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강훈구 <클뤼타임네스트라>

글_하형주(연극평론가, 청운대학교)

 

강훈구 작, 연출인 <클뤼타임네스트라>(연희예술극장, 01.02~01.12)는 그리스 비극의 아버지 아이스퀼로스(Aischylos, B.C.525/4 ~ B.C.456/5)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 중 하나인 『아가멤논』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된 작품이다.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에서 클뤼타임네스트라는 10년간의 트로이 전쟁을 이기고 카산드라와 함께 돌아온 아가멤논을, 아이기스토스의 유혹에 넘어가 아가멤논을 도끼로 살해한다. 아이스퀼로스는 이 작품에서 호메로스의 『오뒤세이아』에서 나타나는 신화적 내용과는 달리, 아이기스토스가 아닌 클뤼타임네스트라가 직접 남편, 아가멤논을 살해하게 하면서 그녀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엄마를 죽인 후 갖게 되는 새로운 윤리적 정의(Dike)를 그려냈다는 점에서 그 탁월한 독창성을 인정받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아이스퀼로스는 당시 기원전 5세기의 관습적 사상인 기계적 행·불행을 거부하며 인간의 자발적 절제만이 인간을 아테(Até, 미망)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피력하고 있다. 따라서 신적 섭리인 타자성에 대해 “고통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라는 『아가멤논』의 등장가에 나타나 있는 아이스퀼로스의 사상은 자연스럽게 그의 세계관, 즉 인간은 이성을 통해 신적 섭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세계관으로까지 확장된다. 물론, “고통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는 이 문장은, 1세기 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6장 비극의 정의에 큰 영향을 준다. 하지만, 인간 이성에 대한 순진한 믿음에 대한 아이스퀼로스의 세계관은 그의 제자 소포클레스에 의해 반박되는데, 말하자면, 소포클레스는 인간 이성으로 어쩔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 존재함을 인식하며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식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두 가지 세계관은 강훈구 작, 연출의 <클뤼타임네스트라>에 공존한다.

 

 

 

놀이로서의 극장

연희예술극장을 들어가면, 소파가 있어 관객들이 매표소 옆의 냉장고에서 맥주와 같은 음료수를 사서 마실 수 있

 

는 공간이 마련되어있어 극장이 자연스럽게 즐거운 만남의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게 한다. 극장으로 들어가 정면으로 보이는 소파들의 우측 옆이 극장이다. 이 극장 무대는 사실상 빈 무대로서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 복층 구조의 무대가 1층 무대 뒷면위에 위치하고, 1층 무대 역시 관객의 의자를 통해 단지 분리되어있을 뿐이다. 그래서 공연은 오롯이 배우의 힘으로 진행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작품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아이스퀼로스에 의해 비극의 전형적 인물로 설정된 클뤼타임네스트라가, 연출가 강훈구에 의해 어떻게 변형되었는지 간단하게 작품의 줄거리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작품은 서울 외곽에 있는 한 예술고등학교의 극작과 3학년 전태주라는 학생이 공연의 나레이터로서 극을 끌고가는 역할을 하며 서사적 형식을 취한다. 1층에서 춤을 추며 등장한 태주에 의해 소개되는 등장인물들, 기영, 기문, 기영의 딸 다현은 주로 복층 무대 위에서 등장해 자신들을 소개하고 퇴장하며, 아직 공연이 시작되지 않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복층무대가 가지는 시각적 높이는, 공연에서 기영이 등장할 때마다 대부분 복층 무대에서 내려온다는 점에서 그녀가 승원과 기문에게 가지는 지배적 힘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기영의 딸 다현이가 무용과 학생이고 연기를 할 줄 모름에도 불구하고, 청소년 연극제에 참여하겠다고 할 때, 엄마 기영에 의해 주인공, 클뤼타임네스트라 역을 맡게 된다는 점에서도 그 지배력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나레이터이자 등장인물인 태주는 자신이 <클뤼타임네스트라>라는 희곡을 쓰고 있으며, 이 작품의 주인공은 예술고등학교 이사장의 조카인 기문의 아내이자 연극배우인, 승원임을 설명한다. 그래서 실제 공연대본의 제목은 바로 “전태주 희곡, 클뤼타임네스트라”로 되어있다.

이 작품에서, 승원은 3년 전 아들의 죽음 후, 남편 기문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버리고, 혼자 남아 시삼촌이 이사장으로 있는 예술고등학교에 연기과 기간제 교사로 재직 중이다. 그녀는 아들의 죽음 후 힘든 상황에서 남편 기문이 혼자 유학을 떠나고 3년 동안 홀로 집에서 고통스럽게 지낸다. 이러한 그녀의 상황은, 원작, 『아가멤논』에서 아이기스토스와 동거하고 있었던 클뤼타임네스트라가 거짓으로 코러스들 앞에서 연기하며 하는 대사, “남편이 트로이에 가 계셨던 동안 내가 얼마나 쓸쓸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여자의 몸으로 남편과 떨어져/ 홀로 쓸쓸히 집에 들어앉아 있는 것은 말할 수 없이 힘든 일이지요”라는 대사를 통해, 사실상, 승원이 아들의 죽음과 자신의 전 남편의 죽음 이 모든 힘든 상황을 오롯이 남편 기문의 탓으로 돌리며 자기 연민에 빠져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 모든 외롭고 힘든 상황을 남편의 탓으로 돌리는 승원은, 자연스럽게 발칙한 고등학생 태주에 의해 발가벗겨질 토대를 마련한다.

