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열정이 넘치는 사개탐사

‘2022 탐구생활 시리즈4 극단 사개탐사 자력갱생 프로젝트’

배선애(연극평론가)

각 극단마다 신작프로그램 개발과 단원들의 역량강화라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있다. 우선 떠오르는 대로 나열해보자. 극단 작은신화 ‘자유무대’, 드림플레이테제 ‘두드림 페스티벌’, 극단 백수광부 ‘신신당부’, 프로젝트 아일랜드 ‘단막극전’ 등등… 여기에 극단 사개탐사도 포함되는데, 그 명칭이 ‘탐구생활’이다. 단원들이 수많은 것들을 직접 탐구하고 찾는다는 의미가 강조된 이 프로젝트가 올해로 벌써 4회가 되었다. 2019년 ‘방과 후 살인’이라는 부제로 <햄스터 살인사건>, <크루> 두 편으로 시작한 프로젝트는 2020년에는 <수학은 어려워>, <성주신과 지신의 사랑>, <퇴직면접> 세 편을 ‘별책부록’으로 묶어서 공연했다. 2021년부터는 ‘자력갱생프로젝트’로 부제를 바꿔서 <체홉의 거울 조각>, <매일동안>을 공연했고, 올해는 <정열이 넘치는 뜨거운 남쪽나라>와 <청산에 살어있다>를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극단 사개탐사의 ‘탐구생활 시리즈’는 3회로 접어들면서 독자적인 성격을 지향하게 되었다. 바로 프로젝트에 참가한 단원들 전원이 대본을 공동창작하는 것이다. ‘자력갱생’이라는 명칭이 부기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좋은 작품을 발견하는 것도 필요한 안목이지만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직접 써보는 것도 중요한 역량에 해당한다. 공동창작을 통해 착안과 구조화, 인물의 형상화 등을 직접적으로 고민하고 공유하는 감각은 창작자로서의 책임감을 더욱 배가시킬 수 있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단원들의 역량개발은 물론이고 소속감도 강화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4회차인 올해 선보인 두 편의 공연 모두 참가하는 단원들 전체가 공동창작을 했다. 이런 지향의 관건은 이 활동 자체가 단원들의 만족으로만 그칠 것인지 아니면 연극계로 그 성과가 확장될 수 있는지의 여부일 것이다. 그렇게 확장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긍정성과 의미를 가져야 할 터, 극단 사개탐사 단원들의 열정은 그것을 충분히 증명했다.

<정열이 넘치는 뜨거운 남쪽 나라>

사진제공 극단 사개탐사, photo by 김솔

―공동창작(박혜선, 이은영, 이창수, 이한희, 정나진, 허용범), 박혜선 연출, 8월 24일~28일, 나온씨어터

이 작품은 출연한 배우들이 모두 공동창작 작가들이다. 김난희, 윤미희 두 사람이 드라마투르그를 맡았다. 공동창작에 드라마투르그는 필수다. 가득히 넘쳐나는 아이디어를 줄 세우고,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에피소드들을 빼거나 넣고, 장면과 캐릭터를 구체화하고 강화하는 작업들은 아무래도 창작 당사자가 아닌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을 가진 드라마투르그가 큰 힘을 보탤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북을 보면 이 작품의 창작 모티프는 입센이라고 한다. 입센의 작품들을 함께 읽으면서 각자 인상적인 캐릭터를 하나씩 선정하고 그 인물을 모티프로 배우들의 창작이 진행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 공연에서는 입센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입센이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입센 작품이 모티프라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좋았다. 비록 모티프는 입센이지만 그 흔적을 완벽히 지울 만큼 현실적인 인물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공간은 정열섬에 있는 남쪽나라 리조트. 정열섬은 한때 섬이었으나 매립되어 육지가 된, 끄트머리 땅이다. 거기 설립된 남쪽나라 리조트는 개발의 시간만큼 오래되었기에 신관과 별관으로 구분하여 오래된 별관은 장기투숙객이 머문다. 그 공간에 여러 인물이 존재한다. 리조트 사장의 양자인 진이 리조트 관리를 하고 있고, 투숙객으로는 은행지점장으로 파견된 파니, 자동차 텔레마케터 도도가 있다. 거기에 지역 뱃사람이자 파니의 (길러준) 아버지인 하재가 리조트를 들락거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흐고(도도가 명명했다.)가 잠시 나타났다 사라졌다.

