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인문극장 2022: 공정
2020년 낭독공연이 2년 만에 성공적 초연으로!
작: 루시 커크우드(Lucy Kirkwood)
번역: 김수아
연출: 진해정
제작: 하지스토리
공연일시: 2022/06/07-06/25
공연장소: 두산아트센터 Space111
관극일시: 2022/06/16
극단 그룹動·시대 연출 오유경
‘사람들은 대신 원망할 여자가 있을 땐 신을 원망하지 않는다.’
18세기 영국. 12명의 마을 여인들은 ‘날 때부터 망할 년, 딱 얼굴이 교수형될 상(相)’인 샐리 포피의 임신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법원의 가장 열악한 다락방에 모였다. 샐리는 ‘마을의 지주, 왓슨의 어린 딸을 죽여, 2개의 자루에 담아 버린 끔찍한 살인혐의 용의자로, 교수형을 기다리고 있다. 죄 없는 어린아이의 토막살인! 자극적인 죄명만큼, 법원 바깥에서는 어서 그녀의 목을 매달라고 광분한 군중들이 아우성치고 있다. 하지만 처형에 앞서 샐리는 임신을 주장하고, 그녀의 생사(生死)는 이 여인들의 판단에 따라 뒤바뀔 수 있는 처지에 놓였다. 집중을 요(要)하는 이 긴박하고 신중한 판단에, 12명의 여인들은 각자의 모순과 어리석은 혹은 사악한 이해의 충돌과 갈등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여인들의 이해 충돌과 갈등의 전개가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을 이룬다.
이 글, 제목에서 언급한 바대로, 작품 《더 웰킨》은 2020년에 낭독공연으로 먼저 선(僐)을 보였고, 본인은 이를 다루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극작의 내용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생략하기로 하고, 무대화된 공연에 대한 감상에 집중하고자 한다. 우선, 변수가 많은 공연 제작현장에서, 2년 전 그대로의 연출과 제작진을 만나 반가웠다. 그만큼 숙성된 잘 다듬어진 공연을 보게 되어 더욱 고무(鼓舞)되었다. 이번 공연에서 더욱 도드라지게 강조되거나 새롭게 발견된 포인트(point)는 여성 인물의 동질화, 공정이란 주제, 이를 뒷받침하여 목표에 도달하도록 제 역할을 충실히 다한, 섬세하게 계획되고 실행된 무대 미학의 요소들이다. 이 포인트들은 각자 서로 섬세하게 연결되어 공연의 최종적 완성을 향한다.
작품 《더 웰킨》의 인물은 샐리 포피, 12명의 마을 여인들, 3명의 남성들(2명의 남자배우가 연기하는), 그리고 왓슨부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여성의 적(敵)은 오히려 여성’이라는 속된 말처럼, 극의 처음, 마을 여인들과 샐리 포피는 대립 관계다. 12명의 마을 여인들은 모두 하층계급의 노동자들로, 생존을 위한 노동과 성적(性的) 착취의 대상이다. 그들의 생존은 절박하고, 노동조건은 열악하며, 그들을 향한 성추행과 강간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짐 지워진 숙명으로 당연시 된다. 이 같은 상황과 처지는 샐리 포피도 같다. 그럼에도 마을 여인들은 그녀를 종교적으로 타락한 자신들과는 다른 부류, 경멸과 혐오를 담아 철저히 분리하여 생각한다. ‘악마가 물 마시는 걸 보고 있다. 악마도 물이 필요한가.’ 그들에게 샐리는 성적으로 문란하고, 도둑질, 거짓말을 일삼는, 그들보다 더 최악의 낮은 하층의 짐승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샐리에게 여인들은 누구인가. 부당하게 그녀를 학대해 온, 세상의 모든 것들에 속한다. 자신을 성적으로 착취한 남성들과 못지않은, 위선적이고 가증스러운 존재들이다. 샐리가 스스로 밝힌 생(生)의 목표는 ‘나보다 많이 가진 모든 년을 죽여버리는 일.’이다.
