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주하영(공연 비평가)
국립극장 NTOK Live+ <시련(The Crucible)>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 마을에서 발생한 마녀사냥을 다룬 미국 극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연극 <시련>은 ‘집단 광기’의 속성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1953년에 초연된 <시련>은 당시 미국을 휩쓸었던 매카시즘 열풍과 맞물려 “우리 시대를 반영하는 우화”1로 여겨지며, 공포와 탐욕, 질투와 보복, 이기심과 좌절, 배신과 고발로 가득한 사회의 민낯을 폭로한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밀러가 세일럼의 마녀사냥을 소재로 삼은 것은 자신이 고발되었던 반미활동위원회의 청문회와 매카시 상원의원으로 인한 공산주의자 색출작업의 광기와도 관련이 있지만, 세일럼에서 발생한 일이 그 자체로 “이해관계의 충돌로 인해 관용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등지는 가장 보편적인 인간 경험”을 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국립극장은 스크린으로 세계의 화제작을 만나볼 수 있는 레퍼토리인 ‘엔톡 라이브 플러스(NTOK Live+)’의 일환으로 2022년 9월부터 11월까지 영국 국립극장의 올리비에 씨어터에서 공연된 <시련>을 한국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2016년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NT 라이브 <햄릿>의 연출로 이미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 린지 터너(Lyndsey Turner)의 최신작이었다. 초연 당시 대부분의 평론가들로부터 원작을 매우 충실하게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은 터너의 <시련>은 현재의 분열된 정치상황이나 포퓰리즘(populism), 소셜 포비아와 같은 주제로 보다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가디언》의 평론가 아리파 아크바는 터너의 “안전한 선택”이 현재가 아닌 과거를 말하는 “시대극”의 느낌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아서 밀러의 알레고리에 현대적 울림을 줄 기회를 놓치고 있음”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2 하지만 에스 데블린(Es Devlin)의 무대 미학의 놀라움에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보였다. 실제로 터너 연출의 연극 <시련>의 메시지를 가장 인상적으로 전달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은 장대비가 쏟아지는 무대 디자인과 아카펠라로 전달되며 증폭되는 합창의 음향이다.
극장으로 들어서는 관객들이 마주하게 되는 수직으로 끝없이 쏟아지는 ‘비’는 프로시니엄 아치를 중심으로 객석과 무대를 나누는 ‘경계’가 된다. 흥미로운 점은 비가 무대 안쪽으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객석과 무대를 가르는 투명한 장벽으로 기능하며, 극장 천장에서부터 아래로 끊임없이 쏟아져 내린다는 점이다. 데블린에 따르면, 비의 장막은 관객들이 극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사건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며, 바깥세상과는 다른 공기를 느끼고, “다른 시대, 다른 세상, 즉 작가의 허구적이고 역사적인 세상으로 가는 포털”로 작용할 수 있게 된다. 3 1분에 240리터가 쏟아져 내리는 비는 4,500리터의 물이 담긴 탱크를 통해 지속적으로 순환이 되고 재활용된다. 극이 시작되기 전과 막과 막 사이, 인터미션 동안 쏟아지는 비는 세일럼 사람들의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욕망과 불안, 좌절과 공포, 질투와 탐욕, 복수심과 분노의 흐름을 대변하는 듯 보인다. 한 번 내리기 시작한 비를 마음대로 멈출 수 없듯, 마을을 휘감은 광풍은 19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교수대에 매달고, 고발된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갇히는 바람에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가축들과 부모를 잃은 고아들로 마을이 엉망이 된 후에야 겨우 멈춘다.
끝도 없이 반복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권력의 역학관계, 자기 정당화와 기만, 죄의식과 양심, 책임과 회피의 문제는 <시련>의 인물들을 멈출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밀어 넣는다. 터너의 <시련>은 밀러의 대본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1막 앞쪽에 3페이지에 걸쳐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세일럼 마녀사냥의 배경에 대한 부분을 아주 짧게 축약한다. 그녀는 마녀재판의 핵심적인 증언자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소녀들의 입을 통해 밀러의 설명 부분을 관객들에게 직접 전달하도록 설정한다. 또, 애비가 자신의 주술 행위와 간음의 죄를 덮기 위해 무고한 다른 사람들을 고발하기 시작하고, 모든 연극적 행위들을 주도하며 판사들을 속였던 상황에 설명을 더하기 위해 극이 시작되는 부분에 새로운 장면을 첨가한다.
예배장면으로 시작하는 무대는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동안 애비가 메리와 잡담을 나누는 것을 포착한 패리스 목사가 그녀의 뺨을 세게 때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장면의 첨가는 애비가 세일럼이라는 사회 속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이자 트러블 메이커로 자리한다는 점을 상징하게 된다. 애비의 역을 맡은 에린 도허티는 인터뷰를 통해 연출가인 터너가 일반적으로 팜므 파탈이나 악역으로 제시되는 애비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기를 바랐고, 그녀 역시 다르게 해석하고자 했다고 밝혔다.4 도허티는 애비가 단지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즉흥적으로 행하는 필사적인 인물이고, 그녀를 그렇게 몰고 간 것은 어른들이 구축한 사회라는 점을 강조한다. 실제로 애비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제대로 된 책임을 지거나 어른으로서 합당한 행동을 하지 않은 ‘프락터’와 그녀의 소문에 대해 알면서도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외면하고 무시하고자 했던 삼촌 ‘패리스 목사’, 아이들의 증언이 거짓이 될 경우 자신이 내린 잘못된 판결과 결정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될 것을 더욱 두려워했던 ‘판사들’과 악마학 연구자 ‘헤일 목사’의 이기심이 애비를 비롯한 소녀들이 폭주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엄청난 파워를 어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용하고 즐길 뿐 어떤 계획이나 목적을 품고 있지 않다.
터너의 <시련>은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죄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목숨을 건지는 일이 더 중요해서,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서, 누군가를 고발하고 죽음으로 몰아넣는 행위를 하는 사회가 어디에나,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만든다. 터너가 택한 보편성과 원작에 충실한 연출은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아닌 진실과 선함, 명예, 그리고 자신의 의미를 선택하는 프락터를 영웅적인 것으로 그리기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갈등과 인식, 깨달음으로 표현한다. 이 때문에 프락터나 애비의 캐릭터가 충분히 강렬하게 표현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있지만 작품 속 모든 인물들이 특정 개인이 아니라 사회 속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이 된다. 어쩌면 터너의 연출이 “독자들이 인간 역사의 가장 이상하고 가장 끔찍한 챕터 중 하나에서 본질적인 본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던 밀러의 의도를 잘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터너의 세일럼이 17세기 미국이 아닌 비의 장막 너머에 존재할지 모르지만 우리 가까이에서 숨 쉬고 있는 사회를 비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 보면 말이다.
- Christopher Bigsby. “Introduction”. The Crucible. Penguin Books. 1995. p. x.
- Arifa Akbar. “The Crucible review – stylish restaging is all beauty and no bite.” The Guardian. Sep 29 2022. Web.
- Es Devlin. “How We Made It: The Olivier Rains for The Crucible.” National Theatre YouTube. Oct 28 2022. https://www.youtube.com/watch?v=tvNxesAUl1E
- Rachel Cooke. “Actor Erin Doherty: ‘How good a footballer was I? I got scouted by Chelsea!’.” The Guardian. Oct 16 2022. We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