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블랙리스트’를 한 번 되돌아보자
우 상전 (연극배우)
연말이 되니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가 부쩍 요란스럽다. 그래서 많은 국민들이 가득이나 옹색한 연극인들을 올 겨울엔 무척 가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26일 연말 한국연극협회 송년회에 갔더니, 올 연극계를 시끄럽게 한 장본인이자, ‘블랙리스트’ 발단의 핵심인물인 박근형교수가 제작한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가 ‘대한민국 연극대상’의 ‘베스트 7’로 뽑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국민과 연극인들에게 ‘블랙리스트’에 대해 설명을 좀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물론 내 주관적인 것이지만)
하나, 다시는 ‘블랙리스트’와 같은 저질적 행위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국제적으로도 이런 망신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많지도 않은 예술가 중에서 자그마치 1만 여명에 가까운 예술가가 명단에 올라있는 현실에 정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정권이 이런 수준 낮은 짓을 할 수 있을까? ‘이념전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정도다. 이미 이명박정부에서부터 ‘블랙리스트’가 존재한 것으로 나는 의심하고 있다.
둘, 1만 여명에 가까운 사람이 명단에 올라있다면, 이제는 마냥 ‘블랙리스트’의 존재만을 가지고 논란을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지? ‘블랙리스트’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문화예술계 내에서도 진지한 토론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또 정치로 인해 연극집단에서의 이념의 분열, 정치논리의 맹신이 예술가에 미치는 영향까지도 논의를 해야 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에서는 예술가가 예술을 하는 집단이라기보다는 외려 예술가가 ‘정치’를 하는 집단으로 여겨질 정도다. 모두가 정치이념에 속박당하고 있다는 인식을 강하게 주고 있는 게 현실이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연극계에서 피부로 느껴지는 것은 많은 연극인들이 정치권의 ‘정권탈취’에 봉사하고 있다는 인식이 강하다. 모두가 입만 열면 ‘정파의 논리’만을 되뇌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래도 엘리트교육을 받은 연극인들이 그런 교조적인 정치관을 갖고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 현실에 개인적으로 크게 실망하고 있다.
셋, 지금 문화예술계가 이 정권에서 ‘블랙리스트’로 망한 것처럼 요란하데, 솔직히 말해 이로 인해 고통 받는 연극인은 별로 많지 않다. 더욱 신기한 것은 이로 인해 ‘창작의 자유’를 잃을 염려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지원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게 전부일 뿐이다.
그리고 일부 연극인들의 ‘정치적 정보’는 너무나 한쪽으로만 기울어져 있는 게 사실이다. 정상적으로 사고하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넷, 지금 연극인들이 진정으로 걱정해야 할 것은 외려 우리 연극의 ‘창작공연의 질적 수준저하’다. 여전히 소극장공연이 주류를 이루어, 국민들의 전반적인 문화수준을 따라잡지 못해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일 것이다.
불행히도 국민들의 연극에 대한 관심도는 ‘해외공연’에 쏠려있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이런 쏠림현상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미 하향 길에 든 캐나다의 ‘서커스 극단’을 200억에 가까운 거액을 들여 한국에 정착시키려다 여론의 뭇매를 맞고 물러난 게 좋은 사례일 것이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박시장은 현재의 시장역할보다는 대권을 꿈꾸는 사람이다. 그가 ‘서커스 극단’의 유치를 시도한 것은, 단적으로 그가 한국의 ‘표를 가진’ 국민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파악한 증거가 될 것이다.