이러한 여성 간(間)의 대립은 그녀에게 반(反)하는 마을 여인들 사이에서도 존재한다. 이것은 샐리의 임신 가부(可否)를 하나의 판단으로 만장일치 도출해야 하는 과정 중에서, 서로 다른, 하찮은 혹은 사악한 이해관계 속에서 충돌하며 어리석은 모순과 갈등으로 드러난다. 여인들의 의견이 한목소리가 되기까지 공연시간 180분이 모두 소용되는 지경이다. 마을의 산파(産婆), 루크부인은 심지어 이렇게 호소한다. 하느님이 버린 최악의 범죄자라도 ‘한 사람의 생사와 존엄을 판단하는 힘이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기도가 아닌 우리의 의지와 판단으로 함께 노력해 볼 수 있잖은가. 왜 그 권리를 안 쓰는가. 지금 우리는 저 너머 남자 판사들과 똑같이 굴고 있다.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진실을 무시하는가.’ 신체의 모든 증상과 산파로서의 루크부인의 경험과 의견이 샐리의 임신을 증명하는데도, 이를 거부하고 줄곧 무시하던 여인들이, 샐리의 임신을 확인하고 결국 만장일치로 찬성하게 되는 계기가, 남자 산부인과 의사의 진료결과로 마지 못 해 할 수 없이 도출된다는 점은, 아직도 종종 현실에서 발견되기에 씁쓸한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여성인물들의 대립을 구경하듯 지켜보는 관객들은 장면 곳곳에 포진된 사회적 약자로서의 그들의 동질화를 목격한다. 그림자처럼 시간의 초침 속에서 하층 여성들의 바쁜 노동의 일상들을 움직임만으로 표현한 첫 장면. 마을 여인들을 소위 끔찍한 살인 용의자 샐리와 아무런 격리나 보호조치 없이 한 방에 함께 섞어 넣어 놓고, 추운 날씨에 음식, 음료, 불, 양초 모두를 금지시킨 채 장시간 방치하며 놔두는 법원의 처우는, 마을 여인들의 인식과는 달리 사회의 시각 안에서는 그들 또한 샐리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의미한다. 동지(同志)로서의 동질화가 아닌 사회적 분리로서의 동질화는 이미 이뤄진 셈이다.
샐리와 함께 여인들 모두 임신의 증상을 공유하고. 왓슨의 딸이 살해되던 그 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리고, 숲의 흔들리는 나무들 사이에서 샐리 포피는 어린아이를 찾는데, 무너지는 하늘. ‘혜성이 내려오나?’ 번쩍하는 순간,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바람과 물에 표류하듯 떠 있는 샐리의 환영 속에서 마을 여인들은 그 숲의 나무가 되어 그녀와 같이 흔들린다. 아들을 낳은 후, 실어증에 걸린 듯 수년 동안 말을 일체 하지 않던 사라 홀리스. 그 숲에서 혼자 아들을 낳던 밤을 고백처럼 쏟아낸다. 딸을 낳을 때와는 달리 아들은 왜 몰래 혼자 낳고 싶었을까. 그녀의 신비한 마법적 원초적인 원시 환영. 그 속에선 악마가 아들 낳는 걸 돕는다. 아들은 악마. 악마의 도움으로 낳은 아들을 데리고 죽으려 했다고 털어놓는 그녀의 광적인 고백 속에는 세상에 사악한 것을 내어놓았다는 그녀의 죄책감과 공포가 도사린다.
임신여부를 알기 위한 산부인과 의사의 검진. 샐리의 외마디 비명에, 여인들 모두는 자궁 속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기계의 느낌을 함께 느끼며 순간 위축되고 소스라친다. 남자 의사의 말. ‘여성은 정서적 동물. 여성의 삶은 질병의 역사.’ 이에 침 뱉듯 내뱉는 루크부인의 한마디. ‘흥! 남자 입으로 들었으니 이젠 모두 믿었겠지!’ 시기, 오해, 엉켜있는 욕망들 사이에서 그들 모두 세상에서 버려진 것은 매한가지라는 인식은 결국 그 모두를 뛰어넘어 하나가 되는 동질의식으로 서로를 묶는다. 휴식처럼 찾아온 침묵의 순간, 긴 갈등으로 지친 여인들은 나직이 중얼거리듯 함께 노래를 흥얼거린다. 샐리 포피까지도 함께 흥얼거린다. 생의 마지막 노래를. 비록 정치적 연대는 아닐지라도 그 노래는 사뭇 동지가(同志歌)가 아닐까.
