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공상집단 뚱딴지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글_양세라

 

문삼화 연출, 공상집단 뚱딴지의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여주인공 페스티벌에 참가한 공연이다. ‘여주인공 페스티벌’ 참가 공연은 처음 경험하지만, 연극에서 여성의 역할과 이 시대에 미치는 역할이나 사회적 의미에 대한 감각과 메시지를 기대하며 극장을 방문했다(여주인공 페스티벌 안내 참고). 필자가 공연을 보기 위해 물빛극장을 찾은 날은 폭염으로 매우 더운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연극은 원작과 같이 더운 열기로 가득한 여름을 배경으로 한다. 무덥고 숨을 쉬기도 어려운 이 갑갑한 공기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원작과 문삼화 연출 공상집단 뚱딴지 공연에도, 물빛 극장의 현실에서도 존재했다. 숨이 막힐 듯 더운 공기는 이상기후 때문인가, 계절의 탓인가, 베르나르다 알바와 그 집의 견고한 억압 때문일까.

필자는 공연장에서 마주했던 상황, 그리고 원작과 다른 무대연출 감각에 자극받은 바를 이야기해 보려 한다. 물빛극장에서 공연은 공연장 매너와 안내사항 방송을 다소 고압적인 목소리로 베르나르다 알바가 관객들에게 전달하면서 시작했다. 무대의 주인공이 관객을 통제하면서 공연이 시작한 셈이다. 물론 관객들은 이도 즐거운 놀이처럼 받아들였다. 이 역시 자신의 집(극장)을 통제하는 베르나르다의 성격을 재현하는 이번 공연의 무대연출 방식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진 제공: 공상집단 뚱딴지, ©김명집

 

1

로르카는 원작에서 베르나르다의 집을 아치형의 문들이 있는 하얀 방과 두꺼운 벽으로 된 갇힌 공간으로 제시했다. 공연에서 이 하얀 방들은 보랏빛 방과 아치형의 문이 세 층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재현되었다. 객석 바로 앞의 공간에는 주로 딸들의 방을 상징하는 의자가 놓여있고 이곳에서 다섯 딸들의 대화와 욕망과 질투가 관객석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재현되었다. 딸들의 공간 뒤로 아치형의 문으로 구분된 벽 혹은 통로는 다섯 딸과 베르다 알바, 폰시아(하녀)가 서로를 훔쳐보고 엿보고 엿듣는 공간이다. 엄마의 권위와 위선은 폐쇄적이고 견고한 집처럼 갑갑하게 자매들을 억누르는데, 여기에 길들여진 딸들 역시 서로를 감시하는 것이다. 자매와 하녀들, 베르나르다 알바 집 여인들의 이러한 위선적인 관계와 태도는 무대장치에 반영되었다. 공연장에서 마주한 아치형의 세겹의 무대는 다섯 자매와 베르나르다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만들어준다. 통제와 억압보다는 미세한 일상을 통해 서서히 길들여지는 방식은 공연을 통해 아치형의 문 뒤로 세워진 가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엿보고 염탐하며, 서로의 욕망을 수용하지 못하는 자매들의 불안한 관계로 재현되어 이를 관객들은 지켜 볼 수 있었다. 특히 이 집의 규범과 정체성을 따르지 않는 듯 보이지만, 이 딸들의 대화와 행동을 염탐하면서 그들의 일탈을 감시하며, 베르나르다의 권위적 규범과 가치를 내재화한 양가적인 하녀 폰시아가 있다. 본래 원작에는 베르나르다와 폰시아 이외에도 마을 여인들의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태도가 장례식에 이 집을 방문하여 베르나르다와 긴장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문삼화 연출 공연은 협소한 소극장 무대에 맞춰 <베르나르다의 집> 내부 여인들 중심으로 서사를 집약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여인들의 내면을 반영한 무대디자인을 중심으로 강요된 규범에 길들여진 존재들을 공간감각으로 연출하는 데 집중한 것으로 느꼈다.

 

2

본격적인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공연은 검은 상복인 만티아를 쓰고 검은 상복을 차려입은 베르나르다와 그 딸들의 무언의 몸짓으로 시작했다. 이 공연의 주인공인 베르나르다 알바와 다섯 딸들은 기괴하고 스산한 음악에 맞춰 등장하고, 이에 맞춰 점점 푸른 조명이 깔리는 무대에서 어머니 베르나르다의 뒤에서 마치 그녀의 수족처럼 움직였다. 이들의 몸짓은 음악이 빠진 볼레로와 좀비의 기괴함 사이의 감각처럼 느껴졌다. 또 마리오네뜨처럼 느리고 기괴했다. 그들 가운데 서서 울부짖는 베르나르다 알바의 울음이 무대와 극장을 가득 채울 때 기괴함은 공포와 탄식을 오갔다. 베르나르다의 뒤에서 마치 그녀의 수족인 듯 팔과 몸을 움직이던 다섯 딸들의 움직임은 기괴하지만, 어머니의 통제를 받는 모녀들의 가족관계를 재현한 직설적인 연출이라 느꼈다. 딸들은 마치 관절이 꺾인 인형처럼 움직이다 장례식 의상을 상징하는 만티아를 벗고 의자에 앉으며 공연이 시작되었다. 베르나르다와 다섯 딸들의 관계를 상징적인 춤과 몸짓처럼 구상한 이 공연의 서막이었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베르나르다가 딸들에게 아버지의 8년상을 치를 것이니 앞으로 8년 동안은 외부 세계와 어떤 접촉도 하지 말라는 선언을 계기로 다섯 딸들의 욕망이 드러났다.