솔직히 지금 한국은 예술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다. 오로지 ‘오락’을 즐기는 나라라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예술가의 ‘블랙리스트’가 무슨 의미를 갖는지 정치가와 예술가들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런 관객들로부터의 ‘소외감’이 연극인들을 자꾸만 비정상적 ‘정치논리’에 경도되도록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요즘 젊은 관객들의 연극에 대한 관심거리는 단연 영국의 국립극단이 만든 ‘영상연극’ 프로그램이다. 이게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상영되면 2천석의 객석을 다 채운다. 할리우드에서 활약하는 영국의 인기스타들이 출연해 만든 영국의 ‘영상연극’이 한국의 여성 팬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내가 관람 중 (여성관객들에게 인기 있는 할리우드 배우인줄 모르고) 마냥 웃으며 관람하다가 휴게시간이 끝난 뒤 (여성 관람자들의 항의로) 안내원에게 “관람 중 웃지 말고 조용히 보라!”는 지적까지 받을 정도다.
다행히 시작 후의 영상에서 MC가 화면에 나타나 “왜 (영국의) 젊은 사람들이 웃으면서 이 공연을 보는가?”를 연출가에게 질문하는 바람에 내가 명예(?)를 겨우 회복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영국에서도 웃는다는 그들의 말에 내 주변에 앉아있던 여성관객들이 멍해졌을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국립극단, LG아트센터, 예술의 전당, SFAP의 해외공연, 광주아시아전당의 해외공연 등이 국내 창작물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제 대극장 공연의 경우, 외국연출가나 해외공연에 의지하지 않으면 공연은 물론이고 연극축제가 불가능하게 된 게 우리의 현실이다.
다섯, 그런데도 많은 국민들은 (과거 군사독재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한국연극이 온통 ‘블랙리스트’로 인해 허우적대고 있는 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정치의 블랙홀이 연극계를 빨아들이는 현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많지도 않은 예술가가 존재하는 나라에서 자그마치 1만여 명에 달하는 인물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면 올 한해 한국연극은 올 스톱 상태에 이르렀을 것이다.
원래 ‘블랙리스트’란 극소수여야 ‘가치’(?)를 갖는 법인데 말이다. 한마디로 박근혜의 통치력을 정치권이 희화화시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블랙리스트’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예전의 군사독재의 암흑기와는 달리, 이제는 한국의 민주화가 상당히 많이 진척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의 ‘사전검열’과 ‘블랙리스트’를 현재와 일치시키는 상상은 금물이다.
왜 그럴까? 박근형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를 보자. ‘문예위’에서는 ‘블랙리스트’에 걸려 ‘지원금’을 받지 못했지만, – 일부의 주장대로 ‘검열’에 걸려 공연이 무산됐지만, 대신에 ‘서울문화재단’에 의해, 즉 차기대통령을 꿈꾸는 박원순시장의 후원으로 공연이 이루어져, 결과적으로 연극인들 앞에서 <베스트7>을 뽐내는 현실에서 이를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이 꺼림칙하면 누구든 직접 대학로에 와서 봐라! 지금 대학로에서 활동하는 연극인 중에 ‘블랙리스트’로 창작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사람이 있는가? 다 본인들의 예술적 재능과 상상력, 그저 지원금의 부족을 원망하고 있을 뿐이다.
(현실이 이러한데도) 청와대의 ‘구닥다리 시대의 인물’들이 세상이 달라진 줄을 모르고,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그런 유치하고 멍청한 짓을 해 세상을 소란스럽게 하고 있을 뿐이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박근혜정권이다.
실제로 그들에게 ‘블랙리스트’가 문체부 산하의 기관장이나 단체장을 임명할 때 필요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이제는 그러한 것들이 절대로 연극인들의 창작이나 상상력을 제한하지 못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권이 그런 유치한 짓을 해서 국민들의 원성을 사고, 연극계 현장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일을 왜 하고 있는지? 연극용어로 그런 ‘삼마이’들이 있을까 싶다.
진짜 ‘연극의 위기’는 무엇인가?
이처럼 ‘블랙리스트’로 인해 창작활동이 전혀 구애받지 않는데, 정치권 사람들이 이를 마냥 정치권의 이슈로 만들어 사태를 심각하게 확대시키고, 이걸 정략(政略)으로 삼고 있는 게 심각한 문제다.