일상 속에서, 의식(意識)과 인식(認識)이 쌓이고 축적이 되어야 우리는 비로소 행동을 하며, 과감히 정치와 사회 변화에 뛰어든다. 하지만 이것은 논리처럼 쉽지 않다. 생존의 절박함이 우리의 의식과 인식의 축적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내내 감자수확을 걱정하던 매리 미들턴은 법원 다락방을 나가며 말한다. ‘하루종일 집 밖에 있었던 게 좋았다.’ 키티 기븐스는 문득 ‘난 빨래(노동)만 하느라 하늘을 못 보는데 그래도 샐리는 하늘을 보았다.’ 이런 인식은 그녀를 선뜻 방을 나서지 못하고 머뭇대게 붙잡는다. 12명의 여성무리 중, 겨우 1명이 의식하고 인식한다. 자신의 삶이 샐리의 그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의식. 법원을 나가서 과연 그녀는 행동으로 그녀의 인식을 옮길 수 있을까? 바로 이 지점이 현재의 여성 인식과 연결되는 지점이며, 공연의 마지막 엔딩(ending)의 의미가 된다. 장면은 다시 처음의 그림자 장면으로. 시간은 현재. 그 여인들은 지금 현재도 같다. 지금도 그녀들의 머리 위로 혜성은 떨어진다. 그리고 모두 정면을 응시. 인물들의 심연(深淵)의 무게는 시간을 넘어 발견의 깊이와 연결되어 동질감(同質感)의 무게를 획득한다.
그렇다면 어떤 발견, 어떤 인식의 동질감인가? 작품 속 여성인물들의 동질화는 어떻게 되었나? 여기에 ‘공정(公正)’이라는 이번 공연의 주제의식이 맞물려있다. 공정은 ‘존엄(尊嚴)’과 맞물려있고, 존엄은 나이, 성별, 지위, 등 그 어떤 차이와 다름에도 차별받지 않고 지켜져야하는 것이다. 샐리 포피는 그 ‘존엄’을 획득하고자 한다.
세상을 향한 환멸의 독이 차올라 완전 망가진 여자, 샐리 포피. 사실 그녀는 마을의 지주, 그 살해당한 어린아이의 아버지, 왓슨의 딸이다. 루크부인이 13살에 성폭행을 당해 홀로 숲에서 샐리를 낳았고, 외할머니는 즉시 그녀를 팔아넘겼다. 남편은 그녀를 성적 배설구 그 이상으로는 취급하지 않았고, 마을의 산파 루크부인이 자신의 친어미라는 것을 알고도 모르는 척 내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냥 그저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겐 구질하게 무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 버려지고 학대받은 심연의 틈 속에 살인자 토마스 맥케이의 속삭임이 마법처럼 스며들어 자리 잡는다. ‘누가 너에게서 무엇을 빼앗았다면 너도 뭔가 타인에게서 빼앗을 권리가 있어.’ 그리고 그것은 ‘누가 나에게서 무엇을 빼앗았다면 나도 뭔가 타인에게서 빼앗을 권리가 있어.’ 가 되었다. 샐리의 이 비뚤어진 셈법은 그녀에겐 ‘공정’이다.
‘난 그 아이를 죽이지 않았어. 하지만 내 의지대로 동조했어. 거짓은 없어. 난 거짓말 안 해.’ 그의 은밀한 뭔가 터져버릴 것 같은 눈빛. 그녀가 상상한 대로 그대로의 존재. 샐리에게 토마스 맥케이는 현실이 아닌 마법처럼 종교적 절대 존재로 그려진다. 왓슨의 딸, 그 어린아이는 또 다른 왓슨의 딸인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존재이다. 그래서 그녀의 살인은 그녀에게는 정당하고 끔찍하게도 공정한 일이다. 그녀는 자유와 해방을 맛본다. 그녀의 머리 위로 혜성이 떨어진다.
‘집행 후 몸을 해부하라.’ 샐리는 그악스럽게 임신을 이용해 처형을 피하고 추방으로 감형받아 완전한 자유를 얻으려 욕망한다. 그리고 성공한다. 그녀는 격렬한 희열에 전율한다. 그녀의 욕망이 끔찍하게 사악할지라도 12명의 마을 여인들은 ‘샐리의 임신은 사실이며, 뱃속 아이의 생명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샐리의 존엄은 지켜져야한다.’는 결론에 합의함으로써, 샐리와는 다른 ‘공정’을 행한다. 하지만 이 ‘공정’의 행위는 그리 오래 존중되지 않는다.
