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김충일(연극평론가)
연극을 보기 위해 극장에 앉아 있다 보면 중반부부터 결말이 어떻게 될지 어렴풋이 짐작이 되며 제발 그렇게 끝나지 않기를 ‘초조’한 맘으로 극을 보게 된다. 물론 드라마이기에 인물이나 상황이 조금 극단적이기도 하지만, 결국 본질적으로 봤을 땐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서사 이기게 결말이 만약 비극적으로 끝나게 되리라는 ‘초조감’에 빠져 그 죄책감을 공유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내 영혼을 지키기 위한 본능적인 욕망이 관객들에게 적용되기에 연극은 일종의 ‘자기의 속살을 되 집어 비춰주는 거울’이 된다.
가끔 우린 연극을 보면서 자기감정 속 깊은 곳까지 들어가 보게 된다. 어찌 보면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자기가 몰랐던, 혹은 알지만 외면했던 추악하거나, 부끄럽거나, 모자란 감정의 모습들을 은밀하게 만날 수 있어서 ‘관극이란 창’을 선택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연극 읽기란 행위 속에 잠겨 있는 감정의 모습을 찾아내는데 정답은 없겠지만 길이 있다는 말에는 공감할 수 있을게다. 하여 오늘 무대 위에서 만난 숭고하고도 아름다운 사랑, 연민, 동정, 초조, 두려움, 불안이란 감점무늬를 무대언어로 극화한 연극 문법을 헤아린다다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며 겪어내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날카롭고 차가운 삶에 대한 자기 성찰이 된다.

인간 본성에 대한 감각적 세밀화를 그려낸, 오스트리아의 심리소설의 대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1881~1942)가 완성한 유일한 장편소설 『초조한 마음(UNGEDULD DES HERZENS:1938)』! 이 소설은 지역의 선도적인 연극 탐험가 이정수 각색, 정선호 연출에 의해 지난 25.05.30~06.08까지 소극장 고도에서 연극 <초조한 마음』>으로 국내에선 처음, 소설의 무대화된 작품으로 선보였다. 이 작품은 110분 동안 신경이 곤두서는 긴장감과 놀랍도록 웅변적인 연극언어를 사용하여 관객의 가슴을 누르는 멈출 수 없는 재앙의 감각(비극)을 구축한 이야기를 실어내고 있다
『초조한 마음』! 제 1차 세계 대전 직전, 헝가리 국경지역 한적한 마을의 주둔지에서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기병장교 ‘안톤 호프밀러’가 제대를 신청했다는 프롤로그 독백으로 시작된다. 그는 우연히 부유한 실업가 ‘케케스팔바’ 남작의 저택의 파티에 초대 받는데 그 집 딸 에디트가 하반신 마비라는 사실을 모르고 춤을 청하는 실수를 한다. 초조해진 호프밀러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에디트에 대한 연민으로 계속 그 집을 방문하게 되고,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살아온 에디트는 자신을 찾아주는 유일한 남자인 호프밀러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된다.
그렇게 ‘호프밀러’는 ‘에디트’를 통해 신분상승과 함께, 자신이 장애가 있는 이와 약혼하여 약자를 돕는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극중 ‘에디트’의 주치의사인 ‘콘도어’ 박사는 그런 ‘호프밀러’의 ‘연민’의 감정에 대해 자극한다. 부대와 마을 내에서의 조롱과 경멸이 두려워진 호프밀러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약혼을 부인하고, 이 소식을 들은 에디트는 절망에 빠져 역사의 사건인 선전포고를 통해 그로부터 안심시키는 전보를 받지 못하고, 자살에 이르게 된다. 결국 ‘호프밀러’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에디트’에 대해 초조함과 부담감을 느끼면서 도망치듯 그 상황을 벗어나려 전쟁터로 향하게 된다는 줄거리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초조한 마음』은 인간의 본질 속에 잠재하고 있는 이기심과 나약함을 들춰내기에 읽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인간 본성에 대한 분석과 흡인력 있는 전개가 주목할 만하다. 특히 자신을 희생할 용기도 없으면서 ‘신체적 장애우’ ‘에디트’에 지나친 연민만을 품었던 주인공 호프밀러를 통해 연민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낱낱이 해부하여 생동감 있게 표현해냈다. 이를 전해 받은 예술적 전수자 정선호 연출은 “초조한 마음과 연민이라는 감정이 이어질 때의 고통이 무엇이며, 그것이 책임감으로 강요되는 상황과 내 자신을 성찰하는 흐름” 속에서 ‘비뚤어지고 불온하게 왜곡된’ 진정한 연민이 아닌 동정심을 극적으로 풀어낸다. 그 결과 표면상으로는 좋은 감정의 양날의 칼처럼 보이지지만 속으로는 이기적인 성격을 예리하게 파악해 내고 있다.
그 결과 연극 <초조한 마음>은 ‘불치(不治)의 마비’라는 신체적 고통과 상처는 극의 첫 걸음이지만 이를 바로잡으려는 시도는 병자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고, 이는 감정적 협박, 인식할 수 없는 집착, 속임수, 그리고 치료에 대한 희망으로 거짓 약속을 하는 것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을 일으키게 된다. 결국 이 작품은 선한 의도가 만들어낸 혼란 속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동안 일종의 회피와 절망이란 ‘도덕적 마비’를 일으킨다.

