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수진(연극평론가)
비극의 역사는 얼마의 시간이 흘러야 담담히 마주할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마음의 부담을 덜어내고 다가가도 되는 것일까. 이런 관객의 고민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극단 하땅세의 <시간을 칠하는 사람>은 관객을 철저히 비극의 시간 속으로 데려가면서도 슬픔에 침잠하지 않고 역사를 마주하게 한다. 그것도 지극히 연극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5월 레퍼토리 <시간을 칠하는 사람>(김민정 작, 윤시중 연출)은 ‘광주’와 ‘5월’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5.18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다. 옛 전남도청 건물을 중심으로 페인트칠을 하던 칠장이 영식과 아내 명심, 아들 혁의 이야기는 도청 건물이 철거되던 2008년을 시작으로 영식과 명심이 처음 만났던 1960년, 수많은 광주 시민이 목숨을 잃은 1980년을 오가며 펼쳐진다.
관객이 극장 안에 들어서서 처음 마주하는 것은 블랙박스 무대 위에 마련된 객석과 그 앞에 세워진 도청건물의 모습이다. 멀리서 보면 그리 높지 않아 보이는 이 3층 건물은 객석과 매우 근접해 있어 관객을 압도한다. 게다가 영식의 죽음을 암시하는 첫 장면으로 관객은 곧 비극적인 이야기가 재현될 것을 예상한다. 그러나 과거로 뛰어넘은 이야기는 영식과 명심의 풋풋한 첫 만남, 할머니를 비롯한 공무원과 칠장이들의 코믹한 장면들이 이어지며 관객의 예상은 빗나간다. 작품은 수시로 비극과 희극, 시대와 시대를 넘나든다. 영식과 어린 혁의 행복한 모습은 빠르게 이동하는 흰 벽들 사이에서 청년이 된 아들 혁이 군부독재에 희생되는 모습으로 뒤바뀐다. 5월의 따뜻한 봄날을 누리던 사람들도 순식간에 탱크와 총성에 쓰러진다. 이런 다양한 상황의 혼재와 빠른 전환은 관객이 어느 한 장면이나 이야기에 머물러 역사적 사건의 비극성에만 주목하지 않게 거리감을 확보해 준다.
그러나 관객이 마냥 작품에서 물러나 있는 것은 아니다. 관객은 무대 사면을 돌아가는 이동 객석 위에서 때로는 모든 이야기를 지켜보는 목격자가 되고, 때로는 탱크 위에 올라탄 군인이 된다. 이동 객석은 자체로 관객에게 새로운 스펙터클을 선사하지만, 무엇보다 영화적 기법을 연극적으로 체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객석이 이동하기 때문에 고정된 세트의 무대임에도 관객은 마치 영화의 카메라 앵글이 바뀌는 것처럼 연출이 의도한 미장센을 보게 된다. 또한 객석이 앞뒤로 이동하면서 카메라의 줌 인(zoom in), 줌 아웃(zoom out) 같은 움직임이 가능하기에 관객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함께 빠져들기도 하고 관찰자가 되어 그저 멀리서 지켜보기도 한다.
극단 하땅세는 단순한 재현이 아닌 다양한 연극적 표현, 은유와 상징을 통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에 탁월하다. 이번 작품에서도 넓게 펼쳐진 무대 바닥을 건물 벽으로 표현해서 페인트칠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고, 극장의 검정 커튼을 독재정권으로 상징하여 청년 혁을 삼켜버리는 모습을 시각화하기도 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영식과 명심의 첫 만남에서부터 작품 전체에 등장하는 푸른 사과이다. 이 사과는 생명력을 상징하기에 군화에 짓밟힌 혁의 사과는 그의 죽음을 암시한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넓은 무대에 남겨진 수많은 사과들도 희생된 광주 시민들의 흔적처럼 보인다. 그러나 배우들이 일렁이게 하는 무대의 바닥 천 위에서 이리저리 구르는 사과는 시대적 비극을 딛고 소생하는 생명력을 표상한다. 때문에 관객들은 마냥 슬픔에 빠진 채로 극장을 나오지 않는다.
<시간을 칠하는 사람>은 극 중에서 ‘5.18’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단 한 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연극이 할 수 있는 다양한 표현으로 역사 속 비극의 시간을 애도와 희망으로 칠한다. 마지막 사과 장면이 나오기 전 이동 객석은 전체 무대를 한 바퀴 돈다. 이 때 각 공간에는 작품 속 인물들이 저마다의 행복한 순간으로 서 있다. 이 작품이 공연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서 있는 자리에서 43년 전 무고하게 생명을 잃었던 광주 시민들도 작품 속 사람들처럼 우리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지 않을까.1 아픈 기억에만 머물지 말고, 그들의 희생이 계속 유의미할 수 있도록 강한 생명력으로 행복하게 살아가 달라는 마음과 함께.
광주 518은 이야기가 끝이 없네요. 끝이 없어야 하구요. 연극으로 또 하나의 증언과 기록을 남겨줘서 고맙습니다. 평론가님이 짚어주고 풀어준 부분들을 따라가다보니, 작품을 만든분들이 소재를 참 정성껏 다루셨구나 느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