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오셀로/ 윤진현

판소리 오셀로론

 

윤진현

원작 : 셰익스피어

작‧작사 : 임영욱

연출 : 임영욱

작창 : 박인혜

음악감독 : 박인혜

단체 : 희비쌍곡선

공연일시 : 2018/08/25~2018/09/22 pm8:00

공연장소 : 정동극장

관극일시 2018/09/22 pm8:00

 

 

그녀에게 목소리를 허하라

 

모든 작품이 고전이 되지는 못한다. 한두 세기 전, 유럽의 어느 도시를 상상해보자. 수많은 작품이 무대에 올랐고 그 중에 몇몇 작품만이 남아 지금 우리의 사랑과 숭배를 받는다. 오로지 시간이라는 공정하고 엄격한 최고의 평론가를 통과한 작품만이 고전이 된다. 하여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작품, 감동하며 열광하는 작품이 고전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시간 앞에 너무도 교만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그러기를 바라지 않을 수 있을까? 크로노스를 무간지옥에 가두었던 제우스의 영원을 향한 욕망은 여전히 우리 모두의 것이다. 거듭되는 공연이 시간 속에서 단련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은 당연한 운명이다.

 

창작집단 희비쌍곡선의 <판소리 오셀로>가 ‘동양+여성의 눈으로 재해석한 서구+남성 오셀로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신라의 처용에게서 오셀로를 떠올리다”라고 했을 때, 문득 가슴이 두근거렸다. 역신에게 아내를 빼앗기고도 “앗긴 것을 어찌할까?”라고 노래한 처용은 그 동안 수많은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해왔다. 그런 처용을 공교하게 닮은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와 겹쳐본다는 아이디어만으로도 즐거웠다. 무엇보다도 ‘여성’의 눈이라는 것이 흥미로웠으니 데스데모나의 소극성을 넘어서 이름도 사라진 ‘처용의 아내’가 드디어 제 목소리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닌가 기대하였다.

 

사족이지만 나는 ‘처용의 아내’에게 이름을 부여해보려고 우둔한 상상력을 움직여 본 적이 있었다. 처용의 아내는 어쩌다 역신과 동침하게 된 것일까? 다리가 넷이 있기는 했으나 동침한 것은 확실한 것일까? 신라라는 나라에서는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와 자기 침실에서 동침하는 당당함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녀는 어떻게 처용과 결혼하게 된 것일까? 처용은 그녀를 사랑했을까? 역신은 용서를 받았으나 처용의 아내는 어떻게 되었을까? 차라리 처용의 아내는 헬레네와 비슷한 인물이었을까? 그녀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희비쌍곡선의 ‘동양+여성의 눈’은 이야기꾼이 기녀이며 설비(說婢) ‘단’이라는 점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물론 1이 작품에서 소리꾼 박인혜의 매력에 흠씬 젖어볼 수 있는 것은 유쾌하고 신나는 일이었다. 다정한 여성 소리꾼이 ‘처용’은 물론이요 ‘오셀로’와 ‘이아고’라는 개성 강한 두 남성배역 외에 허다한 인물들을 소화하는 것은 충분히 다른 느낌을 제공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을 ‘마음을 살살 달래는 일’로 규정한 연출의도에는 최적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이 달래주려 한 그 마음은 누구의 마음인가? 당연한 대답으로는 작품 <오셀로>에서 상처받은 모든 인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인물은 잘 보이지 않고 오로지 ‘오셀로’의 마음뿐이었다. 물론 희곡 <오셀로>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아니라 오롯이 ‘오셀로’의 마음에 집중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셀로>에서 상처받은 마음이, <오셀로>에서 상처받은 인물에 공감하는 관객의 상처가 굳이 ‘오셀로’에 한정되는 것이 아닐진대 어찌 오직 ‘오셀로’만이 상처받았으니 달래주어야 할 것이던가?