이 <초조한 마음>의 서사 구성은 연극과 소설 모두 대략 현재(소설에서는 1937년, 연극에서는 2025년)에서 시작하여 1914년으로 빠르게 되감기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이 작품은 ‘호프밀러’가 자기 역할의 대사를 연기하면서, 내레이션(독백)을 맡아 기억의 연극임을 상기시키고, 또 다른 네 명(에디트, 클라라, 케케스팔바, 콘도어)의 다른 이야기꾼들과 함께 중요한 사건을 해설하는 서사기법을 동원하고 있기에 무대의 배우들을 지켜보는 메타-관객화의 양태가 자기 반사적으로 전개된다.
이 연극은 긴장감을 가속화 시키면서 연민과 동정에 대해 가지고 있던 언어로 표현 될 수 없는 무의식 속 감정을 나타내는데 ‘몇 개의 테이블과 의자(정체), 4각의 입체 철제 구조물(갇힘)’ 그리고 거기에 걸어둔 ‘9개의 거울(반영)’이 무대장치로 설치된다. ‘거울’은 무대 위에서 드러나듯이 “초조한 마음이 연민이라는 감정으로 이어질 때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내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극적 소품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또한 신낭만주의(Neoro -manticism)의 대표적인 음악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1864~1949)의 음악으로만 구성하여 ‘사랑의 이중성, 죽음을 통한 해방, 변형을 통한 전쟁과 희생‘의 침울한 분위기를 선율의 고조에 맞춰 감정의 명암이 교차하는 극적 기제로 무대를 이끌었다.

심리·언어극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거침없는 이야기의 맥박에 실려 있는 감정(초조, 연민, 동정)의 균열과 붕괴 사이에서 일어나는 ‘떨림과 울림’의 언어가 연극적 상상력을 통해 무대 위에 녹아들 때 그 빛을 발할 수 있다. 헌데 심리극의 코아적 요소라 할수 있는 대사에 대한 공명이 다소 둔탁했다. 간단치 않은 주제의 무거움이 가져온 심리적 압박감이나 긴장 때문이었을까, 대사·내레이션(독백)·1인 다역의 집단적 해설을 감당해야하는 숨찬 호흡 맞추기 때문이었을까, 연극적 기승전결의 전형을 지키려다 성급한 매듭 짖기로 진행된 탓일까, 아님 배우들 간의 연극적 자아가 충돌한 탓일까. 하지만 조심스럽게 말 할 수 있다. 첫 공연(5월 30일)과는 달리 막공(6월 8일)은 밀도 있게 다가왔고, 관객은 그 힘에 빨려든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첫 관극에 대한 기억을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대사에 대한 공명이 다소 둔탁했는가?“에 대한 답은 이미 마련되지 않았을까!
원작의 탄탄한 스토리를 따라가면서도 입체적인 캐릭터와 긴장감 넘치는 무대만이 낼 수 있는 현장감으로 관객들에게 색다른 재미를 준 <초조한 마음>. 이 작품은 읽기 쉬운 시계가 아니다. 110분량의 연극적 파편의 비행(飛行)은 지친다. 그러나 츠바이크의 산문적 서사는 이정수 각색의 ‘창의적 즐거움’, 정선호 연출의 ‘연극적 상상력’, 배우(콘도어 역의 정아더, 일로나 역의 김선옥, 에디트 역의 김나미, 케케스팔바역의 홍덕기, 호프밀러역의 김은혁)간 대립을 통한 갈등의 상태를 효과적으로 제시한 심리적 땀방울, 그리고 그것을 공유한 관객과의 뜨거운 만남으로 확대되어 생기를 되찾게 해준 사회적-드러마터지였다.
그것이 어떤 ‘상처’에 대한 연민이든 멀리 떨어져 있을 때만 볼 수 있다. 정보 과잉의 미디어에 의해 조작되고 ‘진정성을 담보한 감정의 결과 무늬’가 무시되는 탈진실의 세계에서 우리는 정서적 감각을 상실한 채 부유(浮游)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예, 동정심을 조심하십시오, 그러나 그러한 경고를 보내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어쩌면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한 동정을 원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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