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무의 짤평
백승무
연희단거리패, <변두리극장>
우리에게 카바레는 무희들의 버라이어티쇼나 나훈아, 이미자가 출연하는 극장식 레스토랑을 떠오르게 하지만 20세기 초 카바레는 정치적, 예술적 풍자의 심장이었다. 물론 카바레는 데카당적 퇴폐문화의 온상임은 부인할 수 없다. 영화 <카바레> 와 <물랑루즈>는 부르주아의 유흥과 오락을 담당하는 프랑스 카바레의 속살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1910년 이후 발흥하는 러시아와 독일의 카바레는 모더니즘 예술실험을 분만하는 인큐베이터이자 예술가들의 창작정신을 숙성시키는 안식처였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보고 구상하는 곳, 삶과 예술이, 거리와 극장이 한 몸처럼 꽈리를 틀고 결합된 곳! 신속한 실험과 즉각적 반응이 가능한, 즉 머릿속 구상이 그대로 외화되고 그에 대한 첨예한 비판이 동시에 어우러지는 예술적 유토피아였다. 심지어 그런 유토피아적 시도조차도 조롱하며 풍자하는 곳, 극적 아이러니와 낭만적 아이러니가 용솟음치던 곳! <변두리극장>이 극적 아이러니로 시작하고(베토벤을 연상시키는 지휘자의 출현을 모르고 악사들이 험담하는 장면), 낭만적 아이러니로 종결하는 것(모든 예술적 기획이 붕괴되는 몰락의 장면)은 상징적이다. 카바레는 자유와 낭만, 창조와 파괴, 해체와 생성이 반복되는 예술적 용광로였다.
기성권력을 조롱하는 코메디아 델라르테를 노골적으로 탄압한 나폴레옹 이후, 그리고 하고많은 공터들이 상업지구나 공장지대로 변하면서 유럽의 광대극은 사양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무형문화재 취급받던 광대극을 다시 문화의 중심부로 호출한 것이 모더니즘이었다. 타락한 유럽문명을 고대예술세계로 리부팅하려는 모더니즘 기획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광대극을 화려하게 부활시켰고, 카바레는 거리극, 광대극 등 전통적 민중연희를 위한 포근한 둥지가 되어주었다. 2,000년 동안 인류문명의 한 축을 담당했던 유쾌하고 도발적인 웃음문화가 사경을 벗어나 새로이 부활의 단초를 마련한 것이다.
특히 러시아 카바레 문화는 (스탈린 전까지) 그야말로 눈부셨다. 스타니슬랍스키, 메이예르홀트, 바흐탄고프, 예브레이노프, 코미사르젭스키 등 당대 최고 연출가들이 카바레 문화의 주역이었다. 모스크바 대표 카바레이자 므하트의 아지트였던 <박쥐>에서 스타니슬랍스키는 캉캉 춤을 추기도 했고, 체호프의 아내 크니페르는 샹송을 부르기도 했으며 네미로비치-단첸코는 소규모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했다. 스타니슬랍스키의 수제자 바흐탄고프가 연출한 <투란도트 공주>(1922)는 이러한 카바레 문화의 적자였다.
<투란도트 공주>(1922)
https://www.youtube.com/watch?v=nO_aRCYRwBQ
페테르부르크의 대표 카바레였던 <떠돌이 개>는 아방가르드의 ‘최전선’이었다. 쿠즈민, 아흐마토바, 구밀료프, 만델시탐, 사샤 쵸르니, 세베랴닌, 카르사비나, 로푸호바, 미하일 포킨, 메이예르홀트, 마야콥스키 등 나열조차 힘든 모더니즘 예술가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며 온갖 예술공연을 펼친 곳이 문학-예술 카바레 <떠돌이 개>였다. <아프리카 신부 밤푸카>(1909)는 패러디와 풍자 정신으로 충만했던 당시 페테르부르크 카바레 문화의 일면을 보여준다.
