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이 되라(Soyez vous-même)>

김영은(연극평론가)

사진제공 @김보경

신선한 작품

프랑스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콤므 드 벨시즈의 연극 <너 자신이 되라(Soyez vous-mê̂me)>(2017 초연, 2019 출판)를 관람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자발적 폐쇄 공간이 조성하는 압도적 분위기, 그 공간 속에서 증폭하는 불편함들, 손쓸 수 없이 마구 증강하는 괴상한 현실, 그 괴상한 현실 속으로 무한히 빠져드는 나약한 인간 존재! 어딘가 기시감이 든다. 이오네스코가 다시 돌아와 결 다른 현대판 부조리극이라도 내놓은 것일까? 결 다른 부조리극? 근거 없는 논리들의 무한반복, 거기에 존재하는 부조리한 현실, 무대를 잠식해가는 이러한 연극적 요소들은 이오네스코 연극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이오네스코가 전제로서 부조리한 상황을 제시하고 그 속에 갇힌 나약한 인간존재를 그린 것이라면, 콤므 드 벨시즈는 인간존재의 나약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도래하고 마는 부조리한 상황을 그리고 있다. 기시감과 신선함이 혼합된 이 작품은 최신 프랑스 연극을 소개하고자 노력하는 까띠 라뺑 연출과 임혜경 드라마투르그의 합작으로 탄생했다.

웃긴 상황, 그러나 웃을 수만은 없는 현실

연극은 락스 회사의 면접시험에 참가한 한 응시자(젊은 남성)와 면접감독관(시각장애 여성 부장)의 면접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여성 부장은 락스가 세상을 정화시킨다는 성스러운 신념 하에, 락스 광고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 또 광고를 위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어떻게 새로워져야 하는지에 대해 설교한다. 응시자는 종교음악으로 광고를 내면 좋겠다는 의견이나 종교신문잡지에 광고를 내면 좋겠다는 의견들을 제시하며 최대한 그녀의 구미에 맞도록 대응한다. 하지만 어색할망정 그나마 커뮤니케이션 부서 일과 관련된 대화는 거기서 끝난다. 본격적 면접이 시작되면, 부장은 도가 지나친 질문을 내놓기 시작한다. 얼굴이 잘생겼는지, 성형수술은 했는지, 섹스를 잘하는지 등 부서 업무와는 전혀 관련 없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어린 시절은 어떻게 보냈는지, 어머니와는 친한지, 애인은 있는지 등 지극히 사적인 질문까지 어처구니없는 질문들을 쏟아낸다. 응시자는 이러한 질문들에 당혹스러워하지만 자신의 업무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성실히 대답한다. 활동적이고 업무능력도 있으며 열정적이고 평판 좋고 책임감도 강하다며 자신의 장점을 하나하나 열거해보지만, 그런데도 그녀의 질문은 점점 더 미궁처럼 난감해진다. “당신은 누구세요?” “당신의 내면을 보여주세요.”

사진제공 @김보경

가짜 자기말고 진짜 자기를 보여줘라

여부장의 질문은 시간이 갈수록 변질된다. 겉으로 드러난 ‘가짜 자기’ 말고 숨겨진 ‘진짜 자기’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주문한다. 벽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 문구를 가리키면서 “직업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철학적으로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며 심리학적, 철학적 질문과 답하기 어려운 대책 없는 질문들을 이어간다. 갑자기 황당하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하기도 하고, 옷 벗고 춤을 추라고 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자신을 유혹하라고 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타인과 대면하고 장벽과 마주하면서 ‘진짜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이라고 추궁한다. ‘진짜 자기’를 드러내 보이는 것, 바로 그것이 가장 강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연극말미에 부장은 마침내 모든 관문(?)을 통과한 이 젊은 남성에게 마지막 단계가 남았다며,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쓸 용기가 있냐고 질문한다. 그리고 응시자는 기꺼이 그 질문을 받아들이며 그녀가 시키는대로 총알이 든 권총을 자기 머리에 겨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긴다. 부장은 이런 그를 보며 “꼭대기에 와있는 느낌이야”라며 여전히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잇는다. 이렇게 연극은 끝이 난다.

위험한 장벽 앞에 서면 진정한 자신이 된다?

이 연극은 사회 체제나 조직이 제의한 공적이면서도 정당한 절차인 ‘면접’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사람들은 얼마나 무자비하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고 또 이에 얼마나 무한히 복종할 수 있는지, 즉 면접감독관과 응시자라는 관계 속에서 어떻게 권력 행사와 복종 행위의 전형화되는지 그 현실적 형식을 그린다. 더 나아가 그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 우리의 정상적인 생각과는 얼마나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지 그 실상을 목도하게 한다.

