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문지방 <하붑>

글_백승무(연극평론가)

 

박한별 연출은 감각적이다. 오감을 건드릴 줄 안다. 빛, 소리, 질감, 포즈, 움직임 등에 힘을 쓸 줄 안다. 감각의 힘은 양이 복잡함에서 오지 않는다. 정확한 순간에 명료한 의도로 적당한 감각을 자극하면 관객은 힘에 압도된다. 힘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육중한 비행기를 띄우는 힘은 엔진의 출력 자체가 아니라 날개의 양력에서 나오듯, 감각의 힘은 적재적소에 배치된 기법의 질서와 조화에서 온다. 예를 들어, 식탁보를 걷어내자 트럭 앞 범퍼가 드러나는 장면! 강렬한 조명과 음향은 이 천진무구한 변신을 SF 영화 같은 장면으로 주조한다. 자신의 솜씨에 탄복한 듯 식탁의 기막힌 변신을 지켜보는 ‘영원’(임태현 배우)의 표정과 포즈는 이 마법의 신비로움을 아름답게 수식한다. 영원이 강에 투신자살하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다. 수직조명이 비추고 허우적대는 배우, 주변의 파란 조명과 눈부신 빨간 옷! 시간은 멈추고, 영원은 공중부양한 채로 삶과 죽음을 사유한다. 조명과 배색과 강렬한 음악과 배우의 움직임은 관객의 감각을 단박에 포박하는 포승줄이 된다. 이런 기백의 조화가 바로 감각을 다루는 연출적 힘이다.

 

사진 제공: 극단 문지방

 

소극장이라는 조건은 감각적 이미지 생산에 불리하다. 배우의 육성과 땀, 호흡, 미세한 표정을 읽을 수 있는 친화적 공간(intimacy)이지만, 미장센을 만들기에는 협소하고 제한이 많다. <하붑>처럼 공간이동이 많은 희곡은 더더욱 곤란하다. 박한별 연출의 감각적 근력이 소극장의 물리적 장애를 뛰어넘게 해준 추진력이라면, 희곡 자체의 폐쇄성은 공간의 협소함을 도리어 인지적 장점으로 전환시켜준다. 희곡은 미국 아리조나 지역을 배경으로 한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낯선 이국만리라는 설정은 외부와 차단된 고립을 뜻한다. 외부 조력이나 간섭 없이 당사자들끼리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거기서 인간의 민낯을 만나고 나아가 사태의 본질을 마주하게 된다(전작인 <시추>도 남극탐사기지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따라서 아리조나가 아니라 프랑스 남부의 한촌이어도, 칠레 오지의 마을이어도 상관없고, 하붑(미국 사막지대의 모래폭풍)이 아니라, 블리자드나 국지성 스콜이어도 상관없다. 폐쇄된 공간 속 인물들의 관계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사진 제공: 극단 문지방

 

물론 <하붑>이 <하붑>이어야 하는 것은 두 말 할 나위 없다. 아이를 잃어버린 두 남녀는 아이를 찾기 위해 아리조나 구석구석을 차로 뒤지기 시작한다. 바로 떠오르는 게 <아리조나 유괴사건>. 영하(김승환 배우)의 직업이 비디오 가게 알바라는 것도 서부극(<역마차>와 <석양의 무법자> OST)과 로드무비(<델마와 루이스>)의 본고장인 아리조나의 필연성을 보여준다. 아버지가 핵심 모티프인바, <스타워즈>의 유명 대사 “I’m your father”가 등장하고, 인디언 도시답게 인디언 모자가 나오는 <기생충>이 언급된다. <7년만의 외출>, <분노의 질주>, <사랑은 비를 타고>, <매드 맥스> 등 서사라인과 겹치는 여러 영화들도 단역처럼 스쳐지나간다. 두 남녀의 로드무비는 일종의 무비로드가 되는 것이다. 영화적 회상(reminiscence) 장치들은 로드무비 문법을 연상시켜 인물 간의 관계와 대화, 각성, 변화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모티프들도 의미의 매듭을 도와주는 일꾼이다. 제목으로 사용된 하붑도 그렇고, 마트료시카나 선인장 소재도 그렇다. 갈등 전개에 입체감을 주고 인물의 고통을 지속적으로 상기시켜주는 고마운 역할을 담당한다. 자식처럼 속으로 품지만 동시에 부모와 이질동상을 구현하는 마트료시카, 배려와 독립의 균형점을 제시하는 선인장 등은 무대를 채우는 소품이면서 의미가 달아나지 않도록 매조지는 매듭이 된다.

 

사진 제공: 극단 문지방

 

<하붑>의 최대 스포일러는 두 남녀의 관계이다. 둘은 없는 것을 있다고 믿는 정신적 질병을 갖고 있다. 결핍의 트라우마가 없는 뭔가를 만들어내 관계를 뒤튼다. 있는 것을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치료이다. 눈을 가리는 뜨거운 하붑은 또한 눈을 뜨게 하는 계기가 된다. 눈물의 씨앗인 사랑도 행복의 원천이 된다. 무릇, 병을 낳는 것도, 병에서 낫는 것도 결국 ‘나’에게 달려있다. Everything on my own!

 


  • 무료정기구독을 원하시는 분은 ohskon@naver.com으로 메일을 보내주세요.
  • 리뷰 투고를 원하시는 분은 ohskon@naver.com으로 원고를 보내주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