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서현(공연과이론을위한모임)
<로테르담>(존 브리튼 작, 김수아 번역/각색, 진해정 연출)은 이성애 중심 사회의 억압과 성소수자 인권의 갈등을 직접적으로 무대화 해온 퀴어 연극들과는 달리 로맨틱 코미디의 문법을 통해 대중성을 확보하고 주제를 확장시키는 데 성공한 재기발랄한 작품이다. 아직 까지도 성별 갈등은 물론 성소수자를 향한 공공연한 혐오가 만연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떠올려보면, 시스젠더나 퀴어에 대한 온갖 유머가 자유롭게 수용되는 소극장 안의 낯선 공기는 그야말로 유쾌하 다. 진솔한 대사와 이를 전달하는 배우들의 유연한 화법, 한국 관객 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세심한 번역과 각색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혹여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까 진중하게─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진중하게만─다루어졌던 소재들이 개개인의 성 정체성과 관련 없이 관객 모두에게 유쾌한 웃음과 감동을 유발시킨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작품이 안겨주는 해방감은 크다. 물론, <로테르담>을 나서면 극장 밖은 도로 대한민국 서울일 테지만.
무대는 로테르담의 이국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제시한다. 선적용 컨테이너를 연상시키는 구조물부터 운하의 얼어붙은 빙판으로 내려가는 돌계단까지 간명한 무대설치와 선명한 색상들의 조화를 통해 북방의 항구도시가 효과적으로 표현되었다. 인물들의 개성적 의상과 헤어스타일 또한 낯선 땅의 자유분방함을 세심하게 묘사하고 있어 오직 이곳이기 때문에 가능한 상황 설정과 사건 전개의 개연 성이 확보된다.
이야기는 한 평범한 영국인 레즈비언 커플이 절박하면서도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되면서 시작된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자신이 트랜스 젠더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앨리스(성수연 분)는 더 이상은 여자 연기를 하며 피오나로 살아갈 수 없다는 에이드리언(김정 분)의 결심을 받아들이고 그를 지지하려 노력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다. 하루 빨리 남자로 패싱 되고 싶은 마음뿐인 에이드리언과 이 변화에 자신을 적응시켜보려는 앨리스의 온갖 노력들이 작품 전체의 희극적 갈등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작품의 초반, 앨리스의 가장 친한 친구인 조쉬(마광현 분)가 사실은 앨리스의 전 연인이면서 동시에 피오나의 오빠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곧이어 레즈비언인 회사 동료 렐라니(김별 분)가 앨리스에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시하기 시작하면서 이 작품의 로맨틱 코미디적 설정이 완성된다.
성 소수자에 대한 사회의 몰이해가 이성애자들의 입장이 아닌 성소수자 당사자인 피오나와 앨리스의 대사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실제로 이 커플이 자기들끼리 치고받는 대사의 상당수는 성 소수자들이 타인들로부터 듣게 되는‘ 근심어린’ 조언들을 상기시킨다. 예를 들어, 앨리스는 호르몬 조절과 더불어 성전환 수술까지를 염두에 두고 있는 에이드리언에게 조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시간을 갖고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에이드리언으로 서는 평생을 거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지만 앨리스에게는 납득되기 어렵다. 에이드리언이 앨리스를 이해하는 방식도 더 나을 게 없다. 에이드리언은, 연인이 남자였으니 이제 자신은 누구냐며 혼란 스러워하는 앨리스의 질문에, 너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사랑한 것이니 원래부터 레즈비언이 아니라 스트레이트였던 것이라며 편의주의적 결정을 내린다. 스스로가 성 소수자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의 성 정체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둘의 모습은 씁쓸한 웃음을 자아낸다.
남성으로 호명되지 못해 매 순간 분개하는 에이드리언과 그의 태도가 지나치게 과민하다고 생각하는 앨리스 사이의 고성 언쟁이나 펍에서 나누는 에이드리언과 조쉬의 진솔한 대화가 특히 인상적이다.
이들 사이의 대화는 누구든지 예기치 않은 변화로 인해 조급함과 불안함을 느낄 수 있으며 의도치 않은 실수로 상대의 마음을 다치게 할 우려에 대한 공감 속에서 가능했다. 어쩌면 문제 해결을 위한 공통의 언어는 서로가 다르게 생각하는 지점을 명확히 하는 것보다 변화에 대한 각자의 두려움을 공유하는 데에서 발견할수 있지 않을까. 정박했다고 믿었던 것이 다시 출항할 때 느끼게 되는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에이드리언의 우격다짐과 앨리스의 좌충우돌로 한참을 웃고 있던 관객들은 자신의 정체성 찾기와 앨리스의 사랑이 공존할수 없음을 깨달은 에이드리언의 뒤늦은 절규를 통해 이 작품이 코미디가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작품이 마지막까지 긴장 감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결말을 향한 작가적 선택에 대한 궁금증 때문일 것이다. 레즈비언인 앨리스가 에이드리언의 연인 으로 돌아가거나 에이드리언이 앨리스와 함께 하기 위해 호르몬 조절을 중지하고 여자 연기를 계속하는 것은 개인의 삶의 관점에서‘ 옳지 않다.’ 하지만 작품의 마지막은 앨리스가 공항 으로 에이드리언을 쫓아가 그와 함께 영국으로 갈 비행기를 기다리며 화해의 손을 내미는 것으로 끝이 난다.
여기서 피날레가 낭만적 재회가 아니라 이별의 순간으로 묘사 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둘은 비록 서로에게 내민 손을 꼭 잡고 있지만“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곳을 보지만”이라는 지문 또한 충실하게 연출된다. 후드 티에 달린 모자를 눌러쓴 에이드리언과 그에게서 거리두기 하듯 떨어져 앉은 앨리스의 밝은 웃음에 먹먹함이 서려 있다. 두 사람은 앞으로도 서로의 곁에 있길 선택했으니 함께 했던 기억을 뒤로한 채 새로운 관계로 다시 출항해야 한다. 로테르담의 모든 배들이 그렇게 정박을 끝내고 항구를 떠나듯이.
*이 기사는 <한국연극>(2022년 2월호)의 평문을 재수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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