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조치원의 클로디어스, 아니 만국이 이야기다

-극단 코너스톤, <조치원―새가 이르는 곳> 리뷰

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제공: 극단 코너스톤

사내가 달걀을 하나 건넨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1시쯤에

열차는 대전에서 진눈깨비를 만날 것이다.

스팀 장치가 엉망인 까닭에

마스크를 낀 승객 몇몇이 젖은 담배 필터 같은

기침 몇 개를 뱉아내고

쉽게 잠이 오지 않는 축축한 의식 속으로

실내등의 어두운 불빛들은 잠깐씩 꺼지곤 하였다.

(중략)

사내는 작은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견고한 지퍼의 모습으로

그의 입은 가지런한 이빨을 단 한 번 열어보인다.

플랫폼 쪽으로 걸어가던 사내가

마주 걸어오던 몇몇 청년들과 부딪친다.

어떤 결의를 애써 감출 때 그렇듯이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

조치원이라 쓴 네온 간판 밑을 사내가 통과하고 있다.

나는 그때 크고 검은 한 마리 새를 본다. 틀림없이

사내는 땅 위를 천천히 날고 있다. 시간은 0시.

눈이 내린다.

기형도, 鳥致院,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오랜만에 기형도 시집을 꺼내 읽었다. 공연의 마지막 장면, 남자가 나지막이 읊조리는 시구(詩句)가 가슴에 남아 그 여운을 더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면서 새삼, 쓸쓸한 한 사내를 풍경처럼 형상화한 이 시를 보고 <햄릿>의 클로디어스 이야기를 구상했다는 것이 흥미롭고 기발하다는 생각을 했다. <조치원―새가 이르는 곳>(이철희 작·연출, 극단 코너스톤,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2022.1.7.~23.)은 시와 희곡, 고전에 대한 오마주와 패러디 등 여러 가지가 참 잘 맞아떨어지는 발상을 보여준 연극이었다.

사진제공: 극단 코너스톤

작가와 연출을 함께 한 이철희 연출은 이 작품 이전에 이미 <조치원 해문이>를 통해 <햄릿>의 ‘한국적 번안’, 좀 더 세밀하게는 ‘충청도식 번안’을 선보였다. 조치원을 공간적 배경으로, 세종시로 변경되는 시기를 시간적 배경으로 설정하여 개발과 자본에 휘둘리는 갈등을 햄릿과 주변인들에 적용해 충청도의 해문이를 창조했다. <조치원―새가 이르는 곳>은 앞서 발표된 <조치원 해문이>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조치원 해문이>보다 늦게 창작되었지만 이야기는 그보다 앞선 시기를 다루고 있으며, 그 주인공은 햄릿이나 그 부모가 아닌 햄릿의 삼촌이자 새아버지인 클로디어스이다.