유령처럼 등장한 살해된 아이의 엄마, 왓슨 부인. 남자 감독관에게 말없이 내민 돈주머니. 예상대로 결국 힘, 권력은 모든 것을 이긴다. 감독관은 샐리의 배를 가격(加擊)하고 샐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유산한다. 더이상 뱃속에 아이를 갖지 않은 그녀는 그대로 교수형이 확정된다. 180분 동안 그렇게 치열했던 마을 여인들의 ‘공정’의 행위는 돈 앞에서, 순식간에 어이없게 그 존엄을 잃는다. ‘300명이 보는 앞에서 이제 목을 매겠지. 난 모욕당하는 거야. 존 왓슨이 나를 구경하려 할거야!’ 샐리는 세상에 대해 기대(企待)가 없다. 여인들 모두를 까발리고 비웃고 경멸했던 샐리. 그녀의 존엄이 모욕을 당하는 순간이 오자, 그녀는 피를 흘리며 아픈 배를 움켜쥐고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가장 절박하게 외친다. ‘날 죽여줘!’
동질화의 완성은 그 동질감을 획득할 때 완성된다. 오열하는 샐리와 어쩔 줄 몰라하는 루크부인을 보며, 가장 마지막까지 샐리의 감형을 원치 않았던 엠마 젠킨스는 과거 자신을 극도로 싫어해 보복으로 쥐약을 먹여 죽였던 개의 죽음을 떠올린다. 죽기를 바랬지만 그 죽음의 고통은 길지 않게 도와주고 싶었던 마음. 엠마 젠킨스가 샐리의 고통을 공감하면서 동질감을 획득하고, 루크부인이 샐리가 그 자신의 존엄을 잃지 않고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돕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면서, 동질화를 완성한다. 성스러운 종교의식처럼, 루크부인은 공포에 지친 샐리의 얼굴을 닦고 평온하게 끌어안아 자신의 앞치마 끈으로 천천히 부드럽게 그녀의 목을 조른다. 평생 세상에서 버림받고 학대받던 샐리.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엄마의 손에 그녀의 마지막을 맡긴다.
왓슨부인. 법 위에 군림하는. 세상의 논리가 ‘결국 누구에게 힘이 있는가’의 문제로 귀착되면서, 설득하고 공론을 만들어가는 과정의 묵살(默殺)은 모든 ‘공정’을 죽이고 모든 ‘존엄’을 죽이는 결과로 귀결된다. 샐리 포피의 죽음은 곧 모든 여인의 죽음이 된다. 이로써 작품 《더 웰킨》은 ‘공정’이란 주제를 획득한다. 작품의 모든 것은 결국 왓슨부인의 테러를 향해 간 셈이다. 또한 이 작품은 남성지배사회를 향한 여성의 항거를 그린 것 같지만, 결국 세상의 논리를 쥐고 흔드는 권력 지배층을 향한 약자(弱子)들의 ‘공정’과 ‘존엄’의 현주소(현실)를 하층계급 여성노동자들을 통해 드러내 보여준 것이다.
공연작품의 메시지가 관객에게 이토록 세밀하게 읽힐 수 있는 것은, 이를 뒷받침하여 목표에 도달하도록 제 역할을 충실히 다한, 섬세하게 계획되고 실행된 무대 미학의 요소들 덕분이다.작품 《더 웰킨》의 디자인 요소들은 모두 통일된 컨셉(concept)아래 유기적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 있다. 서로 강하게 대조되지 않는 비슷한 계열의 색감과 단순한 운용을 공통으로 하고, 각(角)지지 않은 부드러운 자연스런 흐름을 가져가면서 배우들의 동선과 움직임이 그리고 그 무리가 만들어내는 형상의 이미지를 부조(浮彫)처럼 입체적으로 드러나게 돕는다. 그래서 작품은 때로는 그림자극 때로는 미술관 갤러리에서 디테일하게 조각된 인물상들이 마치 살아서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을 연상시킨다.
