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윤서현(연극평론가)
투명한 두 겹의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공간. 중앙에 걸린 샹들리에의 반짝임이 화려하다. 오도카니 앉아있는 커다란 곰 인형과 오래된 목재가구를 감싸는 주황빛 조명이 유리와 금속 재질의 말간 서늘함에 따스함을 입힌다. 언뜻 거대한 야외 온실처럼 보이는 이곳은 ‘아이들 방’으로, 외국에서 돌아온 라녜프스카야가 가장 먼저 찾은 추억의 공간이다.
모두가 손꼽아 기다리는 라녜프스카야지만, 사실 그녀가 죄책감에 휩싸여 러시아를 떠나게 된 사연이란 것이 너무나 통속적이다. 알코올 중독자 남편과 사별하고 다른 남자와 동거하던 중 어린 아들이 강가에서 익사한 것. 그녀를 러시아로 돌아오게 한 사연도 마찬가지다. 외국까지 쫓아오는 바람에 함께 지내게 된 애인이 갑자기 병을 얻어 3년의 간병 끝에 살려놨더니 다른 여자에게로 떠나버렸다. 이 사건의 충격으로 음독자살까지 시도한 라녜프스카야가 문득 고향의 벚꽃동산을 떠올린 것이다. 체홉 드라마의 등장인물 중 가장 ‘화려한’ 전사를 지닌 라녜프스카야는 그녀의 이름인 ‘류보피’, 즉 ‘사랑’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인물로, 체홉의 소설 <귀여운 여인>의 주인공과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온 인물이다.
그러니 벚꽃동산이 경매에 넘어가게 된 건 어쩌면 평생을 사랑만 쫓은 결과다. 대대로 이 집안의 머슴이었다가 농노해방 이후 자수성가한 로파힌이 안정적 수익 창출 방안을 소개하지만 라녜프스카야는 그저 커피나 마시며 산책을 하고, 적선을 하며, 걸인을 먹이고, 돈을 꿔주고, 연회를 베풀 뿐이다. 로파힌이 들으면 허탈해할지 모르겠지만, 라녜프스카야는 진즉에 벚꽃동산의 연명치료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장례준비를 위해 들른 것처럼 보인다. 늙은 하인 피르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병을 고치는 게 아니라 조상님들 곁으로 가는 것”이라는 예삐호도프의 말처럼 라녜프스카야도 자신의 시대가 저물어 가는 것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안톤 체홉의 마지막 장막극으로 1903년에 쓰인 <벚꽃동산>은, 계급변동과 세대교체라는 소재 선택은 물론 당대의 혼돈과 불안을 암시하는 독특한 표현으로 인해 러시아의 급변을 감지한 예언적 작품으로 오랜 기간 해석되어 왔다. 동시에 이 작품은, 혁명의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이전 모든 이들의 화해가 가능했던 마지막 시절을 그려낸 노스탤지어의 작품으로 읽히기도 한다. 영락한 귀족 자제와 나이든 하인, 가난한 지식인과 신흥 자본가, 노동을 모르는 어머니와 노동자가 되겠다는 딸, 계급적으로 혹은 세대적으로 반목하는 것이 당연해 보이는 수많은 관계들이 서로의 지나온 날들을 연민하고 앞으로의 운명을 염려해주고 화해의 손을 잡는다.
라녜프스카야는 벚꽃동산의 청산 이후 죄책감(아들 그리샤)이나 배신감(애인)에서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다시 자기 식으로 남은 생을 계속 살아갈 준비, 애인이 있는 파리로 떠날 채비를 한다. 오, 영락없는 류보피! 이제 그녀가 돌아올 곳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테지만 그녀가 벚꽃동산을 청산한 덕분에 그 다음 세대, 그녀의 딸 아냐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번 명동예술극장의 <벚꽃동산>은 120년 전 러시아 배경의 설정을 번안 없이 그대로 가져왔다. 의상과 소품이 당대 시대성을 드러내는 데 주목했다면, 상대적으로 유리벽 무대나 음악에는 현대적 감각이 두드러졌다. 특히 음악의 경우는 다른 요소들과 동일한 차원에 놓여있다기보다는 무대의 사건과 상황을 가치 판단하는 시선, 일종의 주석처럼 기능하였다. 코믹한 뉘앙스의 반복적 선율이 체홉 스스로 명명한 대로 이 작품을 ‘코미디’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기는 했지만 동시에 이러한 시도가 지나치게 명시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
대화와 독백의 경계를 오가는 체홉 대사의 특성상, 대화 상황일지라도 혼잣말이나 구시렁댐이 섞여있는 경우가 빈번한데, 이번 공연의 대사들의 경우 대부분 무대 전면에서 일관되게 또렷한 발음과 발성으로 일정한 대화 상대를 향해 발화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의 생각으로서는, 이러한 발화 방식이 매 순간 등장인물 각각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에는 용이하지만, 특히 무대에 다수의 인물의 발화가 진행되는 경우에는 이들 전체가 하나의 분위기 속으로 어우러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와 관련해서는 필자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번역 텍스트를 공연 대본으로 별다른 수정 없이 사용한 것은 아쉬운 지점이다. 물론 이번 프로덕션의 배우들이 각자의 기량에 따라 뛰어난 화술과 유연한 연기를 통해 번역투의 어색함을 상당 부분 덜어내기는 했지만-특히 강신구 배우의 가예프 연기가 일품이었다-‘일상’을 체홉식으로 한국 관객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기존 번역 텍스트를 자연스러운 구어로 다듬기 위한 충분한 윤색 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러시아어 이름과 관련해서는 한국 관객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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