클로디어스에 대한 충청도식 번안과 창조를 위해 두 가지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하나는 원작에도 없었던 클로디어스의 서사, 즉 만국이의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서사를 조치원이라는 공간 속 인물의 관계와 갈등으로 엮어내는 것이었다. 이철희 작가는 우선 클로디어스가 동생이라는 점에 착안해서 장자 중심으로 가계가 계승되는 한국적 가부장 세습 전통을 전제로 했다. 장자와 차자에 대한 주변인들의 태도와 입장이 다르다는 것은 클로디어스, 즉 만국에게 중요한 이유와 명분을 제공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 소유였던 모든 것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형인 성국에게 물려진다. 그저 자식 중 하나로 자랐을 뿐인데, 아버지가 병사하자 곧바로 형 성국에게 가장의 지위와 권위, 재산 그리고 모든 권력이 아무런 상의도 없이 고스란히 승계된 것이 만국에게는 기가 막힐 일이었다. 아버지가 가졌던 모든 것을 왜 형이 가져야하는지 스스로는 전혀 납득하지 못했지만 친척들과 주변인들, 심지어 먼저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혼까지 “이제부터는 성이 아부지여”라고 끊임없이 외워대는 통에 반항 한 번 못하고 순순히 현실을 받아들였다. 사랑하는 여인과 서울로 올라가 살고 싶어 그저 작은 방 하나 얻어달라는 소박한 욕망도 허용하지 않는 형과 싸우며 결국 만국은 조치원을 떠나게 된다. 형에게, 장자에게 모든 것이 상속되는 가부장의 전승은 만국이가 형에 대한 살의를 품기에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또한 형은 아버지의 것만이 아닌 만국이 사랑하던 언년이도 빼앗았다. 물론 성국을 선택한 언년이 나름의 이유가 있지만, 재산, 권력, 사랑 어느 것 하나 자신의 것을 갖지 못한 만국의 현실은 각자의 해석에 맡겨졌던 원작의 클로디어스에 대한 전사와 여백을 촘촘하게 채워냈고, 그로 인해 형을 죽일 수밖에 없는, 혹은 죽여야 하는 명분과 이유가 설득력을 갖추게 되었다. 더군다나 아버지와 똑같이 배에 물이 차서 죽어가는 형에게 간이식을 하러 내려가는 시점이 세종시 개발 문제로 조치원이 들썩이던 때이니 한 번도 실현되지 못한 만국의 욕망이 꿈틀거릴 자리가 충분히 마련된 것이다.

사진제공: 극단 코너스톤

햄릿의 갈등이 본격화되기 전, 클로디어스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형을 죽이고 형수와 결혼하였는가에 대한 작가적 상상력은 공간을 한국의 조치원으로 옮겨오면서 가부장의 상속에서 완벽히 배제된 차자의 입장으로 구체화되었고, 죽어가는 형을 살리기 위해 간이식을 하러 귀향하는 옷자락 속에 형을 죽이려는 청산가리를 품고 있는 만국의 복합적 심리는 기형도의 시 ‘조치원’의 정서와 만나 매우 입체적이며 뚜렷하게 드러났다. <조치원 해문이>의 프리퀄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해석이며 상상력이다.

만국의 행동에 대한 당위성은 2021년 3월의 초연보다 이번 재공연에서 더 선명해졌다. 이번 공연은 재공연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초연에 비해 많은 것들이 수정되었고 보완되었는데, 우선 주목된 것은 무대와 동선의 변화였다. 초연 극장인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는 프로시니엄 무대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공간 연출이었던 것에 비해 이번 홍익대 아트센터 소극장에서는 객석을 양쪽 벽면에 마주보게 놓고, 가운데 공간을 극장의 좌우 끝까지 길게 활용했다. 그 덕분에 만국이 조치원으로 향하는 기차 안의 풍경이 그 기차간에 같이 타고 있는 듯 몰입감을 주었고, 만국이 모든 것을 뺐기는 과거의 시간들이 무대 양쪽 끝에서 구현되어 현재와의 거리감을 만들어 냈다. 만국은 공연 내내 무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무대 좌우의 끝과 중앙을 오가며 현재와 과거를 가로지르는데, 이는 이 작품의 핵심이 만국이라는 점, 어떤 장면이 펼쳐지든 만국이 그 중심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동선이었다. 이렇게 만국에게 집중하다보니 주변 인물들, 갈등관계가 만국을 중심으로 더 뚜렷해진 것이다.

