 호소하는 연출가에게 비슷한 처지의 평론가도 있다고 대꾸하는 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망이 없을 때 그런 발언이 가능합니다. 그는 “더 나은 연극과, 연극현실과, 삶”(385)에 대한 기대와 염원을 가졌지만, ‘어떻게’가 없습니다. 그는 “한국연극계의 자생력의 부족이라는 뼈아픈 현실”을 안타까워합니다. “받는 지원금만큼만 열심히 한다는 말”에 한숨 쉬고, “지원금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그에 길들여져”(220) 온 현실을 한탄합니다. 그런데 그 개선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습니다. 그의 PC극에 대한 눈부신 전망이 왜 연극인의 삶에 대한 전망으로 연계되지 않는지 의아합니다. 연극인의 더 나은 삶 없이 “더 나은 연극”이 나올 수 없습니다. 더 나은 제작물을 위해서는 더 나은 제작환경이 필요합니다. 연극인들에게 삶을 갈아넣는 “진정성”으로 PC를 옹호하라고 요청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입니다.
저자는 “결과지상주의에서 벗어나 과정을 존중할 때 보다 공정하고 민주적인 창작 분위기도 가능”(295)하다고 말했습니다. 과정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저임금, 단기노동의 열악한 제작환경입니다. 처참한 제작환경을 놔두고 버젓한 제작물을 기대하는 것은 염치없습니다.
패배주의는 없다
저자는 40년간 연극비평을 했고, 수십 년간 연극을 가르쳤고,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회장, 한국연극학회 회장 등 평론계 그랜드슬램을 거친 원로입니다. 큰 영향력을 가진 그에게 기대하는 것은 높은 식견, 정확한 심미안, 공정한 판단력, 상징적 대표성입니다. “더 나은 연극과, 연극현실과, 삶”에 대한 희원이 “가까운 미래 안에 실현될 것 같지 않다”(163)는 근시안적 패배주의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뼈가 부스러지게 연극을 해도 생존 자체가 위태로운 이 생업의 저주, 공연을 하면 할수록 적자가 쌓이는 이 소극장 체제의 저주, 지원금 없이는 공연 올리기도 버거운 이 예산부족의 저주 앞에서 “연극만을 찬미하며 무사태평한 시간을 보냈던 시대”(6)에 대한 죄책감은 왜 생성되지 않는지 의문입니다. 심지어 “열악한 창작환경 자체가 곧 이들의 연극의 미학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183)는 진단은 연극인의 고난을 미화한다는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저자 같은 뜻 바른 원로에게 기대하는 것은 전일 매진 공연도 지원금이 없으면 재공연을 기약하기 힘든 이 부조리한 환경, 관객이 줄을 섰는데도 극장문을 열 수 없는 이 반자본주의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제도개선과 그 논리개발에 힘써달라는 겁니다. 연극인이 바라는 것은 큰 거 없습니다. 좋은 공연이 합당한 성과를 누리고, 연극인의 노동이 공정한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평론의 위기를 절감하면서도 그 대안 제시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그날그날을 보내고 있”(174)지 말기를 간원합니다.
홀로서는 비평
서평이 저서를 넘어서긴 힘듭니다. 서평은 부언이나 사족이 되기에 십상입니다. 비평도 공연을 넘어서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역전현상이 발생할 때가 있습니다. 비평이 독립적 자율성을 토대로 고도의 첨예함을 갖추었을 때입니다. 분파주의나 온정주의와 완전히 절연한 채, 오직 비평정신만으로 홀로서서 현상에 대한 정교한 분석력, 기발한 통찰력, 날카로운 비판을 발휘할 때를 말합니다. 이 책이 바로 그러합니다. 여기에는 시대와 세대에 대한 투명한 ‘입장’이 있고, 변화와 혁신에 대한 애절한 갈증이 있고, 드러내고 꼬집기를 주저하지 않는 용기가 있습니다. 이 서평이 그 독보적 매력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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