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Faust)’
일이백 명이 연주하는 <파우스트>
베를리오즈 ‘4부의 극적 이야기, 파우스트의 겁벌’
– 임야비(tristan-1@daum.net)
소설가, 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극단 듀공아, 외계 공작소, 동맹, 아레떼 연출부 드라마투르그
이번에 소개할 베를리오즈의 ‘4부의 극적 이야기, 파우스트의 겁벌 (La Damnation de Faust, Legende dramatique en 4 parties)’는 지난 10월에 연재한 슈만의 ‘괴테 파우스트의 정경’과 같이 독창자와 합창단 그리고 오케스트라가 동원되는 대규모 콘서트 오라토리오 형식의 음악이다.
음악사에 ‘표제 음악’이라는 굵은 족적을 남긴 작곡가 베를리오즈는 연극광(狂)이었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좋아해서 극적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 대서곡 ‘리어왕’과 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런 그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베를리오즈는 의대생이었던 19살 때 파우스트를 처음 읽었다. 그 후, 의술의 길을 접고 예술의 길에 들어선 26살에 ‘파우스트의 여덟 장면’을 작곡하여 op.1 즉, 작품 번호 1번으로 출판했다. 1829년 베를리오즈는 악보를 헌정사와 함께 악보를 괴테에게 보냈지만, 괴테는 실제 음악을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젊은 베를리오즈의 야심작 ‘파우스트의 여덟 장면’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그로부터 약 15년이 흘러 40대가 된 베를리오즈는 자신의 초기작을 수정해서 괴테의 파우스트와 같은 대작을 쓰기로 결심한다. 예전의 여덟 장면은 수정 보완 작업을 거치고 거기에 새롭게 12개의 장면을 추가해서 총 4부 20장면의 거대한 음악극을 완성한다. 그것이 바로 이번에 분석할 ‘파우스트의 겁벌’이다.
‘파우스트의 겁벌’은 원작의 ‘비극 1부만’을 다루지만 스케일은 1, 2부를 합친 것보다 크다. 독창자는 브란더(Brander)를 포함하여 4명이고, 합창단은 혼성 2부 합창에 어린이 합창단까지 필요하다. 3~4관 편성의 관악기 군단을 필두로 두 대의 팀파니를 위시한 각종 타악기와 하프 그리고 최소 59명의 현악기 연주자가 필요하다. 지휘자마다 차이가 있지만, 연주 시간도 대략 2시간에서 2시간 30분 정도다.
하지만 전혀 겁먹을 필요 없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규모는 크지만 막상 음악은 실내악적 요소가 많아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음악의 진행은 베를리오즈의 세심한 장면 연출 덕에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듯 흘러간다.
그러면 독일인 괴테가 글로 쓴 희곡을 프랑스인 베를리오즈가 음으로 연출한 ‘비극 1부’를 살펴보자.
1부 (총 3장면, 약 20분)
장면 1에서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 헝가리의 평원이 뜬금없이 등장한다. 이후 이어지는 장면 2와 장면 3도 원작에는 없는 부분인데, 베를리오즈가 이를 삽입한 이유는 공연의 흥행을 위해서다. 1846년 베를리오즈는 부다페스트로 연주 여행을 떠났는데 이때 헝가리의 민속 음악에서 주제를 차용해 작곡한 ‘라코치 행진곡’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래서 베를리오즈는 이 장대한 곡의 머리에 자신의 히트 작품을 배치했고, 이야기의 연결을 위해서 파우스트를 헝가리에 세워 놓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베를리오즈의 이 작품이 통째로 평가절하가 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장소만 헝가리일 뿐, 베를리오즈는 파우스트의 좌절과 고독을 아리아와 관현악으로 매우 심도 있게 표현했다. 흥행을 위해 살짝 삽입한 연출, 작품 전체로 보면 애교로 넘길 수 있는 연출이다. 하지만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곡을 완주하는 연주회는 드물고 장면 3의 ‘라코치 행진곡’만 따로 떼어 연주하는 경우가 대다수인 걸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 뿐이다.