사진제공: 극단 코너스톤

또 다른 인상적인 변화는 이 작품의 모티프가 된 시 「조치원」은 살리되 시인 기형도는 괄호 속에 넣었다는 점이다. 초연에서는 작품 말미, 조치원역에 내리는 만국과 헤어지며 서울에서부터 대화를 나눈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기형도입니다”. 이 이름이 나오는 순간 마치 블랙홀처럼, 켜켜이 공들여 쌓아왔던 만국의 이야기는 기형도와 그의 시로 수렴되었고, 그 때문에 이 작품이 만국에 대한 것인지 기형도가 「조치원」이라는 시를 쓰게 된 계기에 대한 것인지 정체가 모호해져 버린 것이 못내 아쉬운 부분이었다. 기형도 시인을 무대에서 만나는 당혹감을 또 다시 겪어야 하나 걱정했으나 이번 공연에서는 이름을 묻는 만국에게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는 신산했던 만국의 삶에 대한 시인의 존중으로 읽혔기에 오롯이 만국에게 집중한 마무리가 되었고, 또한 뒤이어 「조치원」을 낭송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통해 시의 분위기가 만국의 뒷모습에 겹쳐져 만국의 이미지를 정서적으로 강조했다.

재미난 변화 중 하나는 만국의 첫사랑이자 형수인 언년이었다. 초연과 달리 언년을 세 배우가 연기했는데, 만국과 사랑할 때의 청초한 언년1, 형을 선택하고 만국을 밀어내는 언년2, 흡사 놀부 부인이 된 듯 남편과 가족만을 생각하는 언년3. 만국을 대하는 태도의 강도가 달라지는 것에 비례해 언년의 언행도 배우의 변화와 함께 드세고 사나와졌다. 한 사람이 이 변화를 연기할 때와 달리 세 명이 한 인물을 변화 지점에 따라 연기한 것은 굉장히 색다른 효과를 주었다. 이러한 언년의 변화를 보면서 문득 또 다른 프리퀄로 언년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한 번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국을 버리고 성국을 선택한 언년이만의 필연적인 이유는 뭐였을까?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 이유를 만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사진제공: 극단 코너스톤

차자로서 자신의 것을 갖지 못한 만국의 삶은 이대연 배우를 통해 입체화되었다. 특별한 분장 없이 20대 만국과 60대 만국을 동시에 연기하는 것은 배우에게 부담이 될 터인데, 이대연 배우는 목소리와 움직임의 변화로 20대의 순박함, 60대의 헛헛함을 자연스럽게 오가며 관객의 공감을 높였다. 여기에는 이대연 배우가 능청스럽게 구사하는 충청도 사투리도 한 몫을 했다. 성국 역의 김문식 배우는 충청도 출신의 인물 연기에는 최적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해줬다. 성국 역시 본인의 의지보다는 상황에 떠밀려 장자의 책임을 짊어지는 인물이었기에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데, 그런 양가적 특성을 천연덕스런 충청도 억양으로 살려냈다. 여러 역할을 겸했던 곽성은, 김승환, 최나라 배우 등이 보여준 고른 연기와 좋은 앙상블도 작품의 안정감을 만들어 내는 데에 큰 몫을 했다.

<조치원 해문이>, <닭쿠우스> 등을 통해 고전을 현재화하면서 자기 방식대로 비틀어내는 감각을 보여준 이철희 작가 겸 연출은 <조치원―새가 이르는 곳>을 통해 고전을 기반으로 어떤 상상을 얼마나 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거기에 ‘충청도’를 매 작품의 중요한 소실점으로 삼아 지역성을 전제하면서도 보편성을 지향하고 있다. 이것은 연출의 뚝심 없이는 불가능한 매우 “대간(‘고단하다’는 의미의 충청도 사투리)”한 일이기에 극단 코너스톤과 이철희 연출의 ‘충청 시리즈’에 지속적으로 큰 응원을 보내게 된다. 또한 재공연도 관습적으로 올리지 않고 좀 더 발전시키고자 고민에 고민을 더하며 수정과 보완을 적극적으로 꾀하는 자세도 고무적이다. 이런 기발한 발상과 아이디어, 이런 진지한 자세와 태도라면 향후 또 어떤 작품으로 충청도의 정서와 맛을 선보여 줄지 충분히 기대할 만하지 않을까? 이철희 연출이라면 그 기대를 또 충족시켜 줄 것이다.

사진제공: 극단 코너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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