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선하게 행동하는가?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_이수현

원작 류드밀라 라주몹스까야

각색 오인하

연출 김태형

제작 아이엠컬쳐

장소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일시 2020.06.16 ~ 2020.09.06

선과 악은 어떤 기준으로 구분되는가? 그 이전에, 선은 무엇인가? 선으로 여겨지는 행위는 성문법처럼 규정되어있지 않고 특정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따라서 사회에 변화가 일어났을 때를 기준으로 그 모습이 변한다. 가령 조선에서는 과부의 수절이 선으로 여겨졌지만, 현시대에서는 폐습이다. 그럼에도 보편적 선을 찾으려는 노력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지금까지 진행되었으며 그 사조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필자는 그런 변화의 연속선에서 ‘인간은 왜 선한 행위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적 담론을 이끌어냈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에서 찾아보고자 하였다.

라트비아 리가 출신의 류드밀라 라주몹스까야는 극작가로, ‘가족’, ‘오래된 집에서의 꿈’, ‘내 여동생 루살로치까’ 등의 여러 작품을 남겼다. 그녀의 작품 중 대중에게 강렬히 각인된 것은 물론 ‘존경하는 엘레나 세르게예브나(원제)’이라고 할 수 있다. 해당 작품은 1980년에 발표되었고 당시 라트비아는 소련에 병합되어있었는데, 소련 당국의 명에 따라 초연 당시 공연금지 처분을 받은 바 있다. 1965년 이후 소련 경제의 주도권이 국가에서 경영인들에게 위임되며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의 중간 지점인 혼합경제의 양상이 나타났는데, 이에 따라 황금만능주의나 부의 격차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작가는 역사와 이상, 미래 등의 가치보다는 눈앞의 개인적 이득만을 탐하는 당대 소련 사회에 대한 비판을 작품에 그려냈는데, 소련은 그것을 ‘혼란한 사회 풍조 조성’과 ‘소련 사회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라는 명목으로 일축해버린 것이다. 당시의 소련은 문학, 음악 등을 포함한 대중문화 전체를 검열하고 있었다.

아픈 어머니를 둔 수학교사 엘레나 세르게예브나의 생일에 네 명의 제자가 방문한다. 표면상의 이유는 스승의 생일축하였지만, 본 목적은 그들의 졸업 시험 답안지가 보관되어있는 금고의 열쇠였다. 엘레나에게 시나브로 압력을 넣던 그들은 결국 스승의 몸과 집을 뒤지기까지 하는 패륜적 행위를 저지르기도 한다. 사랑하는 제자들의 위선적인 모습에 엘레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한편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유지하며 열쇠를 주지 않지만, 연극 후반부에서 제자 중 홍일점인 랄랴가 발로쟈에 의해 성폭행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엘레나는 결국 열쇠를 건네주게 된다.

작중 내 등장인물을 이분법적으로 분류한다면 엘레나와 제자들의 대립 구도가 형성된다. 이때 제자는 모두 발로쟈의 뜻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논의의 단순화를 위해 엘레나와 발로쟈의 대립이라고도 할 수 있다. 더 자세하게는, 정의와 이상 등의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는 엘레나와 개인의 이득, 권력과 힘을 탐하는 발로쟈는 물리적, 정신적 외부 갈등을 끊임없이 일으킨다. 그렇다면 그 갈등의 승자는 누구일까? 결과적으로 열쇠를 얻었으니 발로쟈의 승리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발로쟈는 애초에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열쇠가 필요하지 않았고, 같은 편에 속하던 친구들은 그들의 최종 목적이었던 열쇠를 스스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발로쟈는 엘레나에게 열쇠를 얻어내는 것을 일종의 스포츠라고 생각하고, 그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 온갖 비윤리적인 짓을 저지르는데, 이 과정을 직접 지켜본 빠샤와 비쨔, 그리고 랄랴는 그에게 질려버린 것이다. 즉, 이것이 팀 스포츠였다면 발로쟈는 혼자 이겼기에 불완전한 승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작중에서도 발로쟈는 열쇠를 얻었음에도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며 혼자 집을 나가버린다. 반면, 엘레나는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도덕적 신념을 포기하고 열쇠를 넘김으로써 발로쟈에게 굴복했으므로 패배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처절한 노력이 빠샤와 비쨔, 랄랴에게 전달되었고, 그들은 이에 일부 감화된 듯한 모습을 보인다. 비쨔는 후반부터 발로쟈에게 대항하였고 랄랴는 끝까지 엘레나 곁에 남아있었으며 빠샤는 자신의 유일한 목적이었던 열쇠를 스스로 포기한다. 즉, 엘레나의 패배도 완전한 패배가 아니다. 다른 관점에서는 엘레나의 불완전한 승리와 발로쟈의 불완전한 패배라고 볼 여지도 있는 것이다.

이 불완전한 승패의 갈림은 작가가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승패 따윈 이미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필자는 이 시점에서 엘레나가 보여준 도덕적 신념이 어떤 의미인지를 음미하고자 한다. 그녀는 선한 인물이고, 작중 내내 선한 행동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아마 종반부에서 랄랴를 성폭행하려는 발로쟈의 외통수가 아니었다면 끝까지 열쇠를 지켰을 인물이다. 그러나 목적에 이르는 수단 역시도 정의로워야 하는 선인과는 달리 악인은 목표를 이루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열쇠를 얻기 위해서라면 여자의 옷을 벗겨서라도 협박할 수 있다. 이러한 선인과 악인이 가진 제한의 불균형은 애초부터 선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결과적으로, 선인은 악인과의 대결에서 이기기도 힘들고, 피해를 입을 가능성도 더 크다는 결론이 나온다. 악한 행위를 선택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보이기까지 한다. 발로쟈 역시 작중에서 끊임없이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게 뭔데요?”라며 엘레나에게 질문한다. 이는 마치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악한 행위가 여러모로 이득이 되고 일을 더 수월하게 만든다면, 왜 인류는 선한 행위를 지향하고, 혹은 지향해야 한다고 교육되는 것일까?

