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미> (극단인어 최원석 작연출)
윤서현(연극평론가)
한 몸
통신서비스 불가지역에 위치한 펜션 ‘침묵의 집’은 음악을 전공한 최명광 교수 소유로 그가 종종 가족들과 휴일을 즐기는 곳이다. 이곳의 관리는 최교수의 군대 후임이었던 김철수와 그 부인 정애란이 맡고 있다. 딸 승연의 유학 송별회를 위해 펜션을 찾은 최교수와 부인 강순옥은 갑작스레 승연의 약혼자 성필을 소개받게 된다. 나이 많은 시간강사인 그를 딸의 배필로 인정할 수 없는 최교수 부부는 점차 언성을 높이게 되고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성필이 지병인 천식 발작으로 목숨을 잃게 되자, 그 책임을 승연을 흠모해온 관리인 부부의 아들 하늘의 과실로 떠넘기려 한다. 펜션에 도착해 자초지종을 듣게 된 관리인 김철수는 최교수의 금전적 제안을 받아들여 조금 어눌한 아들 하늘을 폭력으로 입막음한다. 곧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술자리가 벌어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술 취한 정애란이 억하심정이 발동하여 최명광 교수의 머리를 술병으로 내리치고, 이를 기점으로 무대는 쫒고 쫒기는 광기의 난장판이 된다. 천둥이 치고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무대는 포도주인지 피인지 모를 액체로 점차 흥건해진다.
이 파국적 사건 전개 속에서, 갑을 관계로 교집합이라곤 없어 보였던 두 집안이 실상은 폭력과 위선으로 입막음된 공동운명체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적당히 값을 치름으로써 번거로운 일들을 피해온 최교수와 그가 치른 값으로 연명하며 모든 추잡한 일들을 해결해온 김철수는 한 몸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들의 협력과 공존이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측면을 상기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체의 분위기가 사회극보다는 그로테스크 우화극으로 연출되었다는 점이다. 변덕스러운 날씨와 히스테리컬한 논쟁, 과장된 어눌함과 가면 같은 점잖음은 외양적으로나 말투로나 웃음을 자아내던 성필이 불운의 죽음을 맞이한 이후 집단적 광기로 이어진다. 세련된 언어보다는 투박한 언어의 삐걱거림에 날 냄새 나는 대사들이 매 장면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하늘이 어린 시절 승연과 함께 엄마아빠 놀이를 했다는 동굴이 성필이 최교수의 부인과, 아니면 최교수가 김철수의 부인과, 아니면 최교수의 부인과 김철수가 정사를 나누었을지 모를 장소로 지목되면서 두 집안의 얽히고설킨 관계가 폭로되면서 이 괴기스러움은 극대화된다.
그리고 유산(遺産)
승연과 하늘은 부모 세대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인물들로 그려진다. 어딘가 모자란 듯 보이는 하늘은 폭력성 강한 부친의 존재로 인해 피해자처럼 보이지만 그 가정교육(?)의 결과로 폭력을 일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된 가장 위험한 인물이기도 하다. 작품 초반에 잘 드러나 있듯 하늘에게 폭력이란 이미 소통 방식의 하나처럼 보인다. 승연은 작품의 초반부에는 부모의 뜻에 반항하는 인물로 성필과의 사랑을 주장하고 아버지인 최교수의 도덕성에 질문을 던지기도 하는 주도적인 인물이었지만, 정신적 지주인 성필의 죽음이 기정사실화되고 연이어 성필과 자신의 모친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전의를 상실한다. 그녀는 약혼자의 시신이 다른 이들에게 발각될까봐 그 누구보다도 더 노심초사이며 더 나아가 작품의 피날레에서는 무대 위에 쓰러진 이들의 시신을 테이블이나 수초 등으로 가려보려 악을 쓰게 된다. 혼자의 몸으로는 시신들 모두를 숨길 수 없는 그녀에게 절실한 것은 ‘팔씨름 대장’ 하늘의 힘이다. 마치 그 언젠가 최교수가 김철수의 힘을 필요로 했듯이. 이러한 의미에서 비와 피로 온몸이 젖은 승연이 하늘에게 발작처럼 “나랑 결혼할래?”를 외치는 피날레는 최교수와 김철수의 계약이 그들 세대의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고 승연과 하늘에게로 고스란히 연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둘의 결합은 작품의 첫 부분에 김철수 부부의 부업으로 등장했던 결혼식 하객 아르바이트를 상기시킨다. 모든 것이 거짓이었던 그 결혼식처럼 승연과 하늘의 결합은 은폐 위에 서 있다. 무대의 천장을 덮은 채 공연 내내 묵묵히 허공에 떠있던 사각 테 모양의 거대한 구조물은 ‘침묵의 집’의 공고함, 그 저주 같은 유산의 힘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