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임야비(tristan-1@daum.net)
소설가, 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극단 듀공아, 외계 공작소, 동맹, 아레떼 연출부 드라마투르그
음악과 시(詩)로 연출한 부조니의 파우스트.
본격적으로 부조니의 ‘미완성 오페라 – 파우스트 박사’, 아니 ‘음악을 위한 시(詩) – 파우스트 박사’를 분석해 보자.
Symphonia / 서시(序詩)
‘파우스트 박사’의 도입부는 오페라 역사상 가장 특이한 형식이다. 부조니는 시작부터 시와 음악을 결합한다. 막이 내려간 상태에서 오케스트라가 서곡에 해당하는 ‘Symphonia’를 연주한다. 곡은 감정에 충실한 후기 낭만과 기괴한 현대 음악의 중간 정도의 울림을 유지하는데, 극 전체의 정서를 암시하는 훌륭한 기악곡이다. 그런데 갑자기 ‘Pax(평화)’라는 무대 뒤 합창이 울려 퍼진다. 오페라 서곡에 합창이 들어가는 경우는 아마 부조니가 유일할 것이다. 원작 파우스트의 시작은 부활절이므로 연출 의도가 명확하다. 하지만 부조니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Symphonia – Prologue I – Prologue II – Intermezzo에 미사곡(라틴어)을 합창으로 삽입한다. 부조니는 비극의 주인공 파우스트가 울부짖는 ‘신의 부재(不在)’를 ‘비극적 미사’로 꼬아 연출한 것이다. 부조니의 전통 파괴 연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Der Dichter an die Zuschauer에서 시인(낭독자)이 등장하여 ‘서시’를 낭송한다. (부조니가 직접 쓴 시인데, 안타깝게도 너무 길어서 공연 때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종합 예술가 부조니는 음악과 시를 버무린 연출로 극을 시작한다.
Prologue I
연구실에서 고뇌하는 파우스트 앞에 제자 바그너가 등장한다. 불협화음으로 범벅이 된 바그너의 노래는 매우 불길하다. 이어 파우스트가 자신의 불행을 노래하는데, 현대 음악이라고 하기에는 선형적인 멜로디가 잘 살아 있고, 그렇다고 낭만 음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그로테스크하다. 바로 이 경계층이 극의 사운드 전체를 지배한다. 이어 성경의 세 동방 박사를 패러디한 것으로 보이는 음산한 분위기의 세 학생이 등장하여 파우스트에게 ‘Clavis Astartis Magica‘를 전달한다. 이 성물(聖物) 같은 소품은 파우스트의 부활과 계약 그리고 욕망과 파멸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 실체가 너무 구체적이어서 극의 전체 효과를 떨어뜨린다. 이는 극작가이자 연출가 부조니의 결정적인 패착이다.
Prologue II
텅 빈 연구실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자정이 된다. 오케스트라는 서곡과 비슷하지만, 훨씬 빠른 템포로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관악기의 날숨이 현의 트레몰로에 얹히면서 파우스트가 등장한다. 그가 Clavis Astartis Magica를 작동하자 매우 낮은 베이스 음역의 악마 ‘그라비스’가 소환된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하급 악마’인 그라비스를 단번에 쫓아낸다. 이어 조금 더 높은 음역의 두 번째 악마 ‘레비스’가 나오지만 이 역시 마찬가지다. 세 번째 악마 ‘아스모두스’, 네 번째 악마 ‘벨제붑’, 다섯 번째 악마 ‘메가로스’까지 점차 음정이 계단처럼 높아진다. 대학자인 파우스트는 허접한 악마들에게 경멸의 눈빛을 보내며 자신과 범접할 강력한 악마를 찾는다. 그러자 마지막 여섯 번째로 남성 성악가의 가장 높은 음역인 테너 ‘메피스토펠레스’가 등장한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묻자, 파우스트는 ‘존재하는 모든 욕망의 만족 – 천재성, 행복, 완벽한 자유’를 요구한다. 메피스토펠레스가 ‘그 대가는 죽음’이라고 이야기하지만, 파우스트는 앞의 다섯 악마와는 차원이 다른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는다.
