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장용철(극단 작은신화, 좋은희곡읽기모임
진짜 연기는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절대배우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로 합니다. 앞에서 쓰지 말고 뒤에서 쓰는 일이 필요합니다. 나도 모르는 길을 앞장서려고 하지 말고, 내가 겪고 있는 이 진흙탕을 더 잘 디뎌보는 일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잊히지 않고 떠오를 때마다 가슴 먹먹한 기억입니다. 무대가 아니라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완성해야 하는 일은 좀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다음 기회에 나누기로 하고, 그날 그 순간에 만났던 감정을 여기에 적어봅니다.
촬영 현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날의 화두는 ‘진짜란 무엇인가?’였습니다. 완성품을 요구하는 순간, 완성품이 절실해지는 순간들, 내가 완성품이 되지 못한다는 절망이 찾아옵니다.
처음 캐스팅 의뢰로 전화가 왔을 때 우선 알겠다고는 했지만 배역이 맘에 들지 않아서 거절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과연 어떻게 거절을 할 것인가 큰 고민이었습니다. 배우 캐스팅 제안을 거절한다는 것은 그다음의 가능성을 망칠 수 있기 때문에 어쩌면 선택보다 거절이 더 어려운 일입니다. 거절 잘하는 사람이 되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을 때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캐스팅 디렉터에게 전화해서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다음날 전화로, 그냥 한번 해주시면 안 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쪽에서 처음에 말했던 출연료의 2배가 넘고 거의 3배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캐스팅 디렉터의 묘책은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개런티를 요구한 것인데, 포기하라고, 그쪽에서는 조금 고민하더니 그러자고 한 것입니다. 이제는 이전에 도움을 주었던 캐스팅 디렉터의 사정을 내가 봐줘야 하기에 결국 출연하기로 결정하고 주어진 두 장면의 대사를 받았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만 했습니다. 아버지 역할이었습니다. 큰 죄를 지은. 아들을 죽인 아버지.
첫 장면은 형사재판 법정입니다. 피고인의 마지막 말을 하는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허구한 날 술 취해 가족에게 행패 부리던 아들을 견디다 못해서 넥타이로 아들을 목 졸라 죽인 아버지의 마지막 참회의 말을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난 아버지는 주어진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하고 연기를 마쳤습니다. 그러고 자리에 앉았는데, 컷! 다시 합시다! 라는 마이크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연극 연습하면서도 많이 듣던 말입니다. 자, 다시 하자! 다시 다시! 처음부터 다시! 인물의 감정을 더 느끼면서! 상황에 진짜로 빠져들면서!
눈물 젖은 얼굴을 닦아내고 심호흡을 한 다음, 레디 액션! 소리에 속으로 하나둘을 세고 다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아버지는 다시 한번 눈물을 쏟아내며 참회의 말을 전합니다. 아들을 목 졸라 죽인 죄를 똑바로 시인합니다. 이유불문하고 용서받지 못할 큰 죄를 저질렀다는 참회의 말을 합니다. 문장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에서 다시 한번 비통함을 토해냅니다. 판사님께 고개를 조아리며 끊어질 듯 이어지던 말꼬리에서 눈물이 뚝뚝뚝 아래로 떨어집니다. 머릿속에 있던 말을 겨우 끝까지 다 내뱉고 다시 탁자에 엎드려 이를 악물고 통곡을 합니다. 컷! 마이크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저기요, 아버님! 진짜로 참회하셔야죠! 아들을 죽이셨잖아요! 지금 전 국민이 이거 다 봅니다! 그러니까 아버님! 진짜로 참회를 하고 진짜로 용서를 빌어야죠! 다시 해보세요. 자, 처음부터 다시! 레디 액션!
머리가 아파옵니다. 살면서 진짜로 참회하고 용서를 빌었던 적은 있는가! 생각합니다. 살면서 용서받지 못할 죄가 무엇이었나! 생각합니다. 그때그때, 절망할 때마다, 내가 이미 지은 죄 때문에 이렇게 내가 벌을 받는 거라고 생각하던 그날그날이 떠오릅니다. 반성하던 순간들이 다시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던 순간들과 어깨동무를 하였습니다. 히히히 웃다가 흑흑흑 울던 순간들이 연극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로 마구 떠오릅니다. 이건 장난이 아닌데? 어떻게 진짜로 참회를 할까? 컷! 다시!
