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파가니니> by 최승연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공연예술스쿨 교수, 뮤지컬 평론가
뮤지컬 제작사 HJ컬쳐가 대전예술의전당과 함께 신작 <파가니니>를 선보였다. 예술가의 삶을 다룬 뮤지컬들을 꾸준히 만들어 온 HJ컬쳐의 제작 방향성이 여전히 확인된다(HJ컬쳐는 2015년부터 <파리넬리>, <빈센트 반 고흐>, <살리에르>, <라흐마니노프> 등 예술가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제작해왔다. 2019년 라인업에는 예술가 시리즈 외에도 다양한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어 주목된다). 2018년 12월 대전에서 8회 공연으로 초연을 완료한 이후 서울로 올라온 이번 공연은 바이올리니스트 콘(KoN)이 총 54회 공연 중 51회를 원캐스트로 책임진다는 사실(나머지 회차는 14년간 바이올린 연주를 수련하고 줄리어드 음대에 입학했던 그룹 비아이지(B.I.G)의 벤지가 맡는다)이 알려지며 처음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파가니니> 이전에도 <모비딕>에서 퀴퀘크를 맡아 ‘액터-뮤지션’의 면모를 보여주었던 그가 공연 내내 파가니니의 음악을 ‘연주’하며 ‘연기’해야 하는 더 큰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서울예고와 서울대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후, 클래식이 아닌 재즈와 집시음악을 연주하고 뮤지컬과 드라마의 영역까지 넘어온 콘(본명 이일근)이 적격이라는 판단은 분명해 보였다. 중요한 것은, ‘액터-뮤지션’이 표현하는 파가니니는 어떤 인물로 묘사되어야 할 것인가, 즉 뮤지컬 연기와 악기 연주가 어느 정도의 비율로 캐릭터 안에 잘 안배되어 있어야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사이에 낀 존재
파가니니(1782-1840)는 그의 난해하고 독특한 연주기법과 각종 염문 및 기행으로 ‘악마’라는 당대적 인식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었다. 현재 비르투오소(virtuoso)로 추앙되며 거장의 반열에 올라 있으나 당대에는 그의 유해가 고향 제노바에 묻히지 못하고 방부 처리된 채 니스의 한 동굴에 4년간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제노바에 돌아온 후에도 여전한 교회의 반대로 지하 납골당에 임시로 있다가 1876년이 되어서야 무덤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파가니니의 천재성과 엔터테이너로서의 면모가 얼마나 극단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의 이러한 삶의 이력은 작품의 소재로 사용되기에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2014년에 개봉한 영화 <파가니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영화가 문제적이었던 것은, 배우의 연주를 보고 듣는 것 이외에 서사의 진행과 캐릭터 표현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점에 있었다. 그렇다면 뮤지컬 <파가니니>는 어떨까? 영화와 같이 연주하고 연기해야 하는 주인공이 작품 전체에서 부담감 없이 존재할 수 있을까? 서두에서 던진 문제를 반복하는 이유는 그만큼 이 질문이 이러한 종류의 작품에서 중요하게 관통하는 문제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뮤지컬이 파가니니를 묘사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작품의 서사는 파가니니 사후 그의 매장 문제를 놓고 루치오 아모스 신부와 아킬레 파가니니가 법정 공방을 벌이는 현재에서 시작하여, 과거 파가니니의 생애와 법정 공방이 이루어지는 현재를 교차시킨다. 아킬레 파가니니는, 파가니니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그의 아들로서 아버지 파가니니에게 덧씌워진 악마라는 오명을 벗기기 위해 노력하지만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타락시키는 음악을 했다’는 루치오 아모스 신부의 논리와 바티칸의 결정에 부딪혀 해결이 쉽지 않다. 작품은 초두에 아킬레가 규정한 ‘외로운 예술가의 슬픈 삶’을 핵심으로 두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파가니니를 ‘사이에 낀 존재’로 그린다. 그의 명성을 사업에 이용하려는 콜랭 보네르, 과거 자신의 트라우마 때문에 파가니니를 더 철저히 심판하려는 루치오 아모스 신부, 파가니니를 자신의 음악 활동에 날개를 달아 줄 존재로 인식했던 샬롯 드 베르니에가 그를 둘러싸고 있다(물론 샬롯은 이후 파가니니와 연인 관계를 형성하는 유일한 주연급 여성 캐릭터다). 심지어 파가니니는 자신의 천재적 능력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으로 생각했던 아버지의 강압적인 태도에 어린 시절부터 눌려 있기까지 했다. 이러한 설정은 파가니니의 악마적 정체성이 주위의 관점과 이해관계에 의한 것임을, 그 틈바구니 안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정확히 드러낸다. 작품은 이 설정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주위 인물들을 매우 강한 존재로 그린다. 각 인물의 행동의 목적이 정확히 설정되어 있어서 파가니니를 압도할 정도다. 특히 사악한 악마의 영혼을 찾아내서 괴멸시키는 것에 삶의 목적이 정초되어 있는 신부의 카리스마는, 김경수 배우의 낮게 읊조리는 중저음 목소리 톤에 힘입어 매력적으로 객석을 어필한다. 그 사이에 파가니니가 있다.