그 단적인 사례가 ‘블랙리스트’ 사태를 보는 정치평론가들의 평가다. 그들은 특검의 ‘블랙리스트’규명을 이렇게 진단하고 있었다. “특검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세월호 7시간보다) 증거가 명확한 ‘블랙리스트’를 먼저 건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마냥 오리발을 내미는 김기춘을 옭아매기 위해서도 말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한국은 정치가 모든 것을 휘저어 발전의 발목을 잡는 대표적인 국가일 것이다. 정말 ‘정권교체’가 뭐길래? 글로벌화 된 세상에서, 이제 한국도 누가 대통령이 되던 경제 문화적으로 조금도 달라질 게 없는데도 말이다.
연극계만 해도 정치에 깊이 관여하는 연극인을 제외하고 평범한 연극인들은 ‘블랙리스트’로 인해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도 없고, ‘검열’로 ‘표현의 자유’가 박탈되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사람도 없다. (내가 보기에) 그저 이런 것들은 ‘정권수호’나 ‘정권교체’를 위한 정략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구태여 따져보면, ‘최순실 게이트’는 나름 한국정치나 사회에 공헌하는 바가 크다. (역설적으로) 일단 한국정치에서의 고질병인 ‘비선실세’를 근절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정치판에서 누구든 대통령 근처에 있으면 “그대가 ‘최순실’인가!” 이렇게 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있다. 앞으로 정치에서 ‘저능아’를 골라내는 안목을 나름 국민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에 비하면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는 민주화된 이 시대에 어디에도 기여하는 바가 없다. 단지 그런 걸 서류(?)로 만들었다는 ‘발상’ 그 자체가 더 문제가 되는 게 현실이다. 좌우간 정치판의 ‘노이즈 마켓팅’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블랙리스트’는 (소란으로 인해) 연극동네사람들의 체면만 치명상을 입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리고 이런 소란이 잦으면 연극인들이 정치판의 놀이터(?)에 끌려들어가 ‘창작활동’을 방해받는데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현실에서) 내가 진실로 걱정하고 우려하는 것은, ‘블랙리스트’나 ‘검열’이 아니라, 외려 정치권의 정쟁에 희생(?)당하고 있는 한국연극과 연극인들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특검이 한건주의로 이 문제를 확대시켜 국민들이 크게 걱정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정쟁에 개입’한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로 인한 어려움이 연극동네에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해가 쉽지 않으면 이런 예를 들어보겠다. 한국의 휴전선에 싸움이 일면 외국인들은 한국이 ‘전쟁의 위험’에 처한 줄 알지만 서울에 있으면 전혀 그런 걸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우리 연극계가 고민할 것은, 우리 자신이 정치적 활동에 끌려 다니므로 해서 좁아지는 식견(識見)과 자신들의 내면이 갇히는 현상일 것이다. 즉 ‘블랙리스트’나 ‘검열’의 소용돌이가 예술가에게 남기는 후유증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독재정권시절에는 ‘사전검열’이 예술가를 압박했다면, 이제 ‘민주화된 시절’에는 ‘정치이념’이 예술가의 정신세계를 속박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려 ‘재능 있는 연극인’이 정치적 보복의 대상이 되고, 이로 인해 ‘지원금’이 줄어들어 예술가의 창작활동이 경제적으로 압박받는 현실을 더 걱정해야 할 것이다. 솔직히 이게 더 걱정되고 우려스럽다고 여기는 사람이 나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정치행위가 극성을 부리면, 이로 인해 예술가들이 (특히 극작가와 연출가)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창작물의 질’이 점점 더 후퇴해 가는 현상이다.