 

아쉬움은 다시 데스데모나에게로 돌아간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여성’인물의 감정은 사실 깊이 있게 조명되지 않는다. 이것이 셰익스피어 극작의 한계라기보다는 당시의 극적 관행의 한계이기 쉬우나 오필리어나 코델리아, 레이디 맥베스에 비해 ‘데스데모나’의 갈등과 고통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데스데모나와 오셀로가 결혼에 이르는 과정이 간단한 까닭일 것이다. 이 작품의 본의가 ‘오셀로’라는 강자의 내면에 실재하는 나약하고 성급하며 어둡고 옹졸한 ‘질투’와 ‘열등감’, 요컨대 세상 누구나 갖고 있는 보편적인 ‘하마르티아’에 대한 것인 점을 상기하면 이들이 외적 장벽을 넘어 결혼에 이르는 것이 소략한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데스데모나의 이야기, 오셀로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듣고 사랑에 빠지는 데스데모나의 스토리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으니 그녀는 어쩌다 ‘오셀로 스토리’에 넘어가 사랑에 빠졌던 것일까? 무엇보다 어리석고 무도한 ‘오셀로’ 때문에 사랑을 의심 받고 억울하고 부당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데스데모나의 억울함은 ‘달램’의 대상으로 부족하던가?

 

데스데모나가 사랑에 빠졌을 때는 아름답고 순진한 데스데모나를 보여주던 소리꾼은 데스데모나가 캐시오를 두둔할 때는 ‘조금만 두려움을 갖고 사랑하는 이의 눈을 들여다보’라는 주문을 덧붙이며 심지어 ‘열녀’가 아니라 ‘열녀병’에 걸렸다는 지나친 논평마저 불사한다. 그리고  정작 오해로 격분한 오셀로 앞에서는 그저 빈 장옷으로 표현된다.

 

이 작품의 그 모든 아름다움과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점만은 반드시 물어야겠다. 진심인가? 오셀로의 심장에 의심과 질투가 자라나고 있을 때, 데스데모나가 오셀로의 심기를 자세히 살피지 못한 것이 잘못인가? 혼자 있고 싶다는 오셀로의 부탁을 다만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던 데스데모나의 대답 대신 부창부수, 여필종부를 덧붙인 것은 광대 스스로가 고백했듯 광대 자신이 양념일 뿐인데, 여기에 열녀가 아니라 열녀병에 걸렸다니 그 말이 진심인가? 그것이 데스데모나가 받아 마땅한 대우인가?

 

사건이 끝난 후에 피해자들은 오히려 후회한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그때 내가 뭘 잘못했나, 가지 말았어야 했나, 웃지 말았어야 했나, 참지 말았어야 했나 되풀이 자책한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히려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피해자의 자책을 제 3자가 발화할 때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가 전도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2차 가해라고 한다. 대부분 행동의 인과는 행위 당사자에게 있다. 누군가 미운 짓을 했더라도 때린 것은 때린 자의 잘못이지 맞은 자가 맞을 만해서는 아니다. 감정의 심연에 솟구친 복잡한 감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오해하고 결국은 살해하는 데 이른 오셀로의 정경이 가엾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어법이 옳을 수는 없다.

 

달램이 필요한 것은 차라리 데스데모나이다. 말 물어보는 사람 하나 없이 다만 사랑한 까닭에 죽음을 맞이한 데스데모나이기에 지금 그녀에게 말 걸어보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 아닌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나친 일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달램의 분위기가 전제된 까닭일까? 음악적으로 충분히 고양되지 못하고 감정적 위기와 사건의 절정이 어중간하게 마무리되고 말았다. ‘달램’의 형식은 부드러움에 국한되지 않는다. 따뜻하게 등 두들겨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공감이란 때로 인물보다 더 분노하고 인물보다 더 격정적일 수 있으니 옥중의 춘향이를 두고 내뿜는 귀곡성은 애이불비(哀而不悲)라는 미적 기준을 넘어 원한이 사무치고 어사출도의 신명은 이 도령보다도 광대와 관중의 것이 아니던가.

 

한 마디 더 덧붙이자면 광대와 기녀가 한 뿌리에 있었다고 해도 굳이 이야기꾼을 기녀이며 이야기하는 여종(婢)으로 설정한 이유가 궁금하다. 뿐만 아니라 여성이 이야기한다고 해서 당연히 여성적 관점이 확보되는 것도 아니다. 여성화자로 공고하게 구축되어 온 남성서사에 도전한다는 패기는 높이 살만한 것이지만 이를 위해서는 왜 이야기꾼 ‘단’인지가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으로서 남성세계를 다룬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왜 그런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왜 우리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관객을 설득하고 공감하게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왜 소리꾼 박인혜가 아니고 ‘단’이란 인물로 등장한 것인지 설명해야 한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처용의 아내도 데스데모나의 입장도 좀더 통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단정하고 아름다운 무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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