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연출가 변유정

글_김혜정 기자

 

ⓒChadPark

 

반갑습니다, 연출님. <컬렉션> 개막이 코앞으로 다가왔어요. 관객을 만나기 직전인데 소감이 어떠세요?

많이 기대되고 설렙니다. 자신 있다기보다는 어떻게 보실지 궁금해요. 연말이니 만큼 많은 관객분이 찾아주셨으면 좋겠고요, 저 개인적으로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공연이어서 <컬렉션> 잘 마치면서 올해도 잘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이번 작품 <컬렉션>의 소개를 부탁드려요. 작품에 대한 첫 인상은 어떠셨는지도 궁금합니다.

헤롤드 핀터의 작품이에요. 핀터의 작품 중에서도 한국에서 많이 공연되지 않아서 좀 더 자유롭게 우리의 방식대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함께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고전을 봤을 때 정상적이지 않은 인물이 많이 나오잖아요. 살인자, 성범죄자, 심지어 가족을 죽이거나 강간하는 인물이 나오는 작품도 많죠. 그에 비해 이 작품의 네 인물들은 되게 평범해요. 최소 단위의 가족으로서 남남 커플과 한 부부가 나오는데요, 부인이 남편에게 외도를 했다고 고백하고 남편은 그 상대를 찾아가면서, 네 인물이 각자의 진실을 찾는 이야기예요. 처음에 희곡 읽었을 때는 아침드라마인가 싶었어요. 그렇지만 이 흥미로운 소재와 그들이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 속에는 켜켜이 쌓인 속내가 감춰있죠. 남남 커플도 연인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는 않아요. 어떤 것도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어요.

사실 헤롤드 핀터는 부조리극의 대표적인 작가고 워낙 어렵다고 하는 작가잖아요. 제 책장에도 헤롤드 핀터 희곡집이 있는데 잘 꺼내보지 않았더라고요. 어렵다는 생각에 쉽게 손이 안 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에 <컬렉션>을 만나면서 한 생각은, 핀터가 어렵다는 게 나의 경험에 의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말로 인해 나도 모르게 내제되어 있던 말이구나 싶었어요. 부조리극이 어렵다고 하지만 현실을 생각하면 그렇게 이해가 어렵지 않거든요. 현실이 더 부조리하잖아요. 그러니 내 판단이 아닌, 어렵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진실과 거짓, 왜곡과 확증편향을 주제로 다루는 작품이더라고요. 지금의 시기에 연출님은 이 주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가요?

60여 년 전에 쓰인 희곡이지만 지금의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요. 2023년에는 더욱 거짓과 진실이 뒤섞여서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나타나잖아요. 가짜뉴스라는 단어가 생긴 지도 얼마 안 됐거든요. 그렇지만 우리는 가짜뉴스 속에서, 그리고 흑 아니면 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시대지만 이 정보를 다 못 믿겠어요. 계속해서 진실을 찾으려고 감각을 뻗어야 하니까 너무 피곤한 일이죠. 믿음이 상실된 시대인 것 같아요. <컬렉션>에서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진실과 사실은 다르다는 측면에서 현실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요. 그런 점에서 지금과 꼭 맞닿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ChadPark

 

말씀하신 것처럼 부조리극의 대표적인 작가 헤롤드 핀터의 작품인데요. 연출님의 이전 작 <전명출평전>이나 <그날, 그날에>와는 다른 결의 작품이라 <컬렉션>은 또 어떻게 연출님의 스타일로 풀어갈지 궁금해집니다.

많이 해보지 않은 작품이라 새롭고 재미있었어요. 기존에는 결론지어진 인물에 밀착해서 스토리가 마무리되는 작품들을 주로 했다면 <컬렉션>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생각이 돌고 배우의 감각도 계속 움직이는 작품이에요. 그런 감각의 코드, 행동의 코드들이 작품 전반에 숨겨있죠. 제가 이 작품에서 집중한 두 가지는 주어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과 침묵을 다루는 방식이에요. 주어를 말한다는 건 책임지는 거잖아요. 이 작품에서 주어를 말하는 때는 확신이 있거나 순간을 벗어나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위치를 유리한 곳으로 올리기 위해서뿐이고 보통은 주어 없이 말해요. 또 침묵하는 순간이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주도권을 갖고자 하는 사람은 침묵해요. 그럼 상대방은 이 사람이 어떤 문제가 있나 살피고 생각하게 되죠. 집에서 아버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눈치를 살피는 것과 같아요. 만약 제가 지금 아무 말도 안 한다면 기자님도 뭔가 불편한 게 있나, 기분이 안 좋나 생각하게 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괜찮은지 묻거나 다른 이야기를 꺼내는 식으로 말이죠. 침묵은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에요. 연극성 있는 그 깊은 침묵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희곡 안의 부호에도 집중하게 됐어요. 원문에 있는 사이, 말줄임표, 쉼표 같은 부호를 다 살려 넣었고, 그것들이 연기화 됐을 때의 표현에도 신경을 많이 썼어요.

