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정애란(연극평론가)
2025년 대선이 끝난 지 이틀 뒤, 6월 5일, 김현탁 연출, 성북동비둘기의 <호러이쇼 Horror Is Show>가 무대에 올랐다. 2024년 12월 3일 계엄선포부터 2025년 6월 3일 조기대선까지, 대한민국을 질식시켰던 저항과 인내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무대 위에 투영되었다. 누군가는 이 격동의 시대에 연극계가 너무 조용한 것 아니냐며 꼬집기도 했지만, 12명의 젊은 배우와 1명의 장년 배우가 외치는 <호러이쇼>의 절규는 그래서 더욱 소중했다. 세대와 젠더를 의식적으로 배치한 무대는, 대한민국을 이분하려는 정치 세력에 대한 조롱이자, 우리 내면의 이분법에 던지는 역설적 질문이었다.
때로는 장면들이 너무 노골적인가 잠시 고민도 했지만, 결국 우리의 현실이 연극보다 더 믿기 어려운 블랙코미디임을 깨닫게 된다. 가짜뉴스가 ‘표현의 자유’로 둔갑하고, 폭력이 ‘영웅’의 이름으로 미화되는 작금의 한반도에서, <호러이쇼>는 예술적 은유로 포장할 여유조차 없는 급박한 시대를 무대에 담아내며 한국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한다. 배우들의 강렬한 몸짓과 목소리에서 연극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응시해야 하는지, 성북동비둘기의 방식을 생생히 목도할 수 있었다.

만약 조기대선의 투표 결과가 달랐다면, 이 공연이 무사히 올라갈 수 있었을까? 걱정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첫 장면의 비둘기들처럼, 나 역시 얼마나 쉽게 폭력에 길들여질 수 있는지 흠칫 놀란다. 한 번 하늘을 날아본 새는 땅 위를 걸으면서도 하늘을 꿈꾸듯, 민주주의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권력의 노예로 되돌아갈 수 없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를 각인시키기 위해,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딱! 소리 내며 튕기듯, <호러이쇼>의 배우들은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온몸으로 외치는 듯 했다.
빈 무대, 검은 연습복, 최소한의 의상과 소품. 조명은 어둡고 검다. 첫 장면은 실험실, 비둘기들이 실험용으로 쓰인다. 햄릿 비둘기, 오필리어 비둘기, 그리고 더 많은 비둘기들이 먹이의 매커니즘을 학습해 계속 제자리를 돌며 먹이를 얻는다. 모두가 돌고 돈다. 세상도 돌고 돈다. 이 사이를 뚫고 햄릿 비둘기가 나오며 새의 가면이 벗겨지고 무릎을 꿇자, 무대는 교회 청년반으로 변신한다. 신심을 다한 간증은 떨리는 찬송가로 이어지는데, 노래는 이문세 원곡의 <붉은 노을>이다. 느리고 장엄한 성령의 노래 <붉은 노을>은 어느새 선거 캠페인송으로 둔갑해, 모두가 기호 2번 맥아더를 찬양한다. 선글라스 쓴 맥아더가 청년들 뒤로 책상 위에 올라서자, 전광훈이 떠오르며 ‘태극기집회’의 김문수가 겹쳐진다. ‘퍼주고서 손해보지’를 외치는 영어 강사는 전한길과 한 몸처럼 보인다.

일제치하 유관순을 비롯한 젊은 여성들은 감옥에 잡혀 들어가서도 폭력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다. 여성들의 피맺힌 눈빛이 무대를 울릴 때, 오늘날 20-30대 여성들의 당찬 싸움이 오버랩되며 울컥하기도 한다. 해병대 채상병 사망 사건은 오필리아의 죽음과 병치된다. 영국의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린 <오필리아> 그림과 채상병 실종 지역 사진들이 나란히 전시된다. 죽음의 크로스 젠더가 매우 기묘하다. 오필리아는 사랑과 상실, 사회적, 성적 억압의 결과로 희생당한 상징이라면, 채상병은 국가와 조직, 명령에 의해 희생당한 병사이다. 두 죽음은 ‘물’이라는 자연적 공간에서 벌어졌고, ‘세월호’까지 연상되며, 이 땅에서 반복되는 ‘희생의 구조’와 ‘책임의 부재’를 묻는 듯 했다.
<호러이쇼>라는 제목은 <햄릿>의 신실한 벗이자 유일한 목격자 ‘호레이쇼’에서 파생되었다. ‘호러(공포)’와 ‘쇼’를 결합한 언어유희이자, 과거의 유령과 이데올로기로 선동하는 세력들에게 보내는, ‘끝까지 지켜보고 있다’는 경고와 같다. 마치 헌법재판소 앞에서 은색 담요를 두르고 밤을 새우던 ‘키세스 시위대’처럼. <호러이쇼> 포스터의 키세스 초콜릿은 이러한 은유를 시각화한다.

윤석열 정부에서 발생한 사건들, 12.3 계엄, 6.3 조기대선까지 몽타주로 엮인 <호러이쇼>는 배우들의 밀도 있는 연기 속에 노래와 함께 리드미컬하게 펼쳐진다. 예술이 만들어내는 감각적 경험의 분배 자체가 이미 정치적이라고 선언한 자크 랑시에르를 소환하지 않더라도, 예술은 사회 변혁의 기류를 진단하고 민심의 증상들을 포착한다고 믿는다. <호러이쇼>는 발빠른 사회풍자극이자 정치풍자극으로, 한강 작가의 질문을 ‘연극’으로 치환해 우리에게 되묻고 있는가: 연극이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연극이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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