2부 (총 5장면, 약 45분)
저음으로 파우스트의 고뇌가 깊어진다. 결심이 선 파우스트가 자살 시도를 할 때, 멀리서 부활절의 합창이 들려온다. 베를리오즈는 이 부분에서 과감한 조성 변화로 삶을 이어가려는 파우스트의 의지와 구원의 메시지를 동시에 연출한다. 메피스토펠레스는 고뇌와 성스러움의 정 반대편에서 등장한다. 음산한 악마의 멜로디는 모두 분절되어 있다. 장면 6은 라이프치히 아우어바흐 술집 장면이다. 베이스인 브란더가 ‘쥐의 노래’를 부르면 술꾼들이 합창으로 성스러운 ‘아멘’ 푸가를 부르고, 메피스토펠레스가 냉소적인 ‘벼룩의 노래’를 부르면 흥분한 술꾼들이 ‘브라보’를 연호하는 명장면이 나온다. 대조적인 상황을 성과 속의 음악으로 표현한 이 부분에서 베를리오즈의 대가적 연출법을 엿볼 수 있다. 이후 장면 7에서 메피스토는 파우스트를 엘베강으로 데려가 아름다운 요정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공기 요정의 발레’ 음악은 신비로운 분위기로 시작해서 점점 밝고 생기 있는 리듬으로 바뀐다. 이런 식으로 베를리오즈는 비현실의 요정이 현세의 욕정을 깨우는 장면을 절묘하게 표현한다.
3부 (총 6장면, 약 45분)
3부는 본격적인 사랑 이야기다. 장면 9에서 파우스트는 마르게리테의 방에 숨어들어 설렘을 노래한다. 그리고 여주인공의 첫 등장인 장면 11에서 ‘툴레의 왕’을 부른다. 베를리오즈는 이 곡에 사랑과 이별의 분위기를 교차시켜 극 후반부에 벌어지는 마르게리테의 비극을 복선으로 깔아 둔다. 괴이한 ‘도깨비의 미뉴엣’와 메피스토펠레스의 비열한 아리아가 이어지지만, 정염에 휩싸인 둘의 사랑은 장면 13의 이중창으로 절정을 이룬다. 기회를 놓칠세라 메피스토펠레스가 끼어들어 노래는 삼중창이 되고 합창까지 가세하며 긴장을 고조한다.
3부에서 베를리오즈는 파우스트 독창→마르게리테 독창→메피스토펠레스 독창→파우스트와 마르게리테의 이중창→파우스트, 마르게리테, 메피스토펠레스의 삼중창→합창이 가세한 피날레로 구성하여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사랑과 비극을 규모의 크레셴도로 연출한다.
4부 (총 6장면, 약 40분)
4부의 시작은 수많은 작곡가들이 같은 텍스트에 곡을 붙인 ‘물레 앞의 그레트헨’이다. 베를리오즈는 이 공에 ‘로망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애달픔에 집중한다. 이어 장면 17에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 함께 말을 타고 그녀에게 달려가지만 너무 늦었다. 이 부분에서 베를리오즈는 슈베르트의 명곡 ‘마왕’ 못지않은 긴장감과 속도감을 연출한다. 결국 파우스트는 지옥에 떨어지고 내기에서 이긴 메피스토펠레스는 쾌재를 부른다. 작품을 통틀어 가장 파국적이면서 가장 괴기한 부분으로 메피스토펠레스의 악마성은 이 부분에서 가장 큰 음량으로 절정에 닿는다. 하지만 이어지는 최종 장면 ’천국에서, 마르게리테의 구원’에서 분위기는 급격하게 성스럽게 바뀌어 앞의 악마성과 완벽한 대조를 이루며 조용히 곡을 마친다. ‘괴기한 큰 음량’과 ‘성스러운 작은 음량’의 극단적인 대비는 ‘연극쟁이’ 베를리오즈의 의도적인 연출이다.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편(2022년 9월호)에서 언급했듯이, 베를리오즈는 서양 음악사상 바그너 다음으로 혁명적인 작곡가이자 위대한 ‘연극쟁이’였다. 그는 형식이 내용이 지배하던 고전주의를 혁파하고 낭만주의의 문을 활짝 연 프랑스 혁명가였다. 그는 오페라가 아닌 콘서트 오케스트라에 연극적 요소를 거침없이 이식한 개척자이기도 했다. 이런 그의 극적 연출력을 여실히 들려주는 작품이 바로 ‘파우스트의 겁벌’이다.
베를리오즈가 시도한 음악과 연극의 유리알 유희는 후배 작곡가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다음 호에는 베를리오즈가 ‘파우스트의 겁벌’을 헌정한 프란츠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을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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