결국 ‘뮤지션’으로서의 기량에 해결점이 놓여 있다
이러한 묘사 방식은 작품이 콘의 ‘액터’로서의 기량보다 ‘뮤지션’의 기량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파가니니는 그 틈바구니 안에서 천재적 기량을 갖춘 이단아 바이올리니스트로 존재하면 되는 것이다. 콘은 뮤지컬의 어떤 정형화된 인물형을 벗어난 지점에서 발랄하고 경쾌하게 파가니니를 표현하여 이단아 이미지를 일단 성공적으로 구축한다. 가령, 샬롯을 오디션하면서 고양이 소리를 포함한 각종 동물 소리를 악기와 입으로 내는 장면은 틀에 얽매이지 않는 예술가의 자유분방함을 편하게 보여준다. 연주회 도중 바이올린 줄이 다 끊어지고 G현 하나만으로 이어가는 장면 역시 과도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정제되지 않은 연기가 오히려 빛을 발하는 장면들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다시 처음의 전제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작품이 파가니니의 악마성을 대신하기 위해 내세운 것은 그의 삶을 ‘외롭고 슬픈’ 관점으로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2막 초반에서 파가니니의 성장 과정을 사실과 허구를 결합하여 위치시킨 것은, 그의 기이한 천재성이 현실의 강압적 요구에 의해 길러진 것이기도 하다는 관점을 삽입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시작부터 외롭고 슬픈 삶이다. 더구나 파가니니가 콜랭(샬롯의 약혼자로서 샬롯이 파가니니의 연주회에 참여했다는 것에 격분함)에 의해 감금된 샬롯을 빼내기 위해 몸값으로 거금을 약속하는 장면은, 돈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일상을 더 슬프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하지만 그의 삶이 정말로 ‘외롭고 슬픈’ 것이 되려면, 주위의 장벽에 지쳐 점차 꺼져가는 2막 후반부가 훨씬 설득적일 필요가 있다. 온갖 억측과 상상(가령, 애인을 살해해서 배를 갈라 창자로 만든 바이올린으로 연주한다는 등의 소문)에 의해 악마로 낙인찍힌 상황을 마주하는 파가니니의 절규는 사실 거의 흥미롭지 않다. 예상할 수 있듯 이것은 콘의 연기가 갖는 한계에 기인한다. 떨리고 흐느끼는 목소리와 그의 정서 사이에 균열이 커서 파가니니가 파멸하는 순간의 극적 긴장감이 잘 보이지 않고, 샬롯이 건네는 위로의 말과도 ‘주고받기’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작품의 클라이막스가 배우의 연기 내공 부족으로 도달해야 할 지점까지 치고 올라가지 못하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텍스트 내적으로도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파가니니가 마지막 파멸에 이르는 순간에 장면 사이의 논리적 연결고리가 부족하여 파가니니를 연기하는 배우의 연기가 힘을 받기 어렵게 되어 있다. 사실 신부와 파가니니가 대립하는 이 마지막 장면에는, <파가니니>가 보여주고 싶은 ‘파가니니’의 자화상이 집약되어 있다. 고백서에 악마임을 서명하라는 신부의 다그침에 “내 음악이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린 거라면, 난 이미 죽어서 지옥에 있었던 거니까, 그러면 나는 악마입니다.”라고 말하는 파가니니를 주목해야 한다. 자신이 만든 음악에 더 이상 자신이 없다면 이미 죽은 예술가라는 인식이다. 만약 파가니니가 실제로 자신을 악마라고 인정했다면, 문자 그대로의 악마가 아니라 사람들을 호도하고 더 이상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죽은 예술가-악마라는 차원에서였을 것이다. 따라서 파가니니의 삶이 정확히 ‘외롭고 슬픈’ 것으로 관객에게 보이려면, 이러한 자화상이 극적 의미를 완성시켜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국면은 배우의 표현력 문제와 다소 갑작스러운 서사의 비약으로 완전하게 그 의미를 성취하지 못한다. 뮤지컬 <파가니니>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다.