 

이전에 만나보지 않은 스타일의 작품과 작가인데 더구나 서울시극단에서의 작업도 이번이 처음이셨죠. 연출님에게 여러모로 도전인 작품이었을 것 같은데 그 과정은 어떠셨나요?

말씀처럼 작가도 그렇고 배우들과 서울시극단 시스템도 저한테는 이전에 만나보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였어요. 작업 들어가기 전에 배우님들의 작품을 먼저 가서 봤고, 연습 들어가면서는 대화를 많이 하면서 서로 알아가는 과정을 충분히 가지려고 했어요. 연습실 환경도 좋아서 집중하는 연습 분위기가 잘 만들어졌던 것 같고요. 그리고 극장에 능력 있는 상주 스태프 분들이 계세요. 작품이 누구 한 사람의 색깔로만 가는 게 아닌데 역시 배우, 스태프분들이 경력도 많고 노련미가 있어서 협업이 잘 이루어진 것 같아요.

 

ⓒChadPark

 

인터뷰가 공개될 쯤에는 이미 개막을 했을 텐데요. 미리 약간의 스포일러나 관극 포인트를 부탁드립니다.

무대에는 저택과 아파트, 두 채의 집이 양쪽에 있어요. 무대나 의상에 1960년대 색감, 질감을 쓰려고 노력해서 그런 부분도 찾아보면 흥미로우실 것 같고요. 그리고 왜 집일까를 생각해보면, 가장 최소단위인 가정에서도 권력이 있고 서로 간의 우선순위가 있잖아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인데 그 사랑 때문에 상대를 힘들게 하기도 하고 속내를 알 수 없는 말이나 행동도 하게 되죠. 무대 위에 네 명의 인물이 다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나와 같은 속성이 있어요. 무대에서 나와 닮은 어떤 모습들을 발견하는 것도 하나의 관극 요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연출로서 무대의 공간과 빈 공간에 대해 가장 많이 고민하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이번 무대에는 연출님의 어떤 의도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이번 공연은 제 공연 중에 가장 많이 채워져 있는 무대예요. 무대가 더 컸으면 더 채웠을 것 같아요.(웃음) 제목이 ‘컬렉션’이라 표면적으로 봤을 때는 두 컬렉터가 컬렉션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컬렉션이거든요. 컬렉션이라는 건 자기 분수보다 많은 걸 수집하는 거잖아요. 여러분도 집에 가장 많은 게 뭔지 찾아보면 내가 누군지 알게 돼요. 그게 내가 가장 몰두한 거기 때문이죠. 무대 위에 있는 다양한 것들이 왜 거기 있는지, 관객 분들도 숨은 의미를 찾아보시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컬렉션>2023년 서울시극단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고 시극단 단원들로만 공연하는 첫 작품인 만큼 관객의 기대도 높은 것 같습니다. 관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요즘 날씨가 많이 춥지만 <컬렉션>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시는 건 어떠신가요? 극장에서 뵐 수 있길 바랍니다.(웃음)

 

ⓒChadPark

 

저 역시 기대하겠습니다.(웃음) 개인적인 질문으로, 연출님은 한동안 고향인 강원도 춘천에서 활동해오셨는데요. 최근에는 예술의전당, 정동극장, 세종문화회관까지 다시 서울에서의 활동이 더 활발하신 것 같아요. 이런 활동 영역의 변화에는 어떤 의도가 있으신 건가요?