 

8년 상을 지낼 동안 이 집 안으로 거리의 바람도 들어오지 않을 거야.

문이며 창문들도 벽들로 봉했다는 걸 알아 둬. 우리 아버지, 할머니 집에서도 이렇게 했어.

그동안 너희는 혼숫감에 수나 놓으라고.

궤짝에 20개의 실패를 놓아두었으니 그걸로 침대 시트도 만들고 이불깃도 만들 수 있어.

막델라나는 시트에 수를 놓고.

여기선 내가 명령하는 대로 해야 돼.

이제 너도 네 아버지에게 하소연 할 수 없어.

암컷들에겐 실과 바늘이요, 수컷들에게는 채찍과 노새야. 사람은 그렇게 태어나는 거야.

 

딸들과 베르나르다가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던 첫 등장 장면은 어머니의 권위에 숨어지내던 견고해 보이는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의 허상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인용한 알바의 대사는 마치 극적 상황이 어떻게 연출될지, 그 상황에 놓인 여성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대응할지를 볼 수 있는 극적 장치이자 게임의 구조를 제시하는 듯하다. 이 상황에서 다섯 딸들은 혼숫감을 만들며 관습과 규율 같은 통제 속에서 억눌린 욕망을 자매들끼리 질투와 암투로 서로를 곁눈질하고 감정을 감시하다 끝내 몸싸움까지 한다. 베르나르다의 선언을 듣고 다섯 딸들은 엄마의 집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의 드라마를 재현하기 시작한다. 그녀들의 욕망은 첫째 딸 앙구스티아스의 결혼으로 존재가 부각된 한 남자에게로 집중된다. 페페 엘 로마노, 그는 무대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젊고 잘생긴 외모의 남자라는 사실만으로 엄마의 집에서 벗어나고 싶은 딸들의 이유이자 목적 같지만, 존재하지 않는 허상에 불과하다. 허상을 두고 싸우는 딸들의 행동은 베르나르다 알바(엄마)의 집을 떠나고 싶은 딸들의 욕망을 표출할 뿐이다. 결국 한 남자와 결혼이든 또 다른 방식이든 결국은 수동적인 방식이다.

 

사진 제공: 공상집단 뚱딴지, ©김명집

 

3

베르나르다의 딸들이 자신의 엄마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고자 선택한 방식은 자기배반적 태도로 보인다. 문삼화 연출의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 나오는 여성들은 남자의 눈길을 갈망하는 욕망을 드러낸다. 주변 여인들의 사랑과 결혼, 심지어 강간에 대한 소문에 관심을 보이며, 집 바깥 마을의 소문에 광기에 가까운 눈빛을 번득인다. 큰딸 앙구스티아노와 결혼을 약속한 로마노에 대한 자매들의 관심도 탐욕스러워 보인다.

 

이번 공연에서 자신이 만든 규칙을 어기는 딸들에게는 가차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베르나르다의 거친 행동보다 다섯 자매들의 행동에 주목하게 된다. 특히 장례식을 마친 다섯 자매들에게 음식과 음료를 나누어주는 베르나르다 알바와 아무 말 없이 이를 게걸스럽게 먹는 딸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침묵 속에서 음식을 먹는 소리가 극장을 채울 때 그녀들의 억눌린 욕망이 탐욕처럼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관객석 맨 앞자리에서 펼쳐진 이 장면이 암전처리 되고 동시에 종소리가 울리면, 이들 뒤로 하녀들이 그녀를 비난하는 대화에 조명이 집중된다.

어머니와 두 번의 기도를 마치며, 자매들의 방에서 어머니가 퇴장하면, 이들은 기다린 듯이 검은 겉옷을 벗으며, 흰 잠옷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마치 길들여진 일상의 태도를 걷어내고 자신들의 본 모습을 드러내듯이. 어머니가 떠난 자매들의 방은 폰시아를 중심으로 몰려드는 장면은 하녀 폰시아로부터 그녀를 포함한 마을 여성들의 소문을 듣고 자신들의 욕망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순간, 그녀들이 욕망을 해소하는 것처럼 오해할 뻔 했다.

