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극단, <옥상 위 카우보이> 리뷰
배선애(연극평론가)
어른이 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무엇을 기준으로 어른이다 아니다를 판단하는 것일까? 어른이면 뭐가 다른 걸까? 어른의 기준인 20세는 누가 정한 걸까? 20세 어른이 되기 하루 전과 후는 과연 다른가? 어른은 뭘 하는 존재일까? 질문에 질문이 끝도 없이 꼬리를 물었다. ‘어른’에 대해 고민을 시작해보니 필자는 이미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인정한 어른이 한참이 지났음에도 어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걸 알았다. 어른이 아닐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고, 어른이 되니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게 솔직한 답일 것이다. 이렇게 뒤늦게, 곧 노년을 앞둔 시기에 어른 자체를 깊이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연극 <옥상 위 카우보이>(이보람 작, 권지현 연출, 신윤아 드라마터그, 보편적극단, 예술공간 혜화, 2021.12.02.~12.)의 두 소녀 때문이었다.
<옥상 위 카우보이>는 2014년에 처음 발표된 작품으로, 영화배우 김윤석이 감독으로 입봉한 영화 <미성년>의 원작으로 화제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원래 제목은 ‘내가 있어야 할 자리’였다고 하는데, <옥상 위 카우보이>로 바꾸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이 작품에서는 일단 어른과 청소년이 명확히 구분된다. 부모와 고등학생 아이들. 그런데, 그들에게 닥친 갈등상황과 그것의 수긍, 해결의 과정을 지켜보면 명확하다고 생각했던 구분이 한데 섞이다가 어느 순간 역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자 장점이었다.
주리와 윤아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고등학생이다. 윤아는 학교 옥상에 텐트를 치고 자기만의 세계를 사는 인물이고, 주리는 과외를 받고 학원을 다니는 평범한 인물이다. 이 둘이 어느 날 옥상에서, 마치 서부극에 나오는 카우보이처럼, 뜨거운 결투를 벌인다. 이유는 부모 때문이었다. 주리 아빠가 윤아 엄마와 바람을 피웠고 윤아 엄마는 임신을 해서 곧 출산을 앞둔 상황이었다. 같은 동년배와 치고받으면서 “더 이상 우리 아빠 만나지 말라고 전해”. 어른들이 관계를 비틀어 놓은 것에 대한 청소년의 최대치 반응이다. 그것 이상으로 아이들이 이른바 어른 세계에 들어가거나 관여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청소년과 어른이 선명히 구분된 듯이 보였다.
그런데 윤아 엄마가 조산하자 양상이 달라진다. 사건의 원인이자 중심인 아빠는 불륜이 들키자 도망 다니기에 바쁘다. 딸의 전화도 안 받고 윤아 엄마가 입원한 병원도 가지 못하고 너무 빨리 태어난 아들에게도 가지 못한 채 주변만 빙빙 돌 뿐이다. 그러면서 급기야 청소년상담전화를 붙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흑흑.” 이렇게 솔직한 어른은 처음이었다. 비겁함, 무책임함, 당황, 걱정 등등 그 모든 감정들이 결국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더 커져버린 것이다. 엄마들은 또 어떤가. 윤아 엄마 병원에 직접 만든 전복죽을 싸들고 주리 엄마가 찾아간다. 뭔가 챙겨줘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또 안 될 것 같은 주리 엄마의 난감함. 윤아 엄마를 보면 화가 나는데 그런데도 불쌍하기도 한 이중적 감정. 주리 엄마 역시 미안하면서도 불쾌하고, 고마우면서도 화나는 상반된 감정으로 마주한다. 어느 것 하나 명쾌하게 해결되지 못한 채 찝찝하게 그렇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엄마들은, 그럼에도 조금씩 변해 있었다. 좋은 재료의 집밥을 최우선으로 여기던 주리 엄마는 라면을 생으로 부셔 먹게 되었고, 딸 윤아가 차려주는 밥상 앞에서 윤아가 뜨개질로 만든 아기신발을 움켜쥔 윤아 엄마는 큰 울음을 터트린다. 세상 쿨하던 엄마도, 가족이 최우선이었던 엄마도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설명도 못하지만 어딘가 달라졌고 어딘가 바뀌었다. 이처럼, 곤혹한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진짜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상황에 던져진 것처럼 서툴기만 한 엄마들과 아빠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어른의 모습이 아니었다.
