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生)의 면면을 마주하는 곳
<만리향>
장윤정
작: 김원
연출: 정범철
단체: 극발전소301
공연일시: 2016. 5. 4~2016. 6.12
공연장소: Sh아트홀
관극일시: 2016. 5. 28, 토요일, pm4:00
가족, ‘가족’만큼 거짓말 같이 손쉬운 단어가 또 있을까? 한없이 이기적인 ‘나’들이 모여 누군가의 희생 아닌 희생으로 아름답게 유지되는 집단. 거침없이 증오하다가도 한 순간에 연민의 정으로 돌아서는 관계. 연민의 정 깊은 곳엔 애증이라 하기도 애정이라 하기도 어려운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뒤엉켜 있고, 누구보다 가장 상처주면서 가장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그렇게 삶을 살아내는 곳. 그 모든 관계와 감정을 한데 뭉쳐 ‘가족’이라 통칭하니 이 얼마나 편리한가.
우린 살아오면서 숱한 가족들을 보아왔다. TV에 나오는 천편일률적인 가족의 형태들부터 배꼼이 열린 옆집 대문 틈 사이로 은밀히 새어나오는 대화까지. 내 주변인들의 가족과 길거리에서 스쳐지나가는 가족들. 수많은 유형의 가족만큼 수많은 이야기들이 만연할 테지만 우리는 ‘가족’이라 하면 묘하게도 보편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삶의 안식처와 온정, 그리고 애정. 참을 수 없이 끓어오르거나 차갑게 침잠하는 관계 속에서도 늘 정은 존재한다. 어쩌면 그것은 현관문 밖의 세상에 지쳐버려 몸 가눌 곳이 없는 우리기에 더욱 희망하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온갖 복잡한 얼굴을 한 ‘가족’을 문득 마주해본 적이 있느냐고 <만리향>은 이야기한다.
<만리향>은 가족의 형태나 의미에 대하여 내밀한 부분까지 밀도 있게 파고드는 작품은 아니다. 다만 삶의 형태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마치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을 법한 모습으로 어디에나 있을 법한 가족의 형태를 한 채, 그들이 머물고 있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중국집을 고스란히 무대 위로 옮겨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자신의 삶과 무대 위의 삶을 일치시킬 수 있었다.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거나 살면서 묵혀둔 응어리를 내뱉는 인물들의 모습은 매일 집안에서 마주하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다. 그 속에서 해소되지 못한 상처와 사건들은 곧 우리 각자의 가정사였다.
<만리향>에서 각 인물들은 모두 원하는 바를 성취하지 못하고 냉정한 삶에 한풀 꺾인 사람들이다. 어머니는 정신지체장애인 막내딸을 잃어버린 채 5년을 헤맸고, 소싯적 아버지의 바람으로 마음 앓이를 한 인물이다. 첫째는 아버지의 큰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둘째는 아버지의 뒤를 잇기 싫어 뛰쳐나왔으나 자리 잡지 못했다. 거기다 둘째는 자신이 전혀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님을 알게 된다. 셋째는 유망한 유도선수였으나 가족의 무관심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고 첫째의 아내는 엄마가 무당이라는 현실로 평생 가슴 졸이며 산다. 이들 각자의 응어리는 잃어버린 막내로 귀결된다. 5년 내내 이 잡듯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샅샅이 찾았지만 찾지 못했던 막내. 이들은 마지막으로 굿판을 벌인다. 애초에 굿은 각자 상대를 위한 일이었다. 잃어버린 막내를 찾기 위한 어머니의 굿이었고, 그런 어머니를 위해 벌인 자식들의 굿이었으나 결국 그것은 본인이 위로받는 자신들의 굿이 되었다. 처음부터 이들은 굿판의 무당이 실제 무당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굿판은 치유의 시간을 만들어낸다. 차마 말하지 못했던 상처들을 가슴 깊숙한 곳에서 끌어내어 발화함으로써 스스로와의 화해를 시도한 것이다. 그것은 막내와의 대화이면서 동시에 서로간의 대화였다. 평소 서로 내밀한 속내까지 알 수 없었던 이들의 우회적인 대화였던 것이다. 실제 막내의 영혼이나 아버지의 영혼 같은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오롯이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굿이었기 때문이다.
<만리향>에서는 가족에 대한 의미 외에도 다른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살아남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이들을 잃어가며 살아남아간다. 언젠가부터 한국 사회에선 ‘살아남아 살아간다’는 화두가 떠오르고 있다. 몇 몇 붕괴현장부터 역사적인 사건이 있어왔지만 특히 ‘세월호’ 문제는 전 국민에게 아직까지 남아있는 상처일 것이다. ‘살아남았다’는 것은 전 국민에게 죄의식의 무게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전의 사고참사들에 비하여 ‘기억해야 한다’는 문제 또한 화두처럼 떠오른다. 그것은 ‘세월호’가 아직 진행 중인 사고현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진행 중인 참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 과정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살아남은 자들에겐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만리향>은 하나의 굿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 굿으로 막내를 찾을 수 없을 것임을, 이미 막내가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임을, 가짜 굿임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어머니는 굿을 진행한다. 어머니에게 굿은 잃어버린 아이를 위로하는 시간이자 살아남아 살아가야 하는 이들을 위한 봉합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말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남들한테 나는 두고두고 남을 사람으로 살았나.” 어쩌면 이것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삶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한 마디가 아닐까. 잃어버린 막내를 통해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각 인물들 또한 봉합의 시간 이후 새로운 삶을 진행한다. 굿을 한 후 가족들은 활기를 되찾고 각자의 자리를 찾아갔으며 그 모습을 통해 어머니는 “바빠질 것 같다”고 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살아가야 하는, 또 살아갈 생(生)의 새로운 시작이 이어지는 것이다.
<만리향>은 온 가족이 자장면을 먹으며 웃음 짓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지난세월 집집마다 자장면 한 그릇에 행복했던 소박한 이들의 면면들이다. 이 단 한 장면으로 작품의 모든 것은 설명된다. 흔한 중국집 이름인 ‘만리향’은 상처가 아물어가는 이들의 웃음에 어느새 ‘만리까지 흐르는 향’처럼 이해된다. 만리까지 흐르는 향, 그것이 곧 가족이 주는 정서, 우리가 기대하게 되는 가족의 모습 아닐까. ‘만리향’이라는 제목은 그래서 적절했다.
무대 위의 배우들은 실제 우리네 가족이 그대로 올라온 듯 연기한다. 때론 과도하게 액션을 취하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사랑스럽게 보이는 면이 있다. 처음부터 이 작품은 작정하고 웃기려들거나 울리려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리향>은 보편적인 얘기를 하되 감상적으로만 접근하지 않는다. 이것은 김원 작가의 살아있는 인물 스케치와 정범철 연출 특유의 유쾌한 표현력이 잘 어우러진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리라. 단연 이 지점은 이 작품의 색깔이자 미덕이라 할 것이다. <만리향>은 그렇게 새로운 사유를 제안하기 보다는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길 기대하며 나아가 삶 그대로를 무대에서 대면해보길 권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작품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