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배선애(연극평론가)
20년 전, 가수 이효리가 솔로로 데뷔하면서 ‘10 minutes’을 불렀을 때, 10분만에 이성을 유혹할 수 있다는 가사를 보며 참 오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시간을 전제한다고 생각했던 필자로서는 상대방을 우습게 여기거나 아니면 자신감이 과하다고 보였기 때문이다. 10분만에 유혹할 수 있다는 사람이나, 10분만에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이나 모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0분은 생각보다 참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즉석카레를 데워서 비벼 먹고도 남는 시간이며, 축구 경기의 수많은 극적 장면이 만들어지는 인저리 타임도 10분 내외다. 그러니, 10분이면 충분히 유혹하고도 남는 시간인 것, 인정? 어, 인정.
연극에서도 10분의 묘미와 넉넉함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바로 ‘10분 연극’을 지향하는 프로젝트10minutes의 공연(2023년 6월 14일~18일. 아르코예술극장 스튜디오 다락)이었다. 대개 희곡은 막과 장의 구성과 길이에 따라 장막과 단막으로 나뉜다. 공연 시간을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단막은 30분에서 1시간 이내의 공연이고, 장막은 최소 1시간 이상의 공연이다. 장막이 총체적인 인간관계와 갈등을 지향한다면 단막은 칼로 자른 듯이 현실의 단면을 제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소설에서도 단편소설의 맛이 있듯이 단막극 역시 짧으면서도 강렬한 매력이 있는데, 10분 연극은 단막 중에서도 아주 짧은 초단막극이라 할 수 있다.
10분이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과연 10분 안에 연극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많이 우려되었다. 필자의 사례를 비유하자면 이런 경우일 것이다. 원고지 30매 이상 온갖 이야기를 하며 리뷰를 쓰다가 갑자기 5매로 제한해서 써야할 상황이 닥친 것이다(실제로 이번 서울연극제 합평회 원고가 그러했다). 보통 서론만 5매가 넘는데, 도입부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인가? 본론에도 여러 이유와 근거를 설명할 수 없으니 핵심 문장만 남겨야 하나? 몹시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시츄에이션이다.
스튜디오 다락에서 만난 여섯 편의 10분 연극은 이런 어리석은 걱정을 한 방에 날려버렸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서로 다른 맛의 조각케이크 여섯 조각을 세트로 선물 받은 것 같았다. 한 조각, 한 조각이 제각각 훌륭한 맛을 내는데, 그런 맛난 조각케이크가 케이크 상자 안에 여섯 개나 들어 있었던 것이다. ‘프로젝트10minutes’의 활동은 올해로 여섯 번째인데 이제야 맛을 보았으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래도 이제라도 만났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며 여섯 조각 케이크의 맛을 음미해보고자 한다.
<지원서 마감 15분 전>
-작·연출: 방혜영
-제작: 연극집단 공외
-출연: 박기림, 이민하
연극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제목 그대로 지원서 마감 15분전! 선정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왠지 하지 않으면 아쉽고 서운한 지원신청. 청년연출가는 그래도 지원서는 접수하는 것이 좋다며 나름대로 최선의 지원서를 쓰고 있는데, 중년연출가는 계속 타박을 하고 잔소리를 한다. 지원신청하는 작품의 내용이 매력적이지 않다, 선정되기 위해 억지로 짜냈다 등등 지원서 앞에서 한없이 고민하는 사람에게 이른바 뼈때리는 말들만 늘어놓는다. 우왕좌왕 고민하지만 그럼에도 청년연출가는 결국 접수버튼을 누른다. 그 고민과 번뇌의 과정이 딱 10분간 펼쳐진다. 매우 현실적인 상황, 현실적인 이야기가 현실의 시간과 일치하면서 진행되고 있으니 마치 연습실 한켠에서 여전히 지원서를 쓰고 있는 연출가의 모습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 고민이 많지. 딱히 특별한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으니 막막하기도 하지. 그래도, 안될 걸 알아도 지원신청은 일단 해놓는 게 마음 편하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충분히 공감되는 이야기를 책상 하나 놓고 두 사람이 펼쳐냈다. 군더더기 없이 10분의 시간과 무대를 깔끔하게 활용한 작품이었다.
