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우주, 그리고 인간
–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
양근애(연극평론가)
작 : 이여진
연출 : 김승철
드라마터그 : 배선애
단체 : 창작공동체 아르케
공연일시 : 2014/12/18-28
공연장소 : 선돌극장
관극일시 : 2014/12/28 pm 4:00
최근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은 <그래비티>나 <인터스텔라>와 같은 영화들은 우주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을 확장시키고 우주를 통해 인간과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기록되고 있다. 이 영화들의 인기와 더불어 물리학이나 우주에 대한 관심도 늘어났다고 한다. 물론 문화를 향유하는 것과 학문적인 관심을 곧바로 연결 짓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재미있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물리학, 나아가 과학을 드라마와 연결시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가설과 증명의 세계에서 불가해한 인간의 삶을 바라본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인가?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은 이런 질문에 대한 연극적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여진 작, 김승철 연출의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은 2012년 이여진 작가가 ‘봄작가 겨울무대’에서 선보인 <평행우주 없이 사는 법>의 개작이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전작에서는 평행우주라는 모티프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우주 속에서 살아가는 (아마도 같은 사람일) 젊은 여인과 노파의 주체성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은 개작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새로워졌다. 평행우주에서 다중우주(멀티버스), 양자얽힘, 양자역학, 중혁, 파동, 거품 등 물리학의 이론과 개념도 더 풍부해졌거니와 우연과 불확정성으로 얽힌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도 더 밀도 있어졌다. 한국과학창의재단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과학연극’답게 과학과 연극의 접점을 보여주기 위한 균형감각도 돋보인다.
무대는 크게 세 구역으로 구분된다. 물리학도인 차연의 동호회 활동 장소인 야광버섯산이 무대 전면에 펼쳐져 있고 왼쪽에는 차연과 선배 기혁이 다니는 대학 연구소 앞 벤치, 그리고 오른쪽에는 기억을 잃은 노파가 때때로 졸면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경찰서가 있다. 이 세 공간은 말하자면 서로 다른 우주이다. 벤치에서 기혁과 마주치는 27세의 차연은 양자얽힘을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는 대학원생이었다가 35세의 만년 조교로, 야광버섯산의 앙꼬와 단호박은 부부였다가 10년만에 이혼한 남남으로, 경찰서의 노파는 차연의 미래이면서 야광버섯 동호회의 전회장이기도 한, 세 공간으로 구획된 우주는 그러나 더 많은 우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공간들은 서로 구분되어 있다가 교차되고 부딪치고 결국 섞여들기도 한다. 이 섞여듦까지의 시간들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세계가 아직 보여주지 못한 진짜 모습은 아닐까. 그러니까 이 연극은 분절적인 세계를 서사화하는 관습으로부터 해방되어 파편화된, 우연과 불확실성으로부터 촉발된 우주 자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우주가 실은 ‘관측 가능한 우주’라는 것, 그러니까 아직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우주가 있다는 것에 대한 생각은 상상만으로도 흥미롭다. 평행우주론이나 멀티버스도 그러한 상상에서 출발한 과학이다. 27세의 ‘양자얽힘’을 논문 주제로 ‘선택’한 차연이 살고 있는 우주가 있고 35세의 늘어진 츄리닝 차림으로 만년 조교 신세를 면치 못하는 차연이 살고 있는 우주가 있고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야광버섯 서식지를 지키는 노파가 살고 있는 우주가 있다. 그들은 인간의 무수한 선택이 만들어낸 또 다른 가능성의 우주이다. 그들은 서로 개입할 수 없지만 우리가 이 연극 무대를 통해 그들을 보듯 어쩌면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함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교차되는 선택과 우연과 불확실성의 여러 국면을 보여준다는 점이 이 연극의 묘미이다. 특히 차례차례 보여주었던 차연과 기혁, 앙꼬와 단호박, 노파와 경찰 혹은 노숙자, 다시 차연과 단호박, 차연과 앙꼬 등의 장면이 뒤섞이면서 그들이 앞서 말한 대사들이 다른 인물을 통해 다시 발화될 때 무대에서 생성되어 관객에게로 전달되는 에너지는 설명할 수 없는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직 볼 수 없는 여분의 차원, 또 다른 우주로부터 발신된 에너지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은 영화처럼 아득한 시각적 차원을 구현하여 우주를 체험하게 하지는 않지만 우연과 반복을 통해 또 다른 우주를 생각하게 하면서 소극장 작은 무대 위에 여러 우주를 보여준다. 거기서 여러 삶을 살아가는 차연과 기혁, 노파와 노숙자, 앙꼬와 단호박은 우리가 삶 속에서 무수히 마주치는 다양한 우리들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작가는 위트 있는 대사를 통해 일상의 차원에서 주고받는 대화의 살가움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비틀어 반복하면서 관계라는 것의 방향성이 어긋나는 장면을 구현한다. 가령, 이혼에 대한 단호박의 대사, “완벽한 제도여. / 결혼 / 안 맞는 사람도 10년씩 맞춰 살게 허구.”, 앙꼬의 대사 “마법 같은 제도여. / 결혼 / 지 혼자 맞춰 산다고 착각하게 하니깐.”의 배치가 그렇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다른 우주 속에서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하는 것이다. 각각의 인물들은 서로 다른 차원의 우주로 이동해서 비슷한 반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반복 속에서 단호박은 더 이상 앙꼬의 단호박이 아니고 기혁 역시 차연의 선배가 아니기 일쑤다. 대사와 장면은 반복되지만 전혀 다른 상황의 우주가 펼쳐지는 것이다.
노파의 낮잠 속에서, 차연이 오래 꾼 꿈속에서 어렴풋이 본 듯한 야광버섯의 불빛들은 먼 곳에서 그런 우리의 삶을 지켜보는 별무리 같다. 그래서일까. 극 속에 등장한 인물들이 각자의 우주에서 분투하는 장면들 사이에 배치된 야광버섯산 장면을 더 오래 보여주지 않은 것이 아쉽다. 반/암전 속에서 야광버섯의 불빛들이 무대를 가득 채울 때 관객들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다른 우주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성찰할 시간을 주었더라면 이 연극이 이야기하고자 한 우주와 인간의 관계가 더 잘 와 닿지 않았을까 싶다. 인과관계보다 개별성을 강조하는 장면들을 시종일관 즐겁게 연기한 배우들의 연기는 극을 경쾌하게 만들었지만 마찬가지로 물리학의 개념들을 음미하게 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했다. 특히 차연 역의 연기가 물리학도로서 더 차분하게, 이미 자신의 삶 자체가 되었을 물리학의 개념들을 전달해주는 방식으로 전개 되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연에는 우리가 아직 볼 수 없는 여분의 차원이 존재한다고 한다. 뉴턴과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하이젠 베르크 등 많은 물리학자들이 우주의 비밀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고 했지만 아직 우주의 생성 원리에 대해서는 확실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합의된 증명이 없다고 해서 물리학적 성과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듯이 세계의 파편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관계와 맥락을 성찰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아직 볼 수 없는 세계 역시 우리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개체인 인간은 참 작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우주의 작은 존재인 인간으로서 더 큰 차원의 우주를 상상하면서 살아가는 일, 하여 과학과 연극이 만나듯 현실과 환상을 마주세우고 수많은 나와 너를 만나게 하는 일, 그 속에서 차근차근 우주의 기억을 만들어가는 일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