건네준 티슈 몇 장으로 천천히 눈물을 닦아내고, 얼굴에 다시 분 바르고, 옷매무새를 다시 만지고, 탁자를 깨끗하게 다시 닦아내고, 숨을 몰아쉰 다음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하루하루가 매번 똑같이 시작되듯이.
그렇게 두 번 세 번을, 그 뒤로 몇 번인지 셀 수 없을 만큼,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내 아들을 목 졸라 죽인 아버지가 되어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이제는 마음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말들을 긁어 올리고, 내가 이전에 하던 말들과 잘 섞어서, 그러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대본 그대로 그 참혹한 순간을 살아냈습니다. 도망칠 수 없으니까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이번에는 정면 말고 옆에서, 이번엔 렌즈 바꿔서 좀 더 클로즈업으로, 이제는 길게 레일을 따라 흘러가는 카메라를 의식하면서, 약간 방향을 바꿔서, 그렇게 몇 번을 더 한 다음에, 심장이 거의 다 삭아서 없어진 채로 탁자에 엎드려 흐느껴 울고 있는데, 컷!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법정이 조용해졌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사방이 조용했습니다. 혼자 울고 있는 것처럼. 모두가 나를, 전국민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그때 누군가 옆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무겁게 아버지의 몸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너무 무리하게 요구했습니다. 일부러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힘드셨죠? 근데 연기를 너무 잘해주셔서 지금 보조출연자들도 다 울고 우리 스텝들도 모두 울고 법률자문하시는 분들도 전부 울고 있습니다. 너무너무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제 가도 되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느새 내가 되어있었습니다. 도대체 자기를 다 없애고 다른 사람을 연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카메라를 옮기고 조명기를 옮기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나는 가슴이 미어져서 고개를 들 수가 없고 그 자리에 그대로 엎드려서 시간이 조금 더 흐르다가 아예 순식간에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 싶었습니다.
촬영장을 나오는데 눈이 부시게 하늘이 맑았고 멀쩡하게 아무 일 없듯이 그날 오전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배우들은 연출자가 요구하는 ‘진짜’라는 말에 자주 현혹되곤 합니다. 그 말에 현혹되어서 멱살 잡히곤 합니다. 배우는 언제나 진짜가 되려고 애를 씁니다. 진짜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매번 다짐합니다. 그러나 진짜는 어디에 있나요? 애쓴다고 진짜가 되나요? 애를 써서 진짜가 되면 그게 오히려 큰일 아닌가요?
허구와 진짜를 혼용하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연기는 연기다! 하면서도 연기가 아닌 진짜를 보여줘야 할 때가 많습니다. 진짜로 느껴지도록 완벽한 가짜를 실천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마음을 다쳐서 오래도록 고생합니다. 세상과 연극이 자주 혼동되는 일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경험하지 않고서 연극 속에서 온전히 살아있을 수도 없고, 연극 속에서 진짜로 산다고 해서 세상을 아예 등질 수 없다는 것이 진짜 모순입니다. 연기를 했는데 진짜를 하라고 하고, 진짜를 했더니 연기 잘했다고 하는 삶이 아직도 얼마나 행복한가 자주 생각합니다. 그 행복은 얼마나 진짜인가?
연출가는 그만큼 중요하니까 배우에게 필요한 요구를 합니다. 넉넉잡아 서너 시간이면 끝날 것 같은 단역을 맡아서 연기를 수행할 때, 연출가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작업장에서 뛰어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맡은 단역, 단역배우가 맡은 단 몇 줄의 대사는 여러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배우의 숙명입니다. 도망칠 수 없다면 감당해야만 하는 무거운 운명입니다. 진짜 마음이 아예 찢어지고 뭉그러지지 않도록 우리 배우들은 새로 마음공부를 해야 합니다. 연기에서의 진짜는 감정에서의 진짜와 동일하니까.
과연 삶에서의 진짜는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
참회의 기본형은 진심입니다. 반성의 순도가 결정되는 순간은 오히려 침묵이 깃든 깊은 눈빛과 잔잔한 호흡입니다. 그 눈빛과 호흡에서 참회의 말이 탄생합니다. 삶에서의 진짜란 삶을 향한 더 깊은 진심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요? 차라리 침묵 가까이에 서서. 무엇인가 표현하려 하지 않고 묵묵히 우뚝 서서.
가을입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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