의도가 있던 건 아니고요. 강원도에서 했던 <그날, 그날에>가 주목을 받으면서 감사하게도 서울에서 선보일 기회가 있었어요. 그러면서 서울에서 불러주시는 계기가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강원도의 우리 배우들과 제작진분들에게, 같이 해주신 덕분에 다른 작업을 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 것 같다고 감사를 꼭 전하고 싶고요. 개인적으로는 <그날, 그날에>처럼 지역색 강한 작품이 서울에서 길게 공연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그 작품을 하면서 실향민이 가장 많은 지역이 서울이라는 걸 알게 됐거든요. 지역색 강한 작품이 서울에서 공연되면 많은 실향민이 고향 이야기에 반가워하거나 몰랐던 다른 지역의 이야기도 서로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날, 그날에>는 연출님 인터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죠. 연출님에게 어떤 작품이었는지 간단히 들어볼까요?

중요하고 감사한 작품이죠. <그날, 그날에>는 희곡 존중, 작가 존중을 최고의 목표점으로 두고 작업했던 작품입니다. 돌아가신 이반 선생님의 추모를 위한 공연으로 출발했고, 그러기에 희곡에서 단 하나의 대사도 빠뜨림 없이, 또한 지문에도 충실하며 무대를 만들고자 노력했어요. 문학인 희곡이 무대화 되면서 변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이 많은데 이를 최소화하며 작품을 만들었죠. 저부터도 작품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거침없이 각색하고 편하게 말 바꾸기와 상황 바꾸기를 당연하듯 해왔더라고요. 그것이 어쩌면 나 편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한 중요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작품에서도 작가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죠.

 

연출님은 초중고 연극반을 거쳐 고등학교 졸업 후에 바로 극단 생활을 시작해서, 인생의 대부분을 연극인으로 지내고 계세요. 연출님에게 연극은 어떤 의미인가요?

연극 덕분에 재미있게 살고 있어요. 보는 것도 재미있고 하는 것도 재미있거든요. 연극은 계속해서 나에게 새로운 발견을 하게 해요. 연극이라는 게 의도대로 안 나올 수도 있고 안 좋은 평을 들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지만 어쨌든 많은 사람이 어떤 하나를 위해 간다는 거, 같은 마음을 갖고 같이 간다는 게 큰 힘이 돼요. 힘들었던 작품은 다음을 위한 교훈이 되기도 하고요. 해볼 만한 삶인 것 같습니다.(웃음) 저는 미래를 계획하고 살지 않는 편인데, 다가오는 일에 충실하면서 살다 보니 지금에 온 것 같아요. 좋은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ChadPark

 

질문의 연장선으로, 올해는 연출 데뷔 15주년이자 연극인으로서의 30년을 맞이하는 해더라고요.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바람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30년이 됐더라고요. 특별한 바람은 없고 좋은 작업 계속 하고 싶어요. 좋은 작업이라는 건 그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외부에서 절 보면 큰 극장에서 공연하고 활발히 활동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다음 작업은 어떤 것일지 알 수 없어요. 어쩌면 아이들에게 동화책 읽어줄지도 모르죠. 연극은 그때그때 주어진 작품에 정성을 다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정성을 쏟은 작품을 많은 분이 봐주시면 좋겠고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건 가르친다는 게 아니라, 누군가 의미를 찾는다면 그것도 좋고, 또 누군가 공연 보는 동안 즐거웠으면 그것도 좋아요. 더구나 지금은 연극 생태계가 너무 열악하잖아요.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 않고는 자립적으로 연극하기 어려운 세상인데, 국가 재원이 쓰이는 거라면 좀 더 영향력 있는 작품을 하면 좋겠다, 그런 바람이에요. 그런 면에서 더 폭넓은 관점에서는 아티스트에 대한 지원이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물리적인 연습의 양이 부족하다는 건 작품의 질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일인데, 이걸 개인의 먹고사는 문제라고 치부할 수 있나 싶어요. 배우 개인이 아니라 연극계 전체, 우리 사회 전체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문화’‘체육’‘관광’이 다 나눠지는 것부터 이뤄져야 할 것 같아요.

 

이번 인터뷰가 12월호에 실릴 예정인데요, 연말 인사를 포함해서 끝으로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려요.

올해 너무나 많은 거짓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고 모두 고생하셨을 텐데요, 따뜻한 연말 맞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연말에 <컬렉션>이 한 자리 같이할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아요.(웃음)

 

ⓒChadPark

 

 


  • 서울시극단 <컬렉션>은 12월 1일부터 10일까지 세종S씨어터에서 공연한다.
  • 서울시극단 02-399-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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