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임야비(tristan-1@daum.net)
소설가, 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극단 듀공아, 외계 공작소, 동맹, 아레떼 연출부 드라마투르그
오르간 음향 같은 4막 전주곡은 무척 무겁다. 파우스트의 아이를 가진 마르게리테가 천천히 무대 위에 나타나고 마을의 처녀들이 임신한 채로 버림받은 마르게리테를 놀리는 소리가 들린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마르게리테가 Il ne revient pas! (그분은 돌아오지 않아!)를 부르는데, 이는 원작 파우스트의 ‘물레 앞의 그레트헨’과 상응하는 부분이다. 오페라 괴테의 원작을 따라 물레를 소품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오페라 연출가는 슈베르트가 17살 때 작곡한 불멸의 가곡 ‘물레 앞의 그레트헨 Gretchen am Spinnrade (D.118)’과 나란히 비교될 염려 때문에 굳이 무대 위에 물레를 내놓지 않는다. 이어서 장면의 브릿지 역할을 하는 지벨이 잠시 등장한 후, 2장 교회 장면으로 전환된다. 신에게 간절한 구원을 비는 마르게리테와 음탕한 죄를 조롱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그리고 진혼곡을 합창하는 성가대. 괴테의 원작에서 가장 심리적이고 또 환상적인 연출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구노의 음악은 장면의 효과를 살리기에 미흡한 면이 많다. 분열되어 붕괴하는 마르게리테의 노래 Seigneur, daignez permettre (주님, 허락해 주소서)는 곡(曲)이라기보다는 곡(哭)에 가깝다. 위의 ‘물레 앞의 그레트헨’처럼 구노의 4막 2장은 슈베르트의 작은 합창곡 ‘파우스트의 한 장면(D.126)’에 많이 밀린다. 연출가들은 이 점을 포착하여 배우와 합창단의 연기 그리고 장면 연출에 훨씬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데, 지금까지 썩 마음에 드는 연출을 본 적이 없다. 4막 1장과 2장에서 대규모 연주 군단을 거느린 구노는 같은 텍스트에 소규모로 음악을 붙인 슈베르트에게 완패한다. (슈베르트가 음악으로 연출한 두 장면은 TTIS ‘음악으로 듣는 연극’ 2021년 4월호와 12월호를 참조 바란다.)
하지만 구노는 3장에서 대규모 연주 군단의 화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바로 ‘병사들의 합창’이라고도 불리는 대규모 합창곡 Gloire immortelle de nos aïeux(선조들의 영원한 영광)다. 괴테를 몰라도, 구노를 몰라도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굵고 당당한 합창이다. 구노는 길고도 긴 그래드 오페라에 군중 장면으로 화룡정점을 찍는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들의 합창 사이에는 비극의 뇌관인 발렌틴이 끼어 있다. 5장에는 메피스토펠레스가 마르게리테에게 미련이 남아 있지만 책임은 지고 싶지 않은 파우스트를 신랄하게 놀리는 Vous qui faites l’endormie(잠든 척하는 당신 들리지 않나요?; 일명 ‘메피스토펠레스의 세레나데’)를 부른다. 음악은 현악기의 피치카토 위를 깐족거리며 뛰어다니는 악마를 연상시킨다. 메피스토펠레스의 비열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구노의 멋진 음악적 연출이다. 이어지는 6, 7장에서 발렌틴은 파우스트의 칼에 찔려 최후를 맞는다.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가장 큰 장르적 특징은 바로 ‘발레’다. 보통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춘 군무로 연출되는데, 이 발레 장면 삽입으로 공연 시간이 5시간을 훌쩍 넘어가도 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에서는 발레의 인기가 워낙에 높았기 때문에 오페라의 흥행을 위해서 발레 장면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구노 역시 1869년에 오페라의 4막과 5막 사이에 연주할 7곡의 발레 음악을 작곡했다. 그냥 여흥 음악, 막간 음악으로 크게 공들이지 않고 작곡할 수도 있었겠지만, 구노는 종합 예술인 오페라의 연출을 고려하여 막간 발레의 주제를 ‘발푸르기스의 밤’으로 정한다. 구노는 잔뜩 죄를 지은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의 꾐에 넘어가 마녀들과 음탕한 파티를 벌이는 장면을 다양한 춤곡으로 표현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발레 무용수들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았다. 그래서 오페라가 끝나고 분장실로 찾아온 신사 관람객들은 돈과 권력을 한 손에 쥐고 가녀린 처녀들을 창녀처럼 유린했다. 오페라가 끝나고 무용수와 뜨거운 밤을 보낼 생각에 군침을 삼키던 신사들은 구노가 절묘하게 끼워 넣은 ‘발푸르기스의 밤’ 발레를 보고는 아마도 크게 뜨끔했을 것이다.
총 20분가량의 7곡은 관현악적으로도 매우 훌륭해서 별도의 레퍼토리로 자주 연주된다. 이 음악의 가치와 구노의 세심한 연출을 일찌감치 눈치챈 전설적인 안무가 조지 발라신(G. Balachine; 1904~1983)은 1925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이 곡으로 네 번이나 새로운 안무를 만들었다.
대단원인 5막은 간주곡을 경계로 1장과 2장으로 나뉜다. 1장은 발푸르기스 밤을 진탕 즐기던 파우스트가 마르게리테의 환영을 보는 장면이다. 2장에서 급히 감옥으로 날아간 파우스트는 죽어가는 마르게리테와 함께 마지막 이중창 Ah! c’est la voix du bien aimé!(아! 이것은 내 사랑의 목소리!)을 부른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어서 이곳을 떠나자고 종용하고, 파우스트는 마르게리테에게 함께 감옥에서 탈출하자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모습을 보고는 탈출을 포기하고 신에게 온전히 몸을 맡긴다. 마르게리테는 최후의 아리아 Anges purs, anges radieux (순결하고 찬란한 천사여)를 부르고는 쓰러진다. 이어 구원을 알리는 천사들의 합창이 울리면서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괴테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리고 자신의 역작 파우스트를 완벽한 오페라로 만들 유일한 작곡가로 모차르트를 꼽았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괴테의 문학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베토벤은 말년에 파우스트를 원작으로 칸타타 또는 오페라를 작곡하려 했다. 만약 완성했다면 베토벤이 죽은 후 5년 더 살았던 괴테는 늘 탐탁지 않았던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흡족하게 눈을 감았을까? 모두가 ‘가정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후 200년간 수많은 작곡가가 파우스트의 아성에 도전했지만, 원작의 감동에 버금가는 총체적인 음악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그나마 가장 성공한 오페라를 꼽으라면 모두 구노의 ‘파우스트’를 선택할 것이다. 하늘에서 괴테는 원작을 적지 않게 훼손한 프랑스 창작자들에게 어떤 미소를 보냈을까? 대견한 미소일지, 씁쓸한 조소일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언젠가는 모차르트와 베토벤 그리고 구노를 능가하는 작곡가가 나타나 괴테의 원작 연극에 필적할 총체 예술을 만들어 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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