결국 선택한 것
사실 2막 마지막으로 들어가면 <파가니니>의 선택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피날레에 등장하는 약 10분간 이어지는 바이올린 연주, ‘악마의 콘서트’가 그것이다. 콘은 이 장면을 위해 존재하는 ‘뮤지션’으로 공연에 가장 최적화되어 있다. 파가니니가 실제로 즐겨 연주했다는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 파가니니의 대표작 ‘라캄파넬라’와 ‘카프리스 24번’이 즉흥연주와 함께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은 뮤지컬 <파가니니>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대 중앙 높은 곳에서 조명의 집중적인 세례를 받으며 강렬하고 현란하게 연주를 완성하는 피날레는 파가니니의 이미지를 만들고, 이 작품이 무엇으로부터 시작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뮤지컬은 영화와 달리 드라마와 결부된 음악의 현장성이 가장 중요한 장르다. 따라서 ‘액터-뮤지션’의 ‘뮤지션’으로서의 역량이 뛰어나다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혼신을 다하는 콘의 연주는 이 작품을 다른 작품들과 구별 지으며 무엇보다 그의 ‘연주’를 들으러 온 관객들을 만족시킨다. 클래식이 아닌 재즈와 집시 음악, 그리고 뮤지컬 씬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여전히 정통 클래식 연주에 능한 콘의 진가가 확인되는 순간이다.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무대 상수와 하수에 분리되어 배치된 밴드는 콘의 연주를 음악적으로 더 화려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피날레로 집약된 공연의 강점이 <파가니니>의 약점을 전부 가릴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작품이 쇼뮤지컬이 아닌 서사성이 강한 뮤지컬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뿐만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점들 외에도 샬롯 역의 하현지 배우(샬롯은 유주혜, 하현지 배우의 더블 캐스팅으로 되어 있다)는, 호흡과 발성이 다소 약해 대사와 노래 모두에서 약점을 보였다. 현재 변화하는 추세에 있으나, 그동안 다수의 뮤지컬들이 여성을 작품 속에서 도구적으로 다루고 중도에 서사를 중단해왔던 관성이 <파가니니>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만큼 샬롯 연기는 더 입체적으로 다루어져야 관객이 설득될 수 있다. 파가니니와 샬롯이 관계를 형성하고 발전시키며 서로를 위로하는 데에까지 나아가는 연애 서사가 설득력이 약해 아쉬운 이유다.
<파가니니>를 통해 국내에서 ‘액터-뮤지션’ 뮤지컬은 좀처럼 시도되기 어려운 장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연기, 노래, 춤 외에 ‘악기 연주’까지 능해야 하는 뮤지컬 배우의 요건이 만족되지 않는다면 액터-뮤지션 뮤지컬은 한 쪽에 치우친 공연으로 영원히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기획력으로 승부를 걸어 관객을 제대로 만족시킬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파가니니>
프로듀서: 장소영, 한승원
작: 김은혜, 김선미
작곡/연출: 김은영
작곡/음악감독: 임세영
단체: HJ컬쳐, 대전예술의전당
공연일시: 2019/02/15-03/31
공연장소: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관극일시: 2019/02/24 6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