왜 그럴까? 소용돌이가 극심해지면, 연극인들이 점점 더 심하게 직설적인 표현을 구사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되고, 그런 것에 얽매이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민주화가 후퇴하지 않는 한, 또 그럴 위험이 없는 한, ‘블랙리스트’나 ‘정쟁’이야 세월이 가면 저절로 사라지겠지만, 몇 년씩 계속되는 이런 소란스러운 정치행위로 인해 예술가인 연극인들이 자신의 좋은 시절을 허공에 날려버리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솔직히 정치에 볼모잡혀, 이른바 ‘순수예술’에 자신의 예술의 싹을 키우지 못하고 외려 고사될 위험을 더 걱정해야 할 것이다. 왜? 모두가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으니 예술이 ‘진화’할 수 있겠는가!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에서도 보았듯이 정치행위가 지나치면 가장 심각하게 훼손되는 게 바로 문화요, 예술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그 10여년을 문화예술의 ‘암흑기’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예술가들이 이런 정치적 소용돌이에 파묻힌 ‘암흑기’가 (민주화를 이룬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현실은 정말 참담하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보는 한국의 정치, 사회현실
먼저 우리의 현실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요즘의 ‘최순실 게이트’로 명확해진 것은 무엇일까?
첫째는 문화예술계가 늘 정권의 ‘봉’이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번에도 체육계야 자기 딸을 입신시키려고 그랬다 치자, 그런 그가 왜 문화예술계를 뒤흔든 것일까? 어쨌든 문화계가 가장 만만해 보여서 그랬을 것이다. 정말 한국은 국격(國格)이 없는 문화후진국임이 분명하다.
둘째, ‘최게이트’로 분명해진 것은, (역설적으로) 대통령직이야말로 ‘최순실’ 수준의 ‘강남아줌마’가 수행해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일 거다. 항상 선거 때면 후보자들이 ‘준비된 대통령’을 강조하지만 준비 안 해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게이트’가 알게 해준 소중한 교훈일 것이다.
그저 비선실세 잘 만나, ‘문고리’들 몇 데리고 출세를 꿈꾸는 대학교수나 검찰간부출신들을 모아서 그들이 대통령을 위해 죽도록 일하도록 경쟁시키기만 하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는 직책이 한국의 대통령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하면 관저에 앉아 프로포플 주사를 맞으며 얼굴(이미지)관리만 해도 충분히 대통령직의 수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해준 사건이 이번 ‘게이트’의 교훈이다.
셋째, 이렇게 별로 할 일 없는 직책이다 보니, 자연히 권력남용의 유혹에 빠지고, ‘보복’할 궁리만 하는 게 현실일 것이다. 대통령이 이권을 재벌에 넘겨주는 대신 그들로부터 정치자금을 횡령하거나, 자신의 사회복귀 후를 걱정해 ‘재단자금’을 챙겨도 되는 ‘자리’라는 것도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연극인 포함) 자신들이 지지하는 대통령의 탄생을 위해 목숨을 걸고 파벌을 지어 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1.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내 ‘기득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까?
2.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자신이 ‘보복’을 면하고 생존을 유지할 수 있을까가 전부일 것이다.