위험한 장벽 앞에서만 진정한 자신이 드러나며, 그 ‘진정한 당신’을 보아야 평가할 수 있다는 면접감독관의 질문-횡포는 점점 더 과감해지고, 이에 비례해서 면접응시자의 응답-고통의 강도는 점점 더 커간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가 만들어내는 폭력은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강화되어간다.


사진제공 @김보경

언어연극, 풍자 코드

무대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은 ‘언어’다. 우선 나름대로 논리적인 문답형식의 대화가 피상적으로 흐른다. 그러나 대화의 힘은 예상치 않은 방향을 향해 이동한다. 면접의 근본 목적과 그것을 수행하는 언어 기능은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에 폭력과 복종의 언어가 자리한다. 결국 공식적이고 일상적인 면접행위 대신에 비현실적인 일들(노래, 춤, 유혹, 자살)이 벌어진다. 대화의 소통적 의미는 희석되고, 면접관의 욕구가 어떻게 팽창하는지, 심판대에 오른 수동적 응시자의 자기 극복 욕구가 어떻게 팽창되는지를 묘사하는 언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결국 인간을 판단하기 위해 고안된 언어적 제도와 형식이 인간 자체를 얼마나 구차하고 피폐하게 만드는 상황에 이르게 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렇듯 연극은 면접이라는 형태가 담지하고 있는 전형적인 언어 소통 체계를 풍자적으로 조롱한다. 우선 황당무계하게 설정된 면접 상황 자체가 소극효과를 준다. 그리고 절대권력자(면접감독관)의 엉뚱하고 거침없는 질문들, 합격하려는 절박한 소망 때문에 한없이 굴종하는 젊은 남성(면접응시자)의 허약한 답변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기이한 분위기, 어색한 논리로 연결되는 비합리적 대화법 등도 불편하면서도 어이없는 웃음을 유발한다. 사회적으로 정당화된 소통의 언어가, 인간이 믿는 그 언어가 얼마나 인간을 핍박하고 왜소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며, 지극히 일상적이고 지극히 평범한 일들이 어떻게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진제공 @김보경

언어연극을 감각화한 연출 무대

조직은 늘 개인의 역량의 최대치를 원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최대치를 산출하기 위해 노력한다. 연출은 자본주의 조직의 강력한 사회시스템과 그 속에 내던져진 나약한 인간 존재를 시각적 메타포를 통해 표현한다. 우선 의상의 대조가 돋보인다. 조직의 힘을 강조하는 면접감독관은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흰색 정장에 흰색 구두, 은색머리에 검은색 썬글래스를 쓰고 있다. 냉정할 정도로 딱딱하고 엄격한 모습이다. 반면 잘생긴 젊은 남성의 면모를 한껏 자랑하는 면접응시자는 흰색 바탕의 빨간 체크무늬 와이셔츠, 파란색의 자켓, 자주색 바지에 자주색 구두를 신고 있다. 대조적인 언어 리듬도 돋보인다. 면접관은 딱딱 떨어지는 명료한 발음을 통해 규격있는 언어리듬을 연출한다. 응시자는 부드럽고 자유로운 발음으로 그녀와는 템포를 달리하여 일상적 언어 리듬을 연출한다. 이러한 구분된 언어리듬은 권위와 복종의 위계구조를 청각화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감독관의 열정은 더욱 거칠게 변하는데 그것은 집중과 몰입의 태도를 통해 표현된다. 감독관의 언어폭력의 수위가 높아짐에 따라 응시자의 당황 정도와 복종 수위도 높아지면서 지배 욕망과 순종적 반응의 위계구조를 형성한다. 절제된 태도에서 열정적 태도로 변화하는 면접관의 행위, 그리고 순진한 태도에서 순종적인 태도로 변화하는 응시자의 행위는 이런 위계구조를 명징하게 시각화한다. 젊은 응시자가 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 짐볼을 만지작거리는 손놀림은 텍스트에 흐르는 블랙유머 코드를 더욱 감각화하는 기능을 한다.

이 대립적 인물들을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은 흰색 사각형의 무대장치다. 무대 양옆은 어두운 빈 공간으로 놔둔 채, 한가운데에 사각형 무대를 설치했는데, 어둠과 대비되는 이 밝은 사각형 공간은 바닥과 벽 전체를 모두 흰색으로 처리했다. 뒷벽에는 락스통이 일률적으로 정렬하여 전시되어있고 그 위에 “너 자신을 알라”라는 그리스어가 보인다. 벽 아래쪽 한 부분에는 역삼각형의 작은 거울이 붙어있는데, 거울을 통해 투영되는 인물의 모습은 그가 가진 또다른 모습을 형상화해주는 듯하다.


사진제공 @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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