<그래, 넌 행복한 왕자지>
-작: 김단추
-연출: 이보미
-제작: 보통현상
-출연: 김솔, 이자경
10분 안에 가장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던 작품이었다. 14년 간 병원에 입원해있던 일명 나이롱 환자 안서용이 전신마비 환자를 옥상에 올려두는 사건이 발생한다. 병원에 입사하려는 간호사 안나와 퇴원하는 안서용의 대화가 진행되는데,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보이는 안서용의 이야기를 통해 결국은 전신마비 환자의 장기를 밀매하는 병원의 비리가 폭로된다.
이 모든 것을 끌고 가는 것은 안서용이다. 강남의 유명한 남성 호스티스라고 자신을 소개한 후 오감을 잃은 정마리아 환자를 자신이 옮겼다고 말하며 병원 안전요원과 싸움할 때 잽을 날리면서 자신은 젭, 젭, 제비이고 정마리아 환자는 행복한 왕자라고 정리한다. 안서용은 얼핏 두서없이 대화를 이어가는 듯 보이지만 병원의 비리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폭로한 것이다. 병원의 장기밀매가 동화 속 행복한 왕자에 비유되고, 호스티스에서 제비로 건너뛰는 발상이 유쾌하다. 더군다나 연극계에서 포토그래퍼와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김솔 작가의 안서용 연기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그래도 연기연습은 좀 더 해보면 어떨까 싶다). 작은 목소리, 부정확한 발음 등 스스로를 배우로서 잘 간파하고 있는 대사도 웃음 포인트였고, 안서용, 안나, 정마리아 등 성적인 언어유희를 곁들인 대사들이 작품 전반의 분위기를 살려냈다. 10분 동안 쉬지 않고 웃었던 작품이다.
<사라진다살아진다>
-작·연출: 이종훈
-제작: 프로젝트3
-출연: 안지영, 양진영, 이혜진
10분의 시간이 무한대로 펼쳐질 수 있다는 것, 사람의 일생을 펼쳐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작품이었다. 미혼모로 딸을 키운 엄마가 어느덧 나이가 들었고, 장성한 딸을 시집보내면서 서로 닮아가는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적고 보면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것 같은데, 관건은 이 이야기들이 10분 안에 펼쳐졌다는 것이다. 딸의 어릴 적 기억, 진로를 걱정하는 청소년기, 그리고 취업 후 결혼을 앞둔 상황. 인생의 중요한 고비를 한정하고 그 고비에서 모녀의 대화를 통해 두 사람의 성격과 인생이 펼쳐진다. 인상적인 것은 그 시기마다 엄마를 영상으로 촬영해서 모니터에 띄우는데, 인물을 자연스러우면서도 선명하게 강조하는 역할을 했다. 어린이부터 성년에 이르기까지, 또 노년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변화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앙상블이 돋보이는 공연이었다. 무난하고 익숙한 내용을 다루어도 1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은 여러 가지를 상상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그래서 고유한 개성을 보여주는 창조의 샘이었다.
<삼겹살>
-작: 김지영
-연출: 최규선
-제작: 극단 하이눈
-출연: 김하영, 손준영, 심진혁
마라톤을 기본 모티프로 삼았기 때문에 여섯 작품 중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무대 전체를 활용한 작품이었다. 마라톤에 참여한 부부가 오랜만에 부인의 옛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남편이 모르는 부인의 과거가 짧게 나오면서 긴장감이 마라톤처럼 팽팽해진다. 삼겹살은 부부가 먹기로 한 음식이면서 동시에 아내의 과거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배우들은 마라톤 경기장 화장실로 설정된 스튜디오 다락 밖으로 달려 나갔고, 삽겹살 식당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가장 안쪽의 대기실로 들어갔다. 직선과 곡선으로 무대를 종횡무진 활용하면서 배우 신체의 에너지를 객석으로 전달했다. 덕분에 아내와 옛 남자친구의 뜨거운 장면도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었다. 인물의 관계를 만들 때 중요한 포인트가 무엇인지를 영리하게 잘 파악한 작품이었고, 그로 인해 10분의 시간은 물론 공간까지 꽉 채운 작품이었다.