얼마 전, 박장렬 전 서협회장이 ‘서울시문화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접했다. 사실 그의 재임기간동안 연극계는 정치적 소용돌이로 모두가 ‘가슴앓이’를 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다음 회장선거에 입후보한 후보들 모두가 ‘정치적 중립’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서울시로부터 ‘문화상’을 받는 영광을 안고 ‘환하게 웃으며’ 인터넷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고 세상사에 허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희망을 갖게 되었다. 반드시 다음번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문재인이나 이재명, 안철수 등의 야권후보들이 꼭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야 그동안 ‘권리장전’ 등으로 고생한 김재엽교수 일행이 다음 정권에서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 크게 웃을 것이며, 그들이 연극에 넉넉한 지원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또 그들 중에 문예위의 위원장이라도 나오면 ‘블랙리스트’의 불이행은 물론이고, 연극계를 위한 충족한 지원금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블랙리스트’로 광화문 텐트에서 고생하신 분들도 그에 걸맞은 대접이나 대우를 받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 연극계가 풍성해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의 추억담
예전에 내가 직접 겪었던 일화를 소개 하겠다. 노태우정권 때의 일이다. 그때 문예진흥원(지금의 문예위) 원장에 여석기선생이 임명되셨다. 노태우대통령과 같은 동향인 대구출신이셔서 그 자리에 오르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김대중대통령 시절에는 나의 스승인 ‘김정옥선생’이 원장이 되셨다. 그분도 김대중대통령과 동향인 전라도 광주출신이셔서 가능했을 것이다. 이처럼 한국은 지원기관의 장(長)의 출신지마저도 임명에 깊은 연관성을 갖는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정파(政派)가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때 나는 여선생님을 사무실로 찾아 단독면담을 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분에게 당돌하게도 이렇게 청했다. (요약하면) “잘 아시다시피,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분야가 연극계입니다. 연극인인 선생님이 이런 자리에 오르셨으니 연극계의 장래를 위해 획기적인 좋은 지원정책을 마련해 주십시오.” 그런데 그분의 답변은 이랬다. (요약하면) “내가 그러면 타 장르와의 공정성에 문제가 생긴다. 그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때 나는 연극이 발전의 절호의 기회를 놓친 아쉬움이 컸다.
그리고 나중에 ‘김정옥선생’이 계신 진흥원은 찾지 않았다. 똑같은 답변이 돌아올 게 뻔해서였다.
사실 우리 연극인들은 자존심도 강하고, 거기다 ‘결벽증’이 심해 구걸(?)에는 별로 재능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지원금이라도 좀 얻으려면 그나마 연극인이 아닌 관료나 정치인, 지자체장에게 매달려야 하는 게 상수다.
이런 처지에서 (예전의 장충동시절과 비교해) 경제적으로 풍요해진 국립극단을 체험하면서 ‘유인촌 장관’에게 고마움을 느꼈던 게 사실이다. 이런 연극계에 조그마한 보탬이라도 된 연극인은 그가 유일할 것이다.
배우 김명곤도 노무현시절 ‘장관’의 자리에 올랐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또 박장렬 전 서협회장만 해도 ‘박원순시장’를 그토록 사랑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이 ‘서울시문화상’을 받는 경사로 그친 게 현실이다.
그래서 외친다. 다시는 이런 불행(?)을 연극계가 반복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해결될 일인가?
사실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진 것은 비단 이번 정권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설령 ‘블랙리스트’가 없다 해도, 어느 정권에서나 그와 유사한 편향과 보복은 늘 ‘인사(人事)’나 예산, 지원금으로 변형돼 연극판에 존재해 왔다.
왜 그랬을까? 물론 한국의 정치문화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결론은 이런 정치문화가 존재하는 한국에서는 연극인들이 (분수를 모르고) 정치에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되고 항상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매사는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가에 따라 상대도 이에 대응 한다’는 논리를 기억하는 것이다.
연극동네에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지는 것만 해도 그렇다. 항상 연극계는 대선에서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모두 나서서 서명을 한다. 그러니 ‘블랙리스트’에 스스로 이름을 올리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
물론 이 정도의 정치행위는 당연하다고 우길 수 있지만, 그것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의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는, 박근혜대통령 앞에서 연극인이 “박정희는 나쁘다, 노무현은 훌륭하다”와 같은 구호를 직설적으로 내뱉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직설적으로 외치는 집단이나 개인이 없는데도, 유독 연극인들만 그런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꾸만 정치판을 자극하는 데에 우리의 문제가 있다.