여러 인물을 이렇게 열거한 것은 배우들이 집중한 것이 인물이기 때문이다. 개별 전사를 갖고 있는 인물들은 선명하게 잘 보인다. 각각의 인물들이 자기 이야기를 할 자리를 작가들 스스로가 마련해준 덕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물들 하나하나는 인상적인데, 그런 인물들의 관계맺음은 어딘가 어색한 부분이 있다. 하재(정나진 분)는 한때 딸이었던 파니에게 노후를 위해 돈을 요구한다. 이미 법적으로도 남남이 된 관계이며, 그 동안 연락한 적도 없고,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면 비굴해지는 하재인데, 느닷없이 3억이라는 돈을 요구한다. 이 뻔뻔함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파니(이은영 분)는 어떤가? 최연소 은행지점장의 타이틀에 걸맞게 자신과 일 모두에 열심이다. 요가로 몸을 단련하고 업무에 충실하며 업무 이외의 시간을 잘 활용하여 수많은 취미를 갖고 있다. 그런 파니에게 아버지라며 하재가 자꾸 질척거린다. 파니는 거침없이 밀어내고 어떤 경우는 투명인간 취급을 한다. 그렇게 된 이유는 충분히 설명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두 사람의 갈등이 갈등으로 보이지 않는다. 파니와 하재의 세상이 너무도 달라서일까? 30대 여성이 최연소 은행지점장이라는 설정부터 비현실적이어서일까?

사진제공 극단 사개탐사, photo by 김솔

파니와 대화를 나누는 유일한 인물인 진(허용범 분)은 설정은 멋있는데 하는 일은 호텔리어다. 빨래며 청소, 음식까지 직접 담당해야 한다. 말로는 직원들이 파업을 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진짜 직원들이 파업했다면 청소와 설거지를 할 것이 아니라 파업을 끝내기 위해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투덜대면서 여러 투숙객들을 살뜰히 살피고 살가운 대화를 나누는 진은 리조트를 이어받을 후계자라기보다는 다정한 호텔리어였다. 도도(이한희 분) 역시 여러 설정에 물음표가 생긴다. 도도의 직업은 텔레마케터. 감정노동이 심하기 때문에 그 보상심리로 회사 비품들을 몰래 빼오는 습관을 가졌다. 도도는 주식과 코인 투자에 실패해 정열섬으로 떠밀려 왔는데, 그런 직장인이 회사 근처에 집을 구하지 않고 리조트에 장기투숙을 한다? 거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에게 호감을 느끼는데, 아주 우연하게도 그 인물이 자신을 망하게 한 유튜버였다? 작품 마지막에 팔지 않았던 주식이 200배 수익을 창출해 서울로 돌아가는 도도는 과연 주식으로 인생 말아먹은 사람인가? 정체불명의 인물이었다가 유튜버로 밝혀진 흐고(이창수 분)도 같은 맥락이다. 인물 자체는 매력적인 설정이지만 다른 인물과의 관계를 보면 자꾸만 왜?라는 질문이 생겨난다.

인물 군상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서는 이 작품의 인물들은 모두 개성 있고 매력적이고, 인상적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그 목적을 성취했다. 배우들도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본인의 성격이 전제되어 있어서 자신만의 개성을 실을 수 있는 인물을 잘 형상화했다. 그런데, 다양한 인물을 보여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만한 갈등이 있다. 체홉의 <벚꽃동산>을 예로 들면 그 많은 인물들을 개별로 펼쳐놓은 듯하지만 실은 벚꽃동산 매각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정열이 넘치는 뜨거운 남쪽나라>에서 넘쳐나는 건 개성 있는 인물들이고 부족한 것은 관계와 갈등이다. 인물에 대한 고민이 매력적인 인물의 성격을 구축하는 결과를 낳은 만큼 인물들끼리의 관계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 더해 그 관계들을 적극적으로 교섭할 수 있는 중심 갈등도 고민해보면 어떨까 싶다.

<청산에 살어있다>

사진제공 극단 사개탐사, photo by 김솔

―공동창작(모형주, 안병준, 이혜림), 김관 윤색·연출, 8월 25일~28일, 나온씨어터

이 작품은 극단 사개탐사의 신입단원을 주축으로 창작되었다. 신입단원이라고 하면 연기초보 혹은 연극초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작품의 창작자들은 일명 중고신인, 그러니까 경력 있는 신입단원이라는 점이 반전이다. 그래서인지 작품에는 아이디어가 넘쳐나고, 배우들은 그 아이디어들을 무대 위에서 세련되게 펼쳐냈다. 세 명의 배우이기 때문에 작품에 집중도 잘 되었고, 인물들 각자의 사연도 잘 소개되었다. 아쉬운 점은 이들이 그래서 왜 깊은 산속 산장에 모이게 되었는지, 왜 죽음을 당하는지 그 이유와 관계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배우들은 여러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처음 설정된 인물은 각각 성관, 지영, 호철이다. 성관(모형주 분)은 청년이다. 고등학생의 취업을 위한 프로그램 우승자였기 때문에 고졸이어도 대기업에 취업했다. 세상을 다 가질 것만 같았던 성관은 회사에서 사회의 무수한 편견들과 선입견을 마주한다. 군대를 다녀와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래서 죽기로 결심, 산속을 헤매다 산장을 발견한다. 성관의 이러한 과거는 신속한 장면전환으로 재현되었다. 지영(이혜림 분)은 능력 있는 직장인이었지만 결혼과 출산으로 경력단절이 된다. 어쩌다 내림굿을 받게 되어 무당이 되는데 여기저기서 들러붙는 귀신들 때문에 항상 머리가 아프다. 진짜 무당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어설프고, 무당이 아니라고 하기엔 귀신들이 항상 따라다닌다. 여자로서 살아온 세월들을 주마등처럼 무대 위에 펼쳐내면서 지영의 이야기가 구체화되었다. 호철(안병준 분)은 산장 주인이다. 우연히 찾아온 성관, 내림굿을 해준 만신이 꼭 찾아가라고 해서 찾아온 지영. 두 사람의 사연을 함께 하지만 결국은 두 사람을 죽인다. 호철은 청산개발사업을 주도한 사기꾼이었고 그로 인해 세상에서 지워진 존재,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복수가 인물들에게도 적용되었고 그래서 성관과 지영을 ‘동반자살’이라는 명분으로 죽이게 된다.