<크리스마스 캐롤>
-작·연출: 변영후
-제작: 몽상공장
-출연: 곽현지, 김시현, 김정민
무대 위 모든 것을 최소화한 이 작품은 어떤 면에서는 이번 프로젝트의 부제인 ‘여섯 번째 감각’에 가장 집중한 공연이었다. 배우들은 얼굴 전체에 형광색 분장을 하고 각자 긴 줄로 연결된 조명기를 들었다.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비추는 조명으로 인해 형광색 얼굴이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무대 조명이 전혀 없이 배우들의 손조명으로만 진행된 공연은 스토리보다는 정서, 혹은 감각에 더 집중했음을 보여주었다. 프로그램북에는 작품의 배경이 1914년 1차 세계대전 당시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캄캄한 무대에서 들리는 배우들의 대사는 전쟁 한복판에서 외로움과 불안에 떠는 병사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었다. 특히 대화라기보다는 각자 읊조리는 듯한 시적 대사는 조명을 최소화해서 청각이 강조된 무대에 큰 울림으로 정서를 창조해냈다. 10분을 활용하는 데에 서사나 갈등이 없어도 충분히 다른 감각들을 도드라지게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암흑과 손조명이 포인트였기 때문에 이 작품만 공연사진이 없다. 연극은, 카메라로 담아내기엔 여전히 까다로운 예술이다.)
<여행>
-작·연출: 박상협
-제작: 극단 화담
-출연: 김인정, 김희연, 변나라
10분 초단막극이란 이런 것이라는 걸 보여준 작품이다. 공간은 터미널, 인물은 휠체어를 탄 노모와 보호자인 딸, 그리고 터미널 직원. 딸은 겨우 손가락만 움직이는 엄마를 모시고 경주로 여행을 가려하는데, 실은 여행이 아닌 삶을 마감하기 위한 것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딸은 혼잣말처럼 엄마와 대화를 나누면서 돌봄의 힘겨움, 그럼에도 엄마가 오히려 딸을 지탱하게 하는 힘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날씨가 좋아서 다시 가보련다며 돌아서는 모녀.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엄마와 통화하는 직원의 마지막 장면이 흐뭇한 엔딩을 만들어냈다. 한정된 장소, 한정된 시간, 그럼에도 그 시간 안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자연스럽게 펼쳐냈다. 더구나 딸의 대사를 통해 그들이 살아온 세월, 지금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도 영리한 극작술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그 덕분에 관객들은 이 모녀를 고작 10분 봤을 뿐인데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낸 것처럼 친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섯 편의 작품은 내용도 형식도 제각각이었지만 10분의 시간을 충실히 채워냈다. 그러면서도 현실의 문제, 지금의 고민을 당당하게 마주하고 있었으며, 짧고 강한 자신만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말 그대로 ‘촌철살인(寸鐵殺人)’. 10분 연극의 매력은 바로 촌철살인이었다.
10분은 제한 시간이기도 했지만 가능한 모든 것들을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여섯 작품이 같은 무대를 공유하다보니 조명과 무대장치도 단출해야 했다. 무대의 다채로운 활용이 돋보이는 것은 연출가의 감각이 제한된 상황일수록 더욱 빛을 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연극성은 이렇게 제한된 여러 조건들 속에서 무궁무진해진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는 자리였다.
다만, 공연의 부제인 ‘여섯 번째 감각’이 얼마만큼 공유되었고 실현되었는지는 회의적이다. 오감이 마비된 환자의 남은 감각은 상상력(<그래, 너는 행복한 왕자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사회적으로 용인된 ‘촉(싸한 느낌)’(<삼겹살>), 손조명을 활용한 감각의 극대화(<크리스마스 캐롤>) 등 여섯 번째 감각을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은 이 정도였다. 이왕 기획된 프로젝트의 주제가 정해졌다면, 참가단체 각자가 고민하는 여섯 번째 감각은 어떤 것인지 조금 더 적극적으로 고민해보면 어떨까? 여섯 작품을 흥미진진하고 무척 재미나게 관극하였지만 여섯 번째 감각이 무엇인지는 추려내기가 어려웠다. 이전 기획과는 달리 올해는 시즌1과 시즌2로 나뉘어 공연을 한다고 하니, 10월에 공연 예정인 시즌2에서는 여섯 번째 감각을 좀 더 명확히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10분, 그 시간 안에 뭘 하겠어?’ 라며 얕잡아봤다가 그 매력에 흠뻑 빠져버린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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