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을 보호할 힘
– <벨기에 물고기>
양근애(연극평론가)
작 : 레오노르 콩피노
번역/드라마투르기 : 임혜경
연출 : 까티 라뺑
단체 : 극단 프랑코포니
공연일시 : 2017/03/15~04/02
공연장소 : 알과핵 소극장
관극일시 : 2017/03/18 pm. 4:00
남자애인지 여자애인지 모를 한 아이가 호숫가 벤치에 앉아 있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늙은 어른에게 말을 건다. 아이는 부모를 기다리는 척 하지만 배가 고프다며 괜히 노인을 성가시게 하고, 오지 않을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는 노인은 초코바를 남김없이 다 먹으며 아이를 약 올린다. 호숫가에서 처음 만난 이들의 대화는 핑퐁처럼 아슬아슬하면서도 경쾌하다. 노인은 아이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기로 한다. 아이는 사막 같기도, 어항 같기도 한 노인의 집에서 부모의 부음을 듣고 노인은 슬퍼할 아이를 위해 일본식 상중 의식을 하자고 제안한다. 어항에 눈물을 받아 그 속에서 물고기를 일주일동안 자라게 한 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집에서 머무는 동안 두 사람은 자신이 남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털어놓고, 그것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가게 된다. 일주일 후, 어항 속에서 물고기를 꺼내 죽이려 하지만 ‘튼튼한 금붕어’는 죽지 않고 그들 곁에서 팔딱거리며 살아 있다. 그들은 함께 노인의 아들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의 여행을 준비한다.
2015년 프랑스에서 창작, 공연되었고 올해 극단 프랑코포니에서 국내 초연을 올린 <벨기에 물고기> 이야기이다. 프랑스어 원작에서 두 등장인물은 ‘그랑드 무슈 Grande monsieur’와 ‘쁘띠 피이으 Petit fille’로 표기되어 있다. 남성, 여성 형용사를 거꾸로 사용한 명명법의 의도가 짐작이 된다. 열 살 난 아이는 여자애이면서도 여자애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고, 틀니를 한 사십 대의 남자는 자기 안에 자라난 소녀를 자각한 지 오래이며 그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낳은 아들과 가족을 이룰 수 없었다. ‘드래그(drag, 크로스드레서), 혹은 ’트라베스티’(teavesti, 여장 남성 게이)인 남자와 소녀답지(girly) 않은 여자애, 그들은 세상의 시선에서 볼 때 ‘비정상’으로 쉽게 분류되는 존재들이다. 성 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아이, 노인, 여성까지 ‘마이너리티’로 규정된 자들은 일상적인 억압과 배제의 그늘에 놓여 있다. 벨기에 익셀 호수-아니 세상 곳곳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도는 괴물의 실체가 있기나 할까. <벨기에 물고기>는 여성/남성, 아이/어른, 장애/비장애, 정상/비정상 사이의 빗금을 응시하고 뒤섞고 흔들고 무화시킨다. 경직되지 않으면서도 피상적이지 않도록, ‘그랑드 무슈’와 ‘쁘띠 피이으’는 자신들의 ‘다름’을 응시하고 그 ‘이상함’을 인정하면서 자신을 억압했던 세상을 향해 한 발 내딛는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그들이 그 발자국을 떼기 위해 겪었던 차별의 문제와 내면화의 악순환, 그리고 그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과정이다. 연극은 그들이 ‘끌로드’라는 중성적인 이름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내면서 이 과정을 극적으로 펼쳐 보인다.
‘끌로드’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는 정신분석가인 부모에게 학대를 받고 자라났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혹은 부모의 기대에 맞추지 못한다는 이유로 많은 아이들이 사랑 받아야 할 권리를 잃어버리고 멸시와 억압 속에서 커간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부모에게 제대로 사랑 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자기 존중감과 자아 정체감을 형성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차별 받았던 최초의 경험은 다름 아닌 가족들에 의해서였다. 딸이라는 이유로, 맏이라는 이유로,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아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남자답지 못해서, 여자답지 못해서 혹은 그밖에 수많은 이유들로 가족 내에서 자행되는 크고 작은 폭력들을 도리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묵인해 온 것이다.