부조니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첫 등장에 음악적 연출을 한껏 가미했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음악으로 구현한 기악곡이나 오페라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보통 저음 악기나 남성의 가장 낮은 목소리인 베이스가 담당하지만, 부조니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음역을 가장 높은 테너로 선택했다. 이를 위해 부조니는 ‘악마 대백과 사전’ 같은 다섯 악마 소개 부분에 ‘크레센도’ 같은 효과를 넣어 최상위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특별하게 강조한다. 그래서 부조니의 메피스토펠레스는 남성적인 힘과 어둠이 가득한 악마가 아닌 지능적이고 아름다운 유혹자가 된다. 테너인 유혹자의 음정이 높아질수록 베이스-바리톤인 파우스트와 극적인 대조를 이루면서, 극 진행 내내 고음의 메피스토펠레스가 저음의 파우스트를 찍어 누르는 듯한 효과를 낸다. 부조니는 이런 음악적 연출을 통해 메피스토펠레스의 교활함을 상승시키고, 파우스트의 우둔함을 침강시킨다.
부조니의 연출이 빛나는 또 다른 부분은 삽입된 합창이다. 합창은 모두 라틴어로 가톨릭 미사 통상문으로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는 장면에서 사도신경의 Credo in unum Deum. (하느님을 믿습니다), Et resuurexit tertia die. (셋째 날에 부활하시었도다.)를 부른다. 부조니는 부드럽고 성스러운 미사곡을 악마와의 계약 장면에 정통으로 삽입함으로써 시각과 청각의 극단적 대비를 만들어 낸다. 이 간극 사이로 불길함이 용암처럼 분출된다. Prologue II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더 극단적이고 극적이다. 합창이 영광송 Gloria in excelsis Deo et in terra pax.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화)을 부를 때,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향해 Gefangen! (잡았다!)라고 소리친다. 그러자 성가대는 Alleluja(할렐루야)를 외치며 장을 마친다.
Intermezzo (간주곡)
부조니는 간주곡에도 특별한 연출을 넣었다. 보통 오페라의 간주곡은 막과 막 사이에 연주되는 장면 전환용 기악곡인데, Prologue II와 Scene I 사이에 삽입된 부조니의 간주곡은 장면과 음악이 있는 짧은 극이다. 그는 ‘간주곡’이라는 하찮은 형식을 적극 활용해 파우스트 비극 1부의 내용을 축약하고, 원작과 ‘닥터 파우스트’를 효과적으로 연결한다.
음악은 성당 오르간의 장중한 연주로 시작한다. 병사가 십자가 앞에서 병사가 여동생의 복수를 맹세한다. 병사의 순진무구한 여동생은 파우스트에게 버림받은 순진무구한 처녀다. 부조니가 두 인물의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처녀는 괴테 원작의 그레트헨이고, 병사는 발렌틴이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에게 병사의 살의를 이야기하자, 자기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던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병사를 죽이라고 명령한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모략을 펼치자 음흉한 음악과 군대 행진곡이 얽히고설킨다. 병사는 결국 장교에게 죽임을 당하고, 메피스토펠레스는 성당 오르간의 성스러운 음악을 온몸으로 비웃는다. 부조니는 ‘믿는 자의 죽음과 믿지 않는 자의 승리’라는 플롯과 ‘성당 십자가 아래의 두 악당’이라는 괴이한 장면을 저음으로 웅장하게 깔리는 오르간 음향과 메피스토펠레스의 고음으로 연출한다.
철학자와 극작가를 지향했던 작곡가 부조니. ‘닥터 파우스트’의 간주곡은 부조니가 천착했던 “음악을 위한 시(詩) – Dichtung für Musik”라는 장르에 걸맞은 창조적 연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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