<아프리카 신부 밤푸카>(1909)
전통 광대극의 20세기적 부활, 혹은 웃음문화의 연극적 수용을 보여주는 카바레 공연이 한국에서 가능할까?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20세기 병실로 넘어온 민중연희의 전통이 과연 진지대마왕 한국 무대에서 재현될 수 있을까? 3,000년 동안 유럽에서 이어져온 ‘연극 특유의 익살’이 웃음을 무시하고 희극을 경시하는 21세기 한국에서 성립할 수 있을까? <변두리극장>을 보라! ‘웃음’의 원형을 복원시키는 놀라운 기적이 <변두리극장>에서 펼쳐진다. 모놀로그, 만담, 악기연주, (팬터마임), 마술, 슬랩스틱, 말장난, 마스크 놀이, 각종 패러디, 실패한 리허설, 무의미한 반복, (서커스) 등 20세기 카바레가 안간힘을 쓰며 부활시킨 웃음-원형이 웃음 불모지 대한민국의 <변두리극장>에서 펼쳐진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희극’편을 발견한 기쁨을 이에 견준다면 과장일까?
* 뽀나스
1) 카바레 문화를 계승한 TV쇼
https://www.youtube.com/watch?v=OjMhR3zkDTY
2) 광대극을 계승한 슬라바 폴루닌 공연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유도소년>
대학로 기준으로 보면 <유도소년>은 명백히 ‘상업극’이다. 혹자는 “이 정도 완성도라면…”하는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하지만, 완성도가 낮으면 상업극이고 높으면 정극인 것은 아니다. 템포-리듬, 호흡, 재치, 익살, 앙상블 측면에서 상업극들은 이미 수준급이기 때문이다. 워크숍 수준의 공연을 올리는 다수 소극장에 비하면 상업극은 이미 ‘명작’이다. 문제는 다시 그것, 상업극이라는 저주스러운 명명법과 웃음을 저속하게 비하하며 희극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경직된 엄숙주의 말이다.
사회적 메시지와 정치적 진보성 등 내용의 가치만으로 작품의 품질을 결정하는 이른바 ‘속류 사회학주의’는 연극 본래의 웃음을 존중하지 않는다. 웃음은 태생 상 경박하고 나태하며 저속하여, 사회 모순에 대해 비판하고 풍자할 때만 유의미하다는 것이다(일면 맞다. 상업극 중 일부는 정말 그런 싸구려 웃음에 명운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웃음에 대한 멸시는 장르로서 희극에 대한 경시로 이어지고, 손쉽게 웃음을 파는 밉상 공연들에 ‘상업’이라는 저주의 레테르를 붙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상업극은 결코 사회의식 없는 무뇌아들의 방탕한 유희도 아니고, 예술혼과 장삿속을 구별 못하는 얼간이들의 탐욕도 아니다. 사회의식으로 따지면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에 못지않고, 예술혼으로 따지면 얼치기 정극보다 훨씬 고급지다. 고선웅의 상업극 <뽕짝>을 보라. 윤정환의 상업극 <짬뽕>은? 다리오 포의 상업극 <도덕적 도둑>은 어떻고, 피터 셰퍼의 상업극 <블랙코미디>는 어떤가?
연극성이라곤 코딱지만큼도 없으면서 정치적 구호만 요란한 정극보다는, 실험정신 하나 없으면서 정치적 진보성만 자랑하는 나이롱 정극보다는, 번역극의 위트와 유머도 살릴 줄 모르면서 예술성 운운하는 사이비 정극보다는 잘 만들어진 상업극이, 넓은 관객층을 가진 상업극이, 본전생각 안 나는 상업극이 더 낫다.
자신에게 부족한 속성을 부정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불균형 상태에 빠지는 프레임 오류는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웃음을 경원시할수록, 상업극을 멸시할수록 대학로의 질곡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연희단거리패, <오구>
아무리 먹어도 그 맛이 아니다. *마트 쫀드기는 도통 그 맛이 나지 않는다. 한 움큼 쑤셔넣어도 니글거리는 단맛만 날 뿐이다. 상반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청춘예찬>과 <남자충동>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시간의 풍화에 닳고 낡아버린 그 푸석푸석하고 떪은 맛을 견딜 수가 없다. 반면 <오구>는 여전히 탱글탱글하다. 갓 구워낸 물오징어 마냥, 김이 모락모락 피는 가래떡 마냥 쫀득쫀득하고 꼬습다. 스타시스템보다 앙상블에, 서사보다는 음악성에, 세련됨보다 구수함에 의존한 덕이다.
