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야비(tristan-1@daum.net)
소설가, 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극단 듀공아, 외계 공작소, 동맹, 아레떼 연출부 드라마투르그
가장 압도적인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들어낸 현대 작곡가의 작품을 소개한다.
알프레드 시닛케(A. Schnittke; 1934~1998)의 ‘파우스트 칸타타’다. 지금까지 소개한 수많은 파우스트 관련 음악 중에서 가장 완벽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시닛케(오랫동안 ‘슈니트케’로 한글 표기했으나 개정된 표기법에 따라 ‘시닛케’로 표기한다)는 20세기 현대 음악 작곡가 중 가장 이름을 널리 알린 작곡가다. 한 사조에 매몰되지 않는 그의 다양한 작곡 스타일과 여러 실험적인 시도가 조류를 넘어 쓰나미가 되어버린 현대음악의 범람에 튼튼한 방파제 역할을 했다.
1982년 모스크바의 한 극장 감독인 유리 류비모프(Yuri Ljubimov)는 슈니트케에게 괴테 파우스트 2부를 대본으로 하는 오페라를 의뢰했다. 고전 중의 고전이 괴테 파우스트와 현대 중의 현대인 슈니트케의 음악은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착상이 부유하던 중 지휘자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Christoph von Dohnanyi; 1929~)가 오페라 무대를 위한 연주 음악을 시닛케에게 제안했다. 시닛케는 이 기회를 십분 활용해 오페라 ‘파우스트’의 예비 작업으로 칸타타를 구상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3년, 총 10곡으로 구성된 “Seid Nüchtern und Wachet(냉철하게 깨어 있으라)” 일명, ‘파우스트 칸타타’를 완성한다.
정확하게 따지자면 시닛케의 텍스트는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가 아니라, 전설로 구전되던 파우스트 이야기를 1587년 J. Spies가 정리한 ‘요한 파우스투스 박사의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기초로 한다. 시닛케는 그 중 파우스투스 박사가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걸고 악마와 맺은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가장 극적인 시점을 대규모 음악으로 형상화했다.
우선, 연주의 규모를 살펴보자.
4관 편성의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수많은 타악기 그리고 피아노와 오르간까지 필요하다.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로 이루어진 합창단이 오케스트라 뒤에 자리 잡고, 지휘자 왼편에서 알토, 카운터-테너, 테너, 베이스의 네 명의 성악가가 독창과 중창을 부른다. 콘서트홀의 무대가 꽉 차는, 백 명이 훌쩍 넘는 규모다.
독창자 네 명은 각자의 역할이 있다. 남성 테너는 극과 음악을 이끌어가는 내레이터 역할을 하고 남성 베이스는 파우스트 박사를 맡아 노래한다. 여성 알토와 남성 카운터-테너(가성으로 여성의 높은 음역을 노래하는 남성 테너)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맡는다. 즉, 메피스토펠레스는 2인 1역이다. 이러한 ‘이중 악마’ 구조는 작곡가 시닛케가 의도한 칸타타의 백미이자,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음악화한 수많은 작품 중 가장 섬뜩한 효과를 발휘하는 부분이다.
전체 곡은 총 10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 부분은 쉼 없이 이어서 연주한다.
피아노와 타악기의 앙상한 리듬으로 시작하는 제 1곡은 불길한 분위기를 대놓고 발산한다. 이어서 거대한 합창이 ‘파우스투스 박사의 섬뜩하고 무서운 결말을 따라가 봅시다’라고 쏟아지듯이 노래하는데 경고인지, 안내인지 모호한 화성과 리듬이 집요하게 반복된다.
제 2곡은 내레이터인 테너가 등장하여 24년의 계약 기간 만료를 설명한다. 영화나 드라마에 삽입되는 효과음 같은 타악기의 음색이 인상적이다. 이어지는 제 3곡은 즐거운 식사와 음주로 앞선 곡들이 팽팽하게 조여놓은 긴장의 끈을 살짝 느슨하게 하는 부분이다.
제 4곡에서 파우스트 박사를 맡은 베이스의 굵직한 음성이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온다. 파우스트는 만찬 자리에 모인 지인과 제자들에게 24년 전 악마와 맺은 계약을 실토한다. 합창이 그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며 개탄하지만 정작 파우스트는 담담하다. 저음의 묵직한 금관이 죽음을 정면으로 직면하는 대인배 박사의 심리를 대변한다면, 방정맞은 타악기의 리듬은 ‘24년이나 됐는데 진짜로 악마가 오겠어?’라고 생각하는 소인배 노인의 비루한 희망을 표현한다.
제 5곡은 가장 합창이 멋진 부분으로, 친구들과 제자들이 죽음에 직면한 파우스트에게 조언하는 장면이다. 제 5곡은 찢어질 듯한 팀파니 연타 위로 불길한 서사시가 묵시록처럼 울려 퍼지는 ‘지옥의 칸타타’다.
