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황승경(연극평론가)
고선웅이라는 이름 앞에는 언제나 ‘스타 연출가’라는 수식이 따라붙는다. 그가 14년 만에 내놓은 창작극 <유령>은 기대를 모았지만, 관람 후의 인상은 복잡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죽음을 다루면서도 살아 있고, 비극을 말하면서도 가볍다. 현실을 묘사하면서도 비현실적이며, 그래서 오히려 당혹스럽다.

파편화된 서사, 메타연극의 양날
극의 중심 인물은 배명순이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 도피한 그녀는 ‘정순임’이라는 새 이름으로 찜질방, 식당, 일용직을 전전하며 사회의 가장자리를 떠돈다. 신분을 잃은 채 병으로 죽음을 맞이한 뒤에도 그녀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유령이 된 그녀는 시신 안치실에서 다른 무연고 유령들과 만난다. 있으나 없는 존재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겉으로 보기엔 개인 서사에 기반한 전통적 구성처럼 보이지만, 고선웅은 메타연극적 장치를 통해 이 서사를 끊임없이 분절한다. 관객의 몰입은 의도적으로 차단되고, 대신 배우들은 인물과 배우 자신 사이를 오가며 극의 장벽을 허문다. 배명순의 남편 역을 맡은 배우가 대사 도중 “이 대사 나도 싫다”고 토로하고, 배명순 역 배우는 자신의 연극 복귀 소감을 무대 위에서 솔직히 밝힌다.
이러한 연출은 연극이라는 매체의 자의식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서사의 응집력을 해친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이 지닌 거리두기 효과는 관객으로 하여금 무대와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변증법적으로 성찰하도록 유도하지만, <유령>의 메타연극은 오히려 관객의 변증적 사고를 방해하고 관람 행위를 가벼운 유희로 치환한다. 고선웅 스스로 “너무 가벼워서 죄의식이 느껴질 정도”라 했듯, 주제 의식은 실험적 장치에 가려 힘을 잃는다.
셰익스피어의 극중극이 내면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수단으로 기능했다면, <유령>의 극중극은 무연고자의 현실을 추상적 이미지로 희석하는 데 그친다. 삶과 죽음, 사회적 소외라는 첨예한 문제가 실험적 장치의 배경음처럼 흐르며, 문제의 본질은 끝내 구체적 서사로 수렴되지 않는다.

귀여운 유령, 해체된 공간
무대 구성은 이중적이다.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블랙박스 공간은 공연 무대, 분장실, 시체 안치실로 나뉜다. 메탈릭 실버색의 냉동고와 바닥을 덮은 큐브들은 차갑고 비인간적인 분위기를 형성하지만, 동시에 추상적 상징물처럼 읽힌다.
유령들의 복장은 더욱 이질적이다. 통통하고 귀여운 오뚝이 형상의 텔레토비 스타일 유령들은 공포보다는 해학적 유희를 자아낸다. 무연고자라는 사회적 비극이 귀여움으로 중화되는 순간, 관객의 감정은 불편함 대신 가벼운 연민으로 이동한다.
삽입 음악 역시 장르적 혼란을 가중시킨다. 7080 가요, 팝송, 영화 OST, 뮤지컬 넘버 등이 무대 상황과 엇갈리며 불협화음을 만들지만, 이 역시 현실의 부조리를 은유하는 장치로 읽힌다. 고선웅 연출은 “그렇게 보면 그렇게, 저렇게 보면 저렇게 보인다”고 말하지만, 이 상대화는 문제의식을 흐리고 책임의식을 희석시키는 위험을 내포한다.

국공립극단의 실험성과 공공성의 긴장
서울시극단은 국공립극단으로서 단순한 실험 이상의 공공적 책무를 가진다. 무연고자라는 소재를 차용하면서도 구조적 원인이나 대안 제시가 부재한 <유령>은 이 지점에서 상당히 아쉽다. 사회적 약자의 고통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다. 공공극단의 실험적 장치는 오히려 그 책임성을 상대화하며 근본적 질문을 낳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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