부모의 잦은 다툼으로 인해 불안 증세를 겪게 된 끌로드는 뚜렷한 이유 없이 신체적 고통을 겪는 증상이 나타나는 ‘신체화증후군’을 앓게 된다. 어쩌면 끌로드는 자신의 몸에 난 상처의 원인을 찾을 길이 없어 자신이 아가미를 가진 물고기이며, 그래서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한다고 상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물고기라고 주장하는 방어기제이자 생존 전략은 얼마나 아이다운 상상력인가. 끌로드는 “난 스탠더드 하지 않아. 난 걸리 하지 않아. 하지만 난 미친 게 아냐”라고 항변할 줄 안다. 이 아이의 천진난만함이, 세상의 틀에 자신을 구겨 넣는 대신 이상한 아이로 남기를 택한 아이의 용기가, 어른 끌로드의 ‘내면 아이’를 세상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극의 후반부에 가면 끌로드라는 이름이 어린 아이만의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고독하게, 이제 늙음밖에 기대할 것이 없는 사십대 어른의 이름이기도 하다는 것이 밝혀진다. 이 사실은 두 가지 해석을 동시에 가능케 한다. 메마르고 건조한 세계의 늙은 끌로드와 다르게 물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아이 끌로드가 실은 어른 끌로드의 ‘내면 아이’였다는 사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의 이상함, ‘다름’을 보호하기 위해 나타난 거울쌍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어린 끌로드의 ‘안아 달라’는 말을 신호탄으로 ‘그런 걸 할 줄 몰랐던’ 어른 끌로드의 내면 아이가 밝혀진다. 남자로 태어났지만 자기 내부에서 소녀가 자라고 있었던 끌로드는 남자다움을 강요받았던 어린 시절의 외상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뱀처럼 똬리를 틀고 끌로드를 옥죄어 그를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도록 했다. 부모가 자신을 사내아이답게 만들기 위해 자동차를 뒤쫓아 뛰도록 학대당했던 기억을 털어 놓으며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난 그들한테 존재하지 않아.” 누구나 고유의 개체성으로 존재를 인정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정상/비정상의 빗금이 견고한 한, 다르다는 것은 때로 틀리다는 판단에 의해 배제되거나 어떤 경우에는 존재 자체가 지워질 수도 있다. 자기 내부의 끌로드에게 ‘나의 다름을 보호하지 못하고’ ‘침입자로 여겨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랑드 무슈’의 대사는 비교적 정상성의 범주 안에서 안온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 나의 가슴을 아프게 때리고 말았다. 우리가 모두 자기 안의 내면 아이, ‘끌로드’를 가지고 있다는 걸 왜 잊었는가, 하는 자책과 함께.
<벨기에 물고기>는 이 무겁고 아픈 이야기를 동화적으로 위트 있게 써내려간 작품이다. 공연의 여운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서 대본을 얼른 찾아서 읽어내려 갔다. 좋은 공연의 출발은 무엇보다 희곡 그 자체라는 사실을 새삼 환기시킨 작품이다. 공연을 통해 다 드러나지 않은 숨은 의미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느낌도 함께 받았다. 가령, 이 극의 첫 대사가 ‘배고파’의 반복이라는 것, 바깥 세계와 연결된 전화기를 통해 전달한 말이 장애를 가진 자의 언어라는 것, 이러한 지점들은 이 극에서 다루고 있는 소수자의 문제가 성적 지향의 문제를 넘어 계급, 권력, 신체적 정상성, 나아가 민족, 인종의 문제들로 확장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 내부의 끌로드를 끌어안는 것을 넘어 가능하면 상처 입은 마음들과 함께 우리는 다음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물속에서도, 물 밖을 상상하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극단 프랑코포니가 마련한 무대는 영상으로 찾아본 프랑스 공연의 무대보다 더 동화적이고 시적인 느낌을 주었다. 전중용, 성여진 두 배우의 아픈 마주침과 조화로운 충돌이 점점 더 진하게 극장을, 대학로를, 이제 막 자기 안의 이질적인 존재를 깨닫기 시작한 이 세계를, 푸른 내면으로 채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