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김기란(연극평론가)
나온씨어터에서 6월 7일부터 18일까지 공연된 <요새는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그, 윷놀이>는 제목부터가 반전이다. 윷놀이가 길어 올리는 익숙한 정서, 곧 신명나고 정겨운 한 판의 놀이를 기대했던 관객들에게는 최소한 그렇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윷놀이를 요새는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다니, 윤조병의 원작 희곡 「윷놀이」에 따라붙은 부제는 이 희곡을 발굴한 이철희 연출의 각색 의도를 은근히 암시하는 듯도 하다.
상여 소리 매김과 함께 등장한 농사꾼들의 구부러진 등은 결코 펴질 것 같지 않아 시작부터 애달프다. 그들이 아무리 용을 써도 상여가 놓이는 곳이 무덤이라는 사실은 변할 수 없듯이, 그들이 애써 흥을 내도 윷놀이는 흥겹지가 않다.“오래간만이 귀경 허니께 사람 사는 거 같지유”라는 질문이 그야말로“좀 그런”우문(愚問)인 것도 그 때문이다.
어쨌든 그들은 윷놀이를 시작한다. 어떤 품새든 움직여야 살아진다. 60분의 공연은 이런저런 각자의 걱정을 감춘 채, 죽을 힘을 다해 편을 짜고 전략을 세우며 손가락에 힘을 모으는 한 판의 윷놀이로 채워진다. 돼지, 개, 양, 소, 말을 의미하는 윷놀이의 도, 개, 걸, 윷, 모는 이들의 삶과 닿아 있다. 하지만 허공을 가로질러 잠시의 체공(滯空)도 허락하지 않고 땅에 내팽개쳐지는 4개의 둥근 나무 막대기(윷)는 그들이 애써 외면하는 현실처럼 가차없다. 5명의 배우의 간절한 손길과 눈길에 따라 땅에 떨어지는 순간, 도, 개, 걸, 윷, 모가 결정되는 가혹함이 처절하다.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결정이니, 누군들 그저 기다릴밖에 도리가 없다.
4개의 윷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모양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그럼에도 모가 나왔다고 마냥 기뻐할 수 없고, 도가 나왔다고 지레 풀죽을 필요 없다. 가장 좋은 것도, 가장 나쁜 것도 속단할 수 없는 것이 윷이 움직이는 말판의 원리이다. 앞서 나갔다가 도에 잡힐 수도 있고, 뒤쳐졌다가도 역전이 가능하다.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다. 그들의 윷놀이판을 보다 보니, 우리들의 삶의 원리와 연결되고 짝패를 이루는 것들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윷놀이를 왜 요새는 하지 않느냐고 은근히 질책당하는 기분인데, 우리는 삶의 원리를 보지 못하는가 혹은 보려 하지 않는가.
<요새는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그, 윷놀이>를 연출한 이철희는 충청도식 정서를 다루는 데 자타공인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5명의 배우는 가까운 듯 멀고, 먼 듯 가까운 충청도식 정(情)을 60분의 공연 안에 넉넉하게 녹여냈다. 배우들의 찰진 사투리 화술과 에너지를 조절한 몸짓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젊은 배우들의 말소리가 거슬리게 강하게 느껴진 부분은 아쉽지만, 눙치는 충청도 어법이 웃음을 자아내고, 밀고 당기는 리듬이 극 전체에 적절히 배분되었다. 충청도 특유의 씨부랄이 맛깔나게 구사되며, 속끓이는 농촌의 현실이 언급되고, 신구 세대의 갈등이 양념처럼 살짝 얹어졌다.
말판이 한 바퀴 돌고 나면 끝나는 것이 윷놀이다. 한 바퀴가 예정된 말판 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잡히며, 때로는 믿을 수 없는 행운이 눈앞에서 이뤄지고, 계속될 것만 같던 행운이 불운이 되기도 하는 삶의 불가해한 비의(秘義)가 흥겹고도 애잔하게 드러나니, 옆으로 선 윷을 두고 등인지 배인지를 다투는 일이 부질없는 것이라는 점을 어찌 수긍하지 않을 것인가. 하여 망자인지 산자인지 알 수 없는 그들처럼, 쌈질하지 않고 놀던 윷을 마저 노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을 요새 우리가 잊고 있지는 않은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나온씨어터의 무대 정면 벽면의 분필로 그려진 앙상한 한 그루 나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나무에 붙은 단 한 장의 푸른 잎사귀는 마치 장석남의 시에 나오는“마당에 걸린 배”처럼, 망자와 산자를 연결하는 매개로 기능한다. 공연 시작과 함께 여지없이 꺾여 망자들의 윷놀이의 말이 되는 그 단 한 장의 푸른 잎사귀는 그리 특별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것일 수 있으나, 그 작은 잎사귀가 우리들을 웃고 울리는 말이 된다는 것이 신묘할 뿐이다.
<요새는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그, 윷놀이>는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함이 모여 삶 전체의 본질을 드러내는 극장르 특유의 미감을 제대로 보여준 공연이다. 소소한 경험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연극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는 듯한 불안감을 일거에 날려준 감동적인 공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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