니체가 말한 음악정신, 스타니슬랍스키가 입이 닳도록 읊어댄 템포-리듬, 메이예르홀트가 연극의 본질이라 치켜세운 음악적 구조가 여기에 있다. <오구>는 우리 몸의 생체 박자와 우리 소리의 리듬과 우리 민족의 가락을 실핏줄까지 보이도록 투사시킨 해부도이다. 자본주의 노동의 경직성과 번잡한 일상의 산문성을 정화시킨다는 점에서 이미 그 자체로 산씻김이고 산오구이다. 도입부만 봐라. 안단테에서 시작하여 알레그로 디 몰토로 이어지는 경쾌한 다듬이질(사실 며느리의 방망이질은 많이 아쉽다)이 끝나면 복례 할머니의 알토 성부가 안단티노로 깔린다. “에라이, 마안년(망할년).” 이를 중재하는 천수경의 바리톤이 나른한 봄날 풍경을 그리면 닭 모이 쪼는 듯한 젓가락 행진곡이 따끔따끔 봄 햇살을 수놓는다. 행위의 마디마다 단발적 타악을 넣는 것은 음악 경맥의 박동을 조절하는 일종의 침술요법이라 하겠다.
도입부부터 마지막 <잘 있어요>까지 <오구>는 아수라장과 구경열반을 오가며 삼라만상의 만화경을 꽃피우는 만다라이자 서곡에 네 악장을 보유한 완벽한 교향악이다. 언젠가 뛰어난 음악가가 <오구>의 음악성을 밝히는 날이 오리라. 성부 성조의 구조와 조바꿈, 전환, 반복, 화성학, 대위법, 강약-고저-장단-완급 등 이 ‘교향악적 만다라’의 음악성을 낱낱이 분석하는 날이 꼭 오리라.
국립극단, <메디아>
메디아는 남성 제국의 결함에 대한 메타포인가, 아니면 가부장적 위선에 저항하는 페미니즘 전사인가? 오늘날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꼽힐만한 메디아는 불행히도 당시에는 별다른 진보성을 띤 캐릭터는 아니었다. 남성 작가, 남성 배우, 남성 관객 들이 스스로 자신의 제국을 반성했다고? 정말 그랬다면 아테네는 여성에게 참정권을 준 최초의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메디아는 어원부터 ‘교활한’이란 뜻이고 그것은 아테네의 주적인 페르시아에 대한 수식어로 쓰이던 단어였다. 이름부터 불손한 의도가 읽힌다. 당시 여성의 욕망과 분노(=욕망의 좌절)는 자가생성된다기보다 항상 남성 욕망의 종속변수로 작동했다. 안티고네의 장례시위는 크레온의 땡깡 때문이고,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살인은 아가멤논의 딸 살해 때문이며, 메디아의 패륜은 이아손의 배신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 action에 대한 reaction이며, 주어에 대한 술어, 상수에 대한 변수, X에 대한 Y였다.
희랍비극에서 여성을 다루는 원리는 남성이 ‘똑바로’ 안 하면 여성은 이빨을 드러낸다는 것, 즉 인간(=남성)의 이성이 통제하기 힘든 약한 고리들(개인적으로 감성, 몸, 사회적으로 노예, 여성, 국가적으로 식민지, 이교도, 동양 등)을 단단히 봉하지 않으면 큰 환란을 당한다는 것이다. 여성은 그 약한 고리들이 인격화된 존재이며, 그 중 메디아는 인간 심성의 어둠이 가장 사악한 형태로 발현된 인물이었으며, 거세공포증이 만들어낸 가공할 타자였다. 혹자는 그녀의 용기와 명예욕, 결단력 등이 남성 못지않음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그런 미덕조차 남성성의 부정적 측면이 부각되는 방식으로, 즉 용기의 마이너스 측면인 잔혹함이 유표화되고, 결단력은 성급함으로, 명예욕은 똥고집으로 왜곡되는 것이다. 메디아는 남성성의 부정적 측면을 모방하는 마이너스 남성성의 화신이다. 최소한의 정당성마저 박탈당한 채 그야말로 탈탈 털리고 마는 메디아의 처참한 최후를 보라. 평생 주인에게 충직하던 맹인견이 순간의 실수로 주인을 물었다고 안락사시키는 인간의 만용과 뭐가 다른가(부적절한 예이지만 인간은 이런 식이다). 그녀가 동양의 야만국인 콜키스 출신이라는 점도 동양을 정복의 대상으로, 계몽의 대상으로 설정해온 오리엔탈리즘의 한 단면이다. 타자는 길들여야 하는 야수에 가깝다.