무대는 극도로 단순하다. 극장 공간에 들어앉은 직사각형의 하얀 사각 프레임(frame). 벽은 없이 건물의 사각 뼈대 구조만 튼튼히 버티고 있다. 이 기둥두께의 적절함은 어쩔 것인가. 정말 탁월하다. 상수 쪽엔 문이, 하수 쪽엔 벽난로가 있는데 두께는 없지만 표면은 디테일(detail)하다. 몇 개의 다양한 형태의 의자들이 놓여있는데 색감과 질감은 튀지 않고 비슷하게 통일되어 있다. 어떤 건물의 어떤 방. 별도의 특정한 사용이 없는 비어있는 온기 없는 방. 담백한 혹은 냉정한, 법원의 다락방이 설명적인 꾸밈없이도 구현된다. 연기공간은 3개의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사각 프레임의 주된 공간과 프레임 바깥의 깊은 어둠의 공간, 그리고 사각 프레임의 언저리의 바깥 공간이다. 주된 공간에서는 인물들의 주된 행동이 이뤄지고, 인물들이 들어서면서 비어있던 공간이 채워지는 듯하지만, 벽이 없으므로 답답하지 않고 오히려 찬 바람이 대책 없이 사방으로 불어와 통과할 것 같다. 인물들은 실내에 있지만 실외에 있고, 방안에 갇혀있는 듯하지만 황량하고 쓸쓸한 벌판에 그저 버려진 것도 같다. 논쟁의 열기로 꽉 채워진 뜨거운 공간이면서, 문득 기댈 대 없이 외로움에 웅크리게 되는 서늘하고 쓸쓸한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프레임 바깥의 깊은 어둠의 공간은 인물들이 이 방을 빠져 나와 알 수 없는 각자 어둠 속으로 멀리 천천히 사라지는 듯하기도 하고, 깊은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숨어있다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낼 것 같은 공포를 주기도 한다. 왓슨부인의 소리 없는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프레임 언저리의 바깥 공간은 비좁아 보이지만 그림자극처럼 작품의 메시지를 담은 타블로(tableau)장면에 적절히 사용된다.
무대의 이러한 다양한 분위기의 변화는 모두 조명디자인과 만나 이뤄지는 것인데, 19세기 아피아의 상징주의극처럼 색은 없어도 빛의 음영과 질감의 조화, 화려하거나 모나지 않으면서 부드러운 움직임, 간결하고 단순하지만 적절히 강력한 그 운용만으로, 무대의 구조와 인물을 만나, 마치 빛이 조각하듯 미장센(mise-en-scene)을 만든다. 디자인의 가장 기본이 가장 세련된 무대 미학의 깊이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빛과 공간 안에서 정교하게 구상된 인물들의 움직임과 모습은 물 흐르듯 모이고 흩어지면서 미학적 그림을 형상화한다.
본인은 그녀의 디자인을 참 좋아한다. 오수현디자이너의 훌륭한 의상은 디테일의 정수(精髓)다. 인물들의 체형, 용모, 나이, 지위, 헤어스타일, 등, 각기 다른 개성에 따른, 각기 다른 디테일이 살아있는 디자인, 다른 질감의 의상이면서도 청회색과 회색(본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지만 정확히 자신(自信)은 없다.) 계열의 동일한 색감을 선택하면서, 심지어 샐리 포피까지도 모두 한 무리인 것처럼 동질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한다.
아기 울음들. 벽난로에서 울리는 소리. 마치 으르렁대는 짐승의 울음처럼. 요란하게 떨어지는 까마귀. 어딘가 마음을 긁어대며 심신(心身)을 울려대는 소리. 조용히 빠르게 두근대는 심장.불안을 고조시키는 고동소리. 인물들의 심리를 자극하는, 원시적 원초적, 신비하고, 종교적(ritual) 이고, 광적인 음악과 음향. 각자 개성은 갖고 있지만 다른 무대요소들과 충돌하거나 튀어나오지 않으려는 무대, 조명, 의상과 달리, 이 작품의 음악과 음향은 과감하면서 자극적인 마법적(magical) 소리를 통해 인물들의 집단 심리를 이미지화(化)한다.
이 모든 것은 관객이 무대 위의 여인들, 인물들에게 기꺼이 충분히 장시간 집중하게 하며, 이렇게 잘 차려진 환경 속에서 배우들은 날개를 달고 연기의 꽃을 피운다.
작품 《더 웰킨》의 관객들은 미술관 관람객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인물들을 관찰하게 된다. 구경꾼 입장에서, 인물들의 처한 상황에 섣부르게 개입하고 감정이입 하기보다는 심리적 냉정을 유지한다. 연출의 의도일까…적어도 마녀사냥하듯, 진실의 앞뒤 여부와는 상관없이 원치 않는 결과에 무작정 휩쓸리듯 단죄하는 분노도, 동정과 연민에 차올라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죄악의 실체를 무시하는 어리석은 무지(無地)도 원치 않을 것이다.
현실에서 여전히 굴뚝에서 까마귀가 떨어져 죽고, 머리 위로 혜성이 떨어지는데도, 우리는 아직도 일상의 생존에 갇혀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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