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창극단 <베니스의 상인들>

글_수진

 

작품의 제목은 이야기나 소재를 짐작하게도 하지만, 작품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국립창극단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을 각색하면서 제목을 <베니스의 상인(Merchants of Venice)>로 바꿨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들(-s)’에 담긴 의미는 이 작품이 원작과 달리 중점을 두는 부분이기도 하고, 관객들이 이번 작품에 주목하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극본 김은성, 연출 이성열, 작창 한승석, 작곡 원일) 속 안토니오는 돈보다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는 상인조합의 리더로 조합원의 공생을 위해 힘쓰는 인물이다. 그는 친 형제처럼 지내는 바사니오에게 거액의 청혼 자금이 필요하자, 자신의 가슴살 1파운드를 담보로 탐욕적이고 교활한 대자본가 샤일록에게 돈을 빌린다. 상인조합 때문에 무역업을 독점하지 못했던 샤일록은 고의로 그들의 배를 침몰시키고 평소 탐탁지 않게 여기던 안토니오를 죽음의 위기에 빠뜨린다.

 

사진 제공: 국립창극단

 

 

이처럼 작품은 원작의 이야기 흐름을 유지하면서도 각색을 통해 대립 구도를 명확히 하여 주제를 직관적으로 제시한다. 원작의 안토니오와 샤일록은 당시 기독교인과 유대인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객관적으로 어느 한 쪽을 선과 악으로 대변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번 작품은 종교적 담론을 배제하고 안토니오를 자신보다 상인조합과 타인을 위해 힘쓰는 ‘선’으로, 샤일록을 시장을 독점하고자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악’으로 극명하게 대립시킨다. 때문에 작품은 권선징악, 공동체의 연대와 사랑이라는 주제를 관객에게 쉽고 분명하게 전달한다.

또한 작품의 배경이 되는 베니스와 벨몬트 두 지역도 이성과 실리가 지배하는 세상과 감성과 사랑이 충만한 세상으로 의도적으로 구분한다. 이를 위해 베니스는 거대한 범선과 여러 작은 배들의 그림자, 모노톤의 의상들로 표현되고, 벨몬트는 분홍색의 수많은 꽃들과 원색의 화려한 의상들로 채워진다. 따라서 베니스에서 생긴 안토니오의 재판이 벨몬트에서 온 포샤의 지혜로 해결되는 것은, 논리가 지배하는 탁월해 보이는 세상도 타인을 향한 사랑과 배려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원작과 같이 창극에서도 이야기의 중심인물은 안토니오와 샤일록이다. 이 두 인물은 국립창극단 대표 소리꾼 유태평양(안토니오 역)과 김준수(샤일록 역)가 맡았는데, 기존에 맡았던 역할의 이미지와 상반되는 캐스팅으로 많은 관심을 모았다. 그들의 탁월한 소리와 연기는 작품의 대립 구도에 긴장감을 더했다. 제때 돈을 갚지 못해 감옥에 갇혀 부르는 안토니오의 노래는 강렬한 일렉기타 사운드가 더해져 극한에 처한 그의 심정이 드라마틱하게 묻어났다. 또한 샤일록이 재판장에서 부르는 마지막 곡은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그의 절규가 무대를 사로잡아 작품의 백미로 꼽히기도 했다.

 

사진 제공: 국립창극단

 

그러나 이들 못지않게 관객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앙상블의 합창이다. <베니스의 상인들>은 마냥 주·조연에게만 방점을 두지 않는다. 앙상블인 상인조합 구성원 각자에게 작지만 나름의 서사를 입히고, 모두가 힘을 모을 때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고 노래한다. 때문에 관객들은 극장을 나서며 현실이 설령 그렇지 않아도,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수 있을 듯한 작은 희망을 품게 된다. 이 작품이 원작의 제목에 ‘-들(-s)’을 붙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특별한 한 명의 주인공이나 영웅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 내는 연대에 있다는 것. 결국 쉽게 눈에 띄지 않던 제목의 ‘-들(-s)’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상인조합원들이자, 극장의 객석을 채운 관객 개개인을 상징한다.

국립창극단 <베니스의 상인들>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속 안토니오와 샤일록의 이야기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로 각색하여 동시대성을 확보했으며, 대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또한 셰익스피어의 희극이 가진 이야기의 재미와 우리의 창극이 가진 장르적 매력이 탁월하게 조화를 이룬 선례가 되었다. 이는 우리 소리의 매력이 절절한 한(恨)의 정서에도 있지만, 풍자와 해학에도 있기에 가능했다. “밝은 미래가 아장아장 걸어오네, 우리가 손을 잡으면”이라는 가사처럼 민중의 서사로 다시 태어난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이 모두를 신명나게 웃게 하고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하는 작품으로 다시 찾아오길 바란다.

 


  • 무료정기구독을 원하시는 분은 ohskon@naver.com으로 메일을 보내주세요.
  • 리뷰 투고를 원하시는 분은 ohskon@naver.com으로 원고를 보내주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