 

이 집안의 자매들은 그녀들의 어머니 베르나르다의 통제에만 길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폰시아는 알바 이외에도 자매들을 감시하고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녀들의 어머니보다 세세하게 알고 그녀들을 통제한다. 자매들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본 폰시아는 그들을 다그치거나 하나님의 뜻이라며 다섯 자매들을 통제하려고 한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이 조롱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며, 베르나르다처럼 위압적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다, 폰시아는 베르나르다를 비난하고 조소하지만, 그녀와 같은 이 집과 마을의 여인들이 갖는 규범을 목숨처럼 생각하고, 주인 딸들에게 강요하기까지 한다. 자신은 그 규범을 인정하지 않거나 때로 따르지 않음에도 자신과 주변에 적용될 규범을 습득하고 내재화하는 양가적 태도를 보인다. 이처럼 정교하게 통제되는 엄마의 집, 베르나르다의 집에서 친밀했던 폰시아의 태도에 자매들은 어머니에게 보이지 못한 억눌린 욕망을 드러내며 반항하듯이 그녀를 비웃고 자신들의 욕망을 드러내듯 몸부림을 친다. 폰시아를 무시하듯 자매들은 농염한 몸짓으로 무대를 달구며, 통제 불가능한 지경을 연출한다. 잠시 관객도 집중한 감각의 신경을 끊듯이 종소리가 들렸다. 순간 자매들이 기계적으로 행동을 멈추고, 들일을 하러 가는 집 밖의 남자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며, 창문 넘어 들리는 농부들과 어울리는 여인들의 노랫소리가 울려퍼지면, 이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을 동경하는 분위기에 빠져 대화를 나눈다. 원작에서 이 장면은 마치 자매들이 순간 명상에 잠기듯 재현된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 이 장면은 배제되었고 로마노의 등장으로 얽히고 설킨 다섯 딸들의 욕망과 질투로 뒤엉켜 싸우는 장면이 과격하게 재현되었다. 다섯 자매들의 극적 행동을 통해 억압과 통제, 감시가 모녀, 자매, 이웃 사이의 신뢰나 애정보다는 훤히 보이는 인간의 욕망과 탐욕을 어떻게 양육하는지를 보여주었다. 베르나르다는 이런 그녀들을 제지하고 복종을 요구하며 이들을 통제하려 지팡이를 휘둘렀다.

 

사진 제공: 공상집단 뚱딴지, ©김명집

 

4

원작은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돌보는 하녀와 오랜 세월 베르나르다와 지낸 하녀 폰시아를 통해 이 집의 상황을 전달하는 일종의 프롤로그로 시작된다. 그리고 1막 극적 사건은 남편이자 다섯 딸의 아버지인 안토니오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 베르나르다는 200여명의 장례식 손님들과 딸들을 뒤로 이끌며 등장한다. 이 장면은 매우 압도적이다. 장례식의 장엄한 의례와 의식, 그리고 규범에 걸맞는 대화와 대비하여 인간의 존재방식을 보여준다. 그런데 2023 여주인공 페스티벌 참여작인 이 공연은 베르나르다의 집을 돌보는 하녀들의 프롤로그를 배제하였다. 그리고 원작에서 카톨릭식의 장례미사와 성가형식으로 이루어진 조문객인 마을 연인들과 베르나르다의 리듬감 있는 대화 장면도 이번 공연에서 이 장면은 과감히 덜어졌다. 베르나르다가 그녀의 집에서 권위 있는 태도로 하녀들과 그 딸들을 통제할 수 있었던 배경과 이유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

 

필자는 이번 공연에서 무엇보다 다섯 딸들이 규범에 어떻게 길들여지며, 그 결과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보았다. 그래서 규범을 유지하는 권위와 통제, 감시에 길들여지는 인간의 존재방식에 집중된 연출을 따라가 보았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던 막내딸의 자살로 끝나던 원작과 달리 공연은 엄마 베르나르다가 연속으로 총을 쏘고, 자매들의 죽음을 상징하듯 사진액자를 베르나르다가 벽에 걸며 마지막에 자신도 사진 속으로 들어가 마치 그녀들을 죽인 듯이 연출되었다. 귄위와 억압, 위선으로 얽힌 관계를 보여주는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작가 로르카 생전 스페인의 복잡한 사회 안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번 공연은 욕망과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가 살인과 같고 길들여지는 존재와 길들여지는 과정이 마치 죽은 존재와 같다는 인식을 전달받았다.

 

한 사람의 죽음을 추모하는 장례식으로 시작해 또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는 원작과 달리, 살아있어도 규범에 길들여지는 것은 엄마가 자매를 몰살하여 무대를 죽음으로 물들이는 공포와 다르지 않다고 전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이들의 죽음을 사진과 액자로 무대 뒤 벽을 장식하는 베르나르다의 행동은 장르극처럼 더 강렬하게 마지막 장면이었어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문삼화 연출과 공상집단 뚱딴지가 선택한 이번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공연구조에 대한 남는 물음표가 많다. 영매로 분한 폰시아가 몇 대에 걸쳐 베르나르다의 집에서 그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는 설정, 마리아 호세파를 기괴한 망령처럼 연출한 점,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벽에서 울리는 강한 소리를 다른 관객들은 어떻게 감지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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