로버트 알폴디의 선택은 야수 메디아도, 페미니스트 메디아도 아닌, 인간 메디아에 가깝다. 양극단 대신 안전한 중립지대! 출산의 고통과 배신의 분노를 인과관계로 묶음으로써 고전주의적 질서와 균형을 옹호하는 것! 원작처럼 근거 없는 남성적 거세공포증을 과시하지도 않고, 파괴와 일탈을 감행하는 페미니즘 전사를 실험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타당한 근거와 논리적 설득을 바탕으로 논쟁을 즐긴다. 이 세계가 해석될 수 있으며, 모순이란 확인할 수 있고, 갈등은 해소되기 마련이라고 웅변한다. 메디아의 분노는 논리적으로 개인적 배신 때문이고, 그녀의 빨간 원피스는 모순의 시각화이고, 그녀의 filicide는 피할 수 없는 파국이라고 설득한다. 고전주의 만세!(예를 들어, 낭만주의자들은 고통을 증상화할 뿐, 그 기원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진 않는다. 그리고 그 질병은 (극장)세계 밖에도 만연하기 때문에 결코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
여성의 고통을 상징하는 병원 분만실은 분노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단초이다. 메디아의 비이커원피스와 천정에서 내려오는 거대한 실험비이커는 인간의 운명을 놓고 피빛 실험을 단행하는 신의 유희를 떠올린다.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시키는 엄격한 직선과 벽면의 화강암색, 거대한 원주는 고전주의의 술어들이다. 모노톤의 고전주의적 의상을 배경으로 한 이혜영의 ‘새빨간’ 원피스는 고전주의에 대한 파격이라기보다 화룡점정에 가깝다.
원과 사각형의 단순한 기하학적 조명 또한 고전주의를 닮았다. 2~3단계 조명 강도로 차별적인 느낌을 생산하기도 했고, 색조명은 딱 두 번밖에 없었다. 고전주의적 절제미! 음악은 전혀 없고 음향만 딱 1번 사용했고, 인물들의 등퇴장도 전후-좌우의 두 직교 직선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코러스의 움직임 또한 이 직교 직선상에 있는데, 뭉치고 흩어지는 코러스의 계산된 움직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볼거리다.
이혜영은 천하의 악녀 메디아에 딱 어울리는 배우다. 원작 자체가 메디아를 위한, 메디아의 희곡이다. 그녀의 서구적 마스크는 작품 전체의 서구적 동선, 서구적 제스처, 서구적 정서와 일맥상통한다. <헤다 가블러>의 아쉬움이 해소되는 청량감!
그래도 궁금해서, 혹시 설마 어떤 감동이 있을까 싶어 ttis를 열었다. 그랬더니, 오랫만에 시원하고 통쾌한 바람이 그곳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당신이 쓴 ‘짤평’은 분명 새로운 바람이다. 내가 50년동안 읽은 연극평이 아니다. 정말 새롭고 다른 글이다. 감격스러울 정도다. 엘리트란 무엇인가? 진부한 세상에 새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일 것이다. 정말 답답한 일부 평론가들, 글쟁이들에게 지쳐있는 나에게 처음 느껴보는 청량감이다. 그대의 노력에 힘찬 박수를 보낸다.
이어서 나도 긴글을 다시 쓰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 후배에게 기쁨을 얻으니 너무 좋다.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