사진제공 극단 사개탐사, photo by 김솔

<청산에 살어있다>의 인물들은 그 자체가 강한 대표성을 띠고 있다. 청년, 여성, 개발. 익숙하다보니 뭐가 새로울까 싶은데, 창작자들은 인물의 전사를 변주함으로써 새로움을 꾀했다. 청년의 문제는 고졸과 취업프로그램 우승자라는 설정을 넣었다. 청년실업이라고 하면 대학을 졸업한 경우만 집중하게 되는데, 그 시선을 넓혀 실제 고졸 취업생, 나아가 진정한 의미의 청년 실업을 문제삼았다. 여성에 대해서도 결혼, 출산,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은 익숙하지만 그 타개책으로 내림굿의 무당을 선정한 것은 특이한 점이다. 4차산업혁명을 논하는 시기에 무당이라니. 그럼에도 무당과 법사가 정답인 듯한 요즘의 상황은 무당을 매우 현실적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수없이 빙의하는 귀신들이 각자 사연이 있고, 그런 사연을 담아야 하는 지영의 고통. 여성과 경력단절이라는 뻔한 것을 뻔하지 않게 펼쳐내는 선택이었다. 사기꾼 호철은 개발논리와 일확천금을 은유하는 존재였다. 청산개발사업이라는 개발논리가 여전히 먹히고 있는 시대에 대한 풍자, 거기에 투자금의 몇 배를 돌려받을 수 있다는 일확천금의 욕망을 이용하는 자본의 논리. 호철이 들려주는 ‘원숭이 이야기’가 이것들을 응축하고 있었다.

개별 인물들의 개성과 원인, 은유의 내용과 상징의 맥락들은 충분히 이해되고 파악되었지만 그 관계는 여전히 모호하다는 것이 <청산에 살어있다>의 아쉬운 점이다. 나무에 집중하다보니 숲이 어떤 모양인지 간과했다고나 할까. 인물이나 장면에 의도가 앞서 있어서 거기에 대사와 행동을 끼워 맞추는 형국이었다. 배우들의 수많은 역할놀이, 장면의 신속하고 빈번한 전환은 작품 전체적으로 속도감을 불러일으키는 한편으로 산만하기도 했다. 도대체 이 인물들이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지? 그 질문이 계속 나오게 된 것은 이런 산만한 분위기 탓이기도 하다. B급을 지향하는 블랙코미디의 지향은 효과적이었다. 그래야만 이 무거운 주제와 인물들을 비교적 가볍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실현에서는 각각의 장면을 조금은 다듬을 필요가 있다.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장면이 바뀌고 배우들의 대사가 정신없이 흘러가버리면 관객은 무엇을 잡아야 할지 난감해진다. 뭔가 알아차려야 할 것 같은데 놓친 것 같은 허전함. 이 작품은 그 점만 보완한다면 풍자와 유머가 곁들여진, 유쾌하면서도 날카로운 작품이 될 것이다.

‘탐구생활 시리즈4’의 두 편을 보고는 ‘극단 사개탐사는 걱정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을 구상하고 창작할 수 있는 단원들의 역량이 차근차근 축적되고 있는 것이 보였고, 대본 창작은 물론이고 그것을 무대에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방법까지도 함께 고민하는 에너지를 느꼈기 때문이다. 단체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싶다. 거액의 지원금을 받는 것도 단체에게 큰 도움이 되는 일이겠지만, 단체를 구성하는 단원들 개개인의 역량이 서서히 단단해 지는 것, 다 함께 조금씩 성장해가는 것. 이 힘이 궁극적으로 단체를 움직이고 버티게 하는 힘일 것이다. 그래서 극단 사개탐사는 정말 걱정이 없겠다. 내년 제5회 탐구생활에서는 극단 사개탐사 단원들이 자력갱생을 어떤 양상으로 보여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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