또 정치적 이슈만 생기면 연극계는 (특정정파의 요구에 순응해) 단체로 서명을 하고 성명서를 낭독한다. 지원금만 많아지면 ‘범법’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도덕성에서 허약한 집단이 그럴 때는 굉장히 정의로운 척하며 나선다. 이게 ‘블랙리스트’ 명단에 스스로 이름이 올리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자유로운 발언을 억누르는 것은 정치에서의 ‘선택의 자유’, 또는 ‘표현의 자유’를 막는 반(反)헌법적 행위라고 말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니까 정부도 연극인들이 받는 ‘불이익’이 노출되지 않게 암암리에 행사하는 것일 거다.
그러면 왜 정부는 (전혀 두려움 없이) 불이익을 연극계에 암암리에 자행하는 것일까?
1. 일단 연극인들이 수적으로 열세다. 그러니까 ‘표로 말하는’ 선거에서 영향력을 전혀 미치지 못할 정도로 연극인 집단의 규모가 너무 작기 때문이다.
2. 역시 연극의 ‘관객들’이 미치는 영향력도 너무 미미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영국은 하루 밤 영국 전역에서 연극을 관람하는 인원이 자그마치 50여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따라서 1년 간 전체극장의 입장수입이 축구의 프리미엄 리그를 앞선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초라하다.
3. 연극인들은 대체로 소심하고, 게으르며, 이기적이어서 공공성에 적극적으로 나서기에 부적합한 캐릭터를 갖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의 일인 연극계의 여러 사안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다.
예컨대 ‘삐끼’가 자기들의 동네를 그토록 오랫동안 망치고 있어도 수수방관하는 게 연극판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정치에 관한 한은 만용에 가까운 ‘용감성’을 발휘하는 모순된 행동을 보인다. 이게 ‘블랙리스트’를 확대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촛불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주말이면 수많은 국민들이 광화문 광장에 ‘촛불’을 밝힌다. 그렇다면 ‘촛불’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공정한 국가, 투명한 사회가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정치적 ‘편 가르기’와 보복이 존재하는 사회가 기다리고 있을까?
이 땅에서 오래 살아온 나는 정말로 우리(한국)의 미래가 늘 궁금하다. 그래서 불안하기조차 한 게 사실이다.
우리는 ‘민주혁명’이라는 4.19를 맞이한 이후에 곧바로 정반대의 ‘군사혁명’이 기다리고 있었던 현실을 기억할 것이다. 20년 후 ‘서울의 봄’을 맞이하자, 이번에는 더 무서운 ‘신군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뿐인가? 학생들과 민중이 나서서 6.29선언을 만들어놓았더니 역시 군 출신인 노태우가 정권이 잡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국민들이 촛불을 밝혀 박근혜 정부를 무력화시켰는데, 그렇다면 이번에는 무엇이 또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정말 궁금하다.
진정한 민주국가를 이룰 수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또 다른 ‘억지스러운’ 정치현실에 직면하게 될까? 몹시 궁금해진다.
나는 ‘우루왕’으로 튀니지에 공연을 다녀온 경험에 있어서 튀니지의 ‘자스민혁명 –민중봉기’에 관심을 가졌었다. 하지만 주변국에까지 번진 ‘아랍의 봄’은 결국, 다시 모든 걸 그 이전으로 되돌려 놓았을 뿐이다.
혁명은 북아프리카에 온통 번졌지만, 아랍세계는 다시금 독재와 탈출,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참상을 세계인들에게 목격시킨 게 고작이다.
남긴 것이라곤, 사회와 정치의 후진성을 탈출하기가 절대로 쉽지 않다는 교훈뿐이었다. 정치가 후진성을 면치 못하면 국민들의 어떠한 노력과 열정도 무용지물일 뿐이라는 가슴 아픈 현실을 목격시키는 게 고작이었다.
과연 언제쯤 한국정치의 선진화가 이루어져 국민들이 아예 정치를 잊고 살아가도 전혀 지장이 없는 나라가 될는지? “너, 우리나라 대통령이 누군지 아니?” 초등학생을 상대로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날이 내 평생에 있기나 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