눈앞의 이득만을 우선시하면, 종국적으로는 사회 시스템에 커다란 혼란이 생긴다. 미시경제학에서는 Nash-균형이라는 개념을 학습한다. 어느 시장에서 특정 재화의 생산 기업이 단 두 곳일 때를 복점 시장이라고 하는데, 이때 두 기업은 담합하여 카르텔을 형성하고 재화의 생산량을 조절한다. 가령 10개를 생산하는 것이 최대의 이윤이 된다면 기업 A와 B는 각각 5개의 재화를 생산하여 판매할 것이다. 그러나 B 기업이 배신하여 약속한 생산량보다 많은 재화를 생산한다면 시장가격은 하락하고, 이는 A 기업의 손해로 직결된다. 즉, 한쪽이 배신하는 순간, 배신하지 않은 다른 한쪽은 손해를 보게 되므로 배신을 할 유인이 발생한다. 결국, 둘 다 배신함으로써 두 기업은 초기상태보다 적은 이윤을 얻게 된다. 경제학에서는 이처럼 담합이 깨짐으로써 생긴 새로운 균형상태를 Nash-균형이라 칭하며, 이는 사회 전체 시스템의 혼란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구성원이 모두 악하게 행동한다면 이는 홉스가 말한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자연상태로 회귀하는 것이며, 사회는 사회계약 이전의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따라서, 악한 행위는 종국적으로 사회를 파멸의 길로 이끄는 한편, 선한 행위는 사회를 유지하고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영양분으로 작용한다. 이는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게 뭔데요?’라며 묻던 발로쟈의 질문에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내용 외적으로도, 작중 사건을 전개하는 핵심 요소인 엘레나와 발로쟈의 대립이 무대 연출에서도 드러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티켓예매를 할 때 보니, 무대가 홀의 정중앙에 있었고 관객석은 무대의 앞과 뒤에 위치하여 관객들이 서로 바라보도록 이분화되어있었다. 엘레나와 발로쟈가 갈등을 일으킬 때, 그 둘은 필연적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되는데, 이때 무대 앞의 관객들은 엘레나와 발로쟈 둘 중 하나의 표정에만 포커스를 맞출 수밖에 없다. 가령, 엘레나가 자신의 도덕적 신념을 이야기할 때 발로쟈는 관객을 등지고 있으며, 발로쟈가 자신의 비뚤어진 신념을 이야기할 때는 엘레나가 관객을 등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화편화, 혹은 프레이밍 등의 연출은 관객에게 특정 요소를 강조함으로써 연출이 의도한 대로 관객의 의식을 조정할 수 있다. 또한, 조명과 음향의 효과적 사용도 인상적이었다. 공연을 처음 보는 관객들은 스승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한 네 명의 제자를 처음에는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건배를 하며 잔을 부딪칠 때 무대 위의 시간 흐름이 급속도로 느려지며 쿵-하는 둔탁한 효과음이 들리고 불길한 빨간색 조명이 강렬히 비치는 것을 목격한 다음에야 비로소 관객들은 제자들의 숨은 목적에 대해 파악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후 이 의심은 더 명확해지는데, 엘레나가 자리를 비웠을 때 보이는 제자들의 태도나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비열한 눈빛 등에서 그들의 숨겨진 목적이 적나라하게 암시된다. 즉, 음향이나 조명 등의 무대장치 등이 단순히 현재 상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후에 있을 사건의 암시로서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새롭다고 할만하다.

류드밀라 라주몹스까야는 누구의 승리도 아닌, 누구의 패배도 아닌 불완전한 승부를 통해 자신의 고향과 당국에 대한 경고와 선의 당위성을 설파한다. 현실에 염증을 겪은 작가가 소설로서 그 세태를 고발하는 경우는 빈번하다. 작가 조세희도 70년대 이주민들이 겪은 아픔을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고발하였고, 2019년에 개봉된 ‘기생충’ 역시 그와 맥을 같이 한다. 비록 초연은 공연금지 처분을 받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미하일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개혁, 개방정책)로 모든 극장에서 공연될 수 있었고, 유럽에도 전파되었으며 어언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에서 계속해서 공연되고 있다. 그러나 작품 곳곳에서 랄랴의 역할이 수동적인 형태로 제한되며, 벨로쟈가 엘레나를 협박하는 장면에서의 폭력성이 지나치게 강조되었다는 점에서 여성의 인권이 지금과는 달리 지켜지지 않았다는 한계점이 보였다. 특히 벨로쟈가 보여준 극단적 폭력은, 연극 포스터에 나온 기묘한 문양의 열쇠와 “선생님, 잠깐만 열쇠 좀 빌려주시면 안돼요?”라는 문구만 보고 환상 동화적 요소를 떠올렸던 필자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특성이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은 해당 시기의 비윤리적, 비인간적 행태를 핍진하게 보여주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희망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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