제 6곡에서 파우스트는 결국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카운터-테너가 2인 1역인 메피스토펠레스로 분해 합창과 함께 노래한다. 비록 악마지만, 카운터-테너의 미성(美聲)은 실의에 빠진 파우스트를 위로한다. 하지만 이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절반일 뿐이고, 어쩌면 파우스트가 희망하는 악마의 모습일 뿐이다. 이어 테너가 이야기를 끌어가다가, 무대 뒤에서 섬뜩한 알토의 괴성이 들린다. 나머지 절반의 메피스토펠레스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압도적이 제 7곡의 템포 지시어는 ‘In Tempo di Tango’ 즉, 탱고다. 깨진 종소리와 쩍쩍 갈라지는 큰북의 타격을 반주로 섬뜩하고 광기 어린 ‘악마의 탱고’가 시작된다. 첫 등장인 알토 독창자는 메피스토펠레스 그 자체다. 메피스토펠레스의 힘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이미 선과 악의 범주를 초월했다. 즉 알토의 메피스토펠레스는 ‘악(惡)’이 아니라 좋고 나쁨이 없는 ‘힘’ 그 자체다. 공기를 울리는 그녀의 떨림은 언어와 비명, 음악과 음향의 구분까지 초월해 버린다. 합창단은 노래가 아닌 휘파람으로 악마의 뒤를 지원한다. 결국, 알토의 메피스토펠레스는 악의가 아닌 주체할 수 없는 힘으로 파우스트를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시닛케는 카운터-테너와 알토의 2인 1역 메피스토펠레스라는 낯선 장치를 통해 잔인하게 아름답고 또 끔찍하게 멋있는 장면을 연출한다.
8곡으로 넘어가면 내레이터인 테너가 바흐의 칸타타나 수난곡의 복음사가(Evangelist)처럼 파우스트 사후의 상황을 정리한다. 특히 스승을 하염없이 기다리다 넋이 나간 제자 바그너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9곡과 10곡은 칸타타의 피날레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합창단이 저잣거리의 쑥덕임처럼 ‘이제 이야기는 끝났다’를 혼란스럽게 지껄이고 ‘악마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리스도를 믿어라’ 라는 교훈적인 내용이 울려 퍼지는데 어딘가 기계적인 느낌이 든다. 트럼펫과 함께 점점 고조되어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순간, 모든 음이 정지하고 제 1곡의 앙상한 피아노 리듬이 기괴하게 연주된다. 이어 4명의 성악가가 모두 등장해 ‘악마가 또 다른 파우스트를 찾아 돌아다닌다’를 부른다. 성가의 분위기가 묻어 있지만, 공허한 리듬이 계속 절뚝거려서 구원을 찾기는 힘들다. 피아노와 타악기의 뼈다귀 부딪히는 음향과 현의 잔향으로 파우스트 칸타타’가 끝난다.
인간은 사건을 직면하거나 상대방을 대할 때 ‘이 일이 이렇게 돌아가면 좋을 텐데…’, ‘저 사람이 이런 행동, 이런 말을 해주면 좋은데…’ 라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이런 바람은 애써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떠오르는 일종의 방어 기제다. 우리는 이것을 ‘희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희망의 근원은 바로 내재한 불안이다.
카운터-테너가 노래하는 메피스토펠레스는 바로 파우스트의 내면이 그린 ‘순한 맛’의 메피스토펠레스였다. 하지만 알토가 연기하는 실제의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의 희망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알토의 악마는 ‘순한 맛’의 반대 개념인 ‘매운 맛’이 아니다. 실제 악마는 그냥 혀를 뽑아버리는 힘이다. 그 힘에는 ‘맛’이 없고, 에너지 고유의 ‘멋’이 존재한다.
인간의 내재 불안은 인간이 죽어야 끝난다. 시닛케는 2인 1역 연출을 통해 선악을 넘어 내재한 불안마저 찢어버리는 압도적인 메피스토펠레스를 창조했다.
1994년, 시닛케는 이 칸타타를 재료로 3막의 오페라 ‘요한 파우스투스 박사의 이야기(Historia von D. Johann Fausten)’를 완성한다. 몇 명의 조연이 추가된 것을 제외하고 주요 성부와 캐스팅은 칸타타와 동일하다. 혼성 합창단에 대편성 오케스트라 그리고 오르간, 2대의 신시사이저, 전자 기타, 각종 타악기가 추가되는 압도적인 규모의 오페라다. 그래서인지 1995년 초연 이후 전곡이 연주된 공연이 없다. 음반도 초연 당시 함부르크 극장에서 녹음한 음반 하나뿐인데, 이마저도 절판된 지 오래다. 나중에 공연이나 음반을 접하게 되면 꼭 이곳에 보필하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알토 Iva Bittová의 신들린 메피스토펠레스 연주 영상을 링크한다. 전곡을 다 듣기 힘들다면 5분 정도의 제 7곡 ‘악마의 탱고’만이라도 감상하기를 바란다. 이 알토 가수는 메피스토펠레스에 완전히 빙의된 듯하다. 진심으로 일청을 권한다. 다 듣고 나면, 필자가 왜 시닛케의 연출을 ‘가장 압도적인 메피스토펠레스’라고 단언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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