주리와 윤아는 어른들과 대비되는 행동을 한다. 두 소녀는 첫 장면의 대결과 갈등의 관계에서 조금씩 공감과 공유의 관계로 바뀌었고,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그대로 실천했다. 서로의 엄마와 아빠가 자식들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고, 비록 부모가 바뀔지언정 자신들은 곧 태어날 아기의 누나들임을 알고 있었다. 부모들이 이리저리 얽힌 관계로, 자신에게 닥친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을 때 주리와 윤아는 세상에 너무 빨리 나왔고 그래서 아무런 사랑도 받지 못한 채 그대로 스러져버린 작은 생명을 품었다. 비틀어져버린 어른들의 관계는 관여할 수도, 책임질 수 없다. 그러나 사라진 동생을 기억하기 위해 소녀들은 타임캡슐을 옥상 환풍구 밑에 묻어둔다. 그 타임캡슐은 생명에 대한 존중과 그것에 대한 책임이라는 의미이며, 이는 곧 어른의 덕목이기에 소녀들은 어느새 어른이 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품의 주제만큼 흥미로운 것은 공간 활용과 배우들의 앙상블이었다. 학교 옥상이 주된 무대였고, 아이들의 공간과 어른의 공간을 구분했지만 실제 무대는 필요에 따라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무대 좌우의 철창이 옥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그 사이로 밀고 들어오는 책상들이 윤아의 집이기도 하고 주리의 집이기도 했다. 좁은 소극장 무대를 매우 효율적으로 활용하였는데, 특히 주리가 아빠를 쫓아다닐 때는 동선을 무대의 대각선으로 그어 추적하는 시간의 길이를 확장했다. 무대 위 가장 아름다운 존재는 역시 배우였다. 우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아빠 역은 신강수 배우가 맡았다. 신강수 배우는 알다시피 왜소증 장애가 있는 저신장 배우다. 문제를 회피하며 상대적으로 작아진 아빠의 입지와 자존심을 시각적으로도, 연기적으로도 충실히 수행했다. 딸보다 더 어린애 같은 윤아 엄마 역의 김정아 배우, 삶의 기준이 주리에게 놓여 있는 주리 엄마 역의 강정윤 배우는 어른이면서도 철부지인 이중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었다. 주리 역의 이세영 배우와 윤아 역의 라소영 배우는 티격태격하는 사이에서 죽은 동생을 공유하는 관계로 변화하는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난감함, 어른들에 대한 분노, 그럼에도 품어야 할 것들에 대한 인정 등의 복합적 감정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둘의 교감과 공유로 입체화되고 전달되는 효과를 만들어 냈다. 주리와 윤아는 요 근래 본 캐릭터 중 가장 사랑스럽고 귀엽고 어여쁜 캐릭터였고, 그걸 함께 호흡을 주고받으며 잘 표현한 라소영, 이세영 배우는 사랑스럽고 귀엽고 어여쁜 배우들이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어른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옥상 위 카우보이>는 정답은 없지만 넌지시 이렇게 운을 띄운다. ‘그래도 어른이라면 생명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하지 않나? 기억하는 것도 책임의 일종이 아닐까?’ 아이 같은 어른들이 저질러 놓은 일들을 어른 같은 아이들이 어떻게 감당하는가를 보여준 <옥상 위 카우보이>는 청소년극이 아님에도 청소년극 같고, 성인극임에도 성인극이 아닌 것 같은 묘한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시종일관 유쾌하고 에너지 넘치는 분위기로 관객들을 집중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어른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 문제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데, 어른들은 왜 아프다고 엄살만 떨고 성숙해지지 않을까? 이제부터는 그걸 고민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