 

 

재창작된 클뤼타임네스트라

공연은 기문이 유학에서 돌아와 대학교에 교수로 임명되고 난 시간부터 시작된다. 승원은 이 사실을 시누이인 기영을 통해 알게 되지만 전혀 기뻐하지 않는다. 비록 남편 기문이 미국유학의 당위성을 기문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부인 승원과의 삶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승원은 그것이 남편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위한 것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이러한 사실은 기문이 졸업공연으로 올린 <나의 아가, 아가멤논>에서 코러스가 좌·우 각각 24명으로 배우가 총 51명이라고 한말이, 기문이 전화상담자, 제니와 통화하는 과정에서 지원하는 배우가 없을까 두려워 일인극으로 했다는 말을 통해 거짓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일정부분 그러하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불행의 원인을 남편 탓으로 돌린 승원이기에, 남편 기문의 상황이 전혀 기쁘지 않다. 또한 자신의 실제적 문제를 깨닫지 못하는 승원의 상황은, 공연 내내 승원이 지속적인 편두통을 호소하고 있는 과정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형상화된다.

남편의 귀국 후 교수가 되었다는 말을 들은 승원은 그녀 역시 배우로서 연기를 하겠다고 고등학교 기간제 교사를 관두겠다고 시누이 기영에게 말한 후 학교에서 자신의 짐을 정리한다. 이때 태주는 승원의 욕망, 즉 그녀가 배우로서 인정받고 사랑받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알고, 그녀의 욕망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해, 승원이 청소년 연극제를 위한 <아가멤논> 지도교수를 수락하게 한다. 이 ‘발칙한’ 극작가 지망생인 고등학생 태주는 승원의 욕망을, “이기문 연출 연극에선 사람은 안 보이고 주의주장만 있잖아요. 그러니까 배우가 안보여요 선생님 같은 훌륭한 배우가 그림으로 존재한다고요”라고 말하며 그녀의 배우로서의 자존감을 부추긴다.

하지만 승원을 부추기던 태주는, 자신과 승원, 두 사람의 포옹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며 승원을 궁지로 몰아가면서 그녀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순간을 열어놓는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학교 공연은 취소되는데, 그럼에도 승원은 텅빈 객석의 무대에 나가 자신의 역할,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연기한다. 이 발칙한 고등학생 태주는, 승원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냐고 질문하자, 작가로서 자신은 자기 작품의 주인공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연극을 할 뿐이라고 말하며 그녀에게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집으로 돌아온 승원은 남편 기문의 전화통화를 들으며, 승원이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기문에게 돌렸던 상황으로부터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는다. 이런 맥락에서, 공연에서 태주의 역할은 어쩌면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처럼, 승원의 불행의 원인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어리석음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그녀에게 타자성을 열어놓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단순히 일차적 줄거리인 승원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남편 기문의 핸드폰을 통해 흘러나온 12. 3 비상계엄에 관한 뉴스와 그의 대사들, 2016년 박근혜 탄핵 사건 당시 광화문광장에서의 만남과 공연이 배경처럼 깔리며, 12. 3 비상계엄 사건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며 모든 문제를 남편의 탓으로 돌린 승원처럼, 한국의 정치적 상황의 이면 역시 관객들에게 통찰해보게 하는 이중적 구조를 띠고 있다. 이러한 부분은 태주가 승원에게 기문의 연출이 “주의주장”만 있다고 말하는 과정에서 예술로서의 연극이 예술보다 정치가 되는 지점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이 작품에서 현재 한국의 엄중한 정치적 상황에 대해 직접적 표현이 아닌 간접적으로 관객 스스로 보도록 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기문이 우리 사회가 겪었고, 그리고 겪는 두 대통령의 탄핵사건들을 단순히 운명으로 치부해버린다는 점에선, 인간을 파국으로 끌고가는 것이 결국 인간의 어리석음이라는 사실은 간과되어있다는 점에서 기문 역시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의 부재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아들의 죽음 후 힘든 상황에서 현실로부터 도피해 유학을 떠난 그의 행동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어쩌면 이 점이 공연의 말미에 승원이 남편에게, 도끼를 허공에 내리치면서 남편에게 아가멤논 역할을 하게 한 이유이며, 현실을 도피해버리는 기문에게 가해진 제의적 죽음일 것이다.

강훈구 작, 연출에 의해 새로이 재창작된 작품, <클뤼타임네스트라>에서, 연출가는 공연 시작에서 태주의 나레이션으로, 그리고 공연 중간에서 지나치게 열정적인 태주의 대사를 코믹하게 처리하거나, 승원이 태주에게 자신을 설명할 때 신파적으로 대사를 하게 하면서, 관객들에게 인물에 대한 몰입을 차단시키며 승원의 자기연민과 자신의 합리화를 객관화시키며 바라보게 함을 알 수 있다. 결국,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에서 클뤼타임네스트라가 코러스장에게 남편 살해에 대한 자기 합리화를 주장하며 행한 미망은, 그리고 아가멤논이 전쟁을 위해 딸, 이휘게네이아를 희생시키며 시민들을 전쟁으로 몰고 간 미망은, 강훈구 연출의 <클뤼타임네스트라>에서 인간이 얼마나 자기 합리화에 익숙한지, 그래서 자신의 실체를 보지 못하는 무지를 행하는지를 때로는 코믹하게, 때로는 다른 대사들의 삽입을 통해 관객에게 미학적 거리를 만들어주며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는 단순히 모든 신적섭리를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순진한 아이스퀼로스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이성을 가진 인간의 부조리함 역시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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