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볼프강 폰 괴테
‘에그몬트’
임야비
기분 좋은 잠이여! 너는 행복처럼 바라지도 원하지도 않았는데 기꺼이 찾아오는구나!
– 에그몬트 5막
라모랄 에그몬트 백작(1522~1568)은 네덜란드의 실존 인물로 스페인의 압제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하다 처형된 구국 영웅이다.
1788년. 39살의 괴테는 라모랄 에그몬트 백작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아 영웅의 고뇌와 사랑 그리고 숭고한 죽음과 승리라는 주제로 비극 ‘에그몬트’를 완성한다. 질풍노도(Sturm und Drang) 시기의 작품답게 실존 여부가 불투명한 여인(클레르헨)과의 사랑이 가미되어 있고, 백작의 행동은 애국심이라는 깃발 아래에서 극적으로 미화되어 있다.
평소 괴테를 존경해 마지않던 베토벤은 1809년 빈 궁정극장으로부터 에그몬트의 극부수음악을 의뢰받고 정성을 기울여 작곡에 착수했다.
1년 뒤 완성된 전체 곡은 유명한 서곡을 포함하여 총 10곡으로, 2관 편성의 오케스트라 외에 소프라노 한 명과 남성 나레이터 한 명이 포함되어 있다. 소프라노는 여주인공인 클레르헨으로 분하여 2개의 가곡을 부르고, 남성 나레이터는 에그몬트 역할과 극의 진행자 역할을 겸한다. 나레이터 부분의 텍스트는 가사가 아니라 대사이므로 가수가 아닌 연극배우가 이 역할을 맡는다.
문학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괴테의 비극 에그몬트를 읽거나 연극을 관람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서곡만 자주 들었을 뿐 전곡을 들어 본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두 분야의 애호가들 모두 괴테와 베토벤에게 영감을 준 에그몬트 백작의 이야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파우스트’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그늘에 가려진 비인기 희곡 에그몬트
‘서곡’에 밀려 자주 연주 녹음되지 않는 전체 10곡의 극부수음악 에그몬트
괴테와 베토벤의 명성에 밀려 관심조차 없는 영웅 에그몬트
당시에는 인기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거의 잊힌 격한 감동을 베토벤의 극부수음악으로 재조명해 보자.
서곡 – 워낙에 유명한 곡이다. 베토벤은 첫 네 마디만으로 우리를 16세기 네달란드의 위태로운 성으로 안내한다. 8분 내내 긴장감이 넘치는 곡으로 질풍 같은 관현악이 에그몬트의 고뇌를 노도처럼 들려준다. 하나만 덧붙이자면, 마지막 1분 정도에 트럼펫과 팀파니가 포효하는 피날레 부분(Allegro con brio)은 작품의 이해를 위해 꼭 기억해 두자.
제 1 곡 – Leid. 클레르헨의 노래. 리트(Lied)라고 표기된 부분은 소프라노가 관현악 반주에 맞춰서 노래하는 성악 부분이다. 희곡의 1막 3장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스페인군의 위협으로부터 조국을 지키려는 클레르헨의 강한 의지가 드러난다.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어라!”로 시작하는 선동적인 행진곡으로 서곡의 굵직한 힘이 고스란히 소프라노의 목청으로 이어진다. 음악을 그림으로 치환해보자면, 들라크루아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딱 맞아떨어진다.
제 2 곡 – 1막과 2막 사이의 막간 음악으로 현악 위주로 조용히 연주되다가 갑자기 몰아치는 곡이다. 주인공들의 심리적인 불안과 다가오는 외부의 위협을 극적으로 대비했다.
제 3곡 – 2막 말미에 에그몬트의 독백이 끝나고 연주되는 막간 음악이다. 고음부는 아름다운 서정을 노래하지만, 저음부와 팀파니는 점점 깊어지는 에그몬트의 고뇌를 표현하고 있다.
제 4 곡 – Leid. 클레르헨의 노래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차서”. 제 1 곡과 마찬가지로 소프라노가 부르는 가곡이다. 베토벤의 가곡 짓는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곡이다. 가수의 기교를 뽐내는 ‘이탈리아식 콘서트 아리아’지만, 관현악과 성악의 절묘한 효과와 텍스트의 극적 표현은 ‘독일식 극부수음악’의 진면모를 들려준다. 2분 정도의 짧은 곡이지만, 훗날 바그너 악극의 원형을 희미하게 느낄 수 있다.
제 5 곡 – 3막과 4막 사이에 연주되는 막간 음악으로 가장 연극적인 요소가 강하다. 극의 진행에 맞춰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부분은 3막이 내려가는 동안 연주되는 활기찬 곡으로 거의 오보에 협주곡이다. 에그몬트로부터 고백을 받은 클레르헨의 설레는 마음이 청랑한 오보에 독주로 표현된다. 두 번째 부분은 나레이터가 에그몬트의 출정을 이야기하면서 시작한다. 대사의 배경음악처럼 작은 음량으로 시작한 행진곡은 점점 커지면서 위풍당당한 행진곡으로 울려 퍼진다. 세 번째 부분은 4막이 올라가는 동안 연주되는 곡으로 행진곡의 음량이 점점 작아지면서 불길한 징조를 암시하는 어두운 음악이 깔린다.
제 6 곡 – 4막의 마지막 장면부터 연주되는 곡으로 에그몬트의 결기 있는 대사 “이 칼은 왕을 위해 싸웠던 칼이다!”와 함께 웅장하게 시작된다. 하지만 그 용맹은 점점 약해지고 클레르헨에 대한 연민으로 바뀐다. 괴테의 의도를 꿰뚫는 베토벤의 영민함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클레르헨과 아름다웠던 사랑을 추억하는 멜로디는 전체 10곡 중에서 가장 뭉클한 부분이다.
제 7 곡 – 클레르헨의 죽음. 5막 3장에서 클레르헨이 죽고난 뒤 연주되는 무겁고 느린 애가(哀歌)다. 연주의 뒷부분에 나레이터의 묵직한 대사가 음악의 어두운 무게를 더한다.
제 8 곡 – 멜로 드라마. 음악적으로도 연극적으로도 클라이막스다. 감옥에 갇힌 에그몬트가 사형을 기다리는 장면에서 연주가 시작된다. 에그몬트의 독백 “기분 좋은 잠이여! 너는 행복처럼 바라지도 원하지도 않았는데 기꺼이 찾아오는구나”을 나레이터가 하는 동안 음악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간다. 죽은 클레르헨이 승리의 여신이 되어 에그몬트 앞에 나타난다. 멀리서 작은 북소리가 들리고 그는 정신착란 상태에서 자신의 죽음과 조국의 승리를 일체화하는 웅변을 내뿜는다. 북소리는 점점 고조되면서 병사들이 에그몬트를 교수대로 끌고 나가는 최후의 장면에서 그는 마지막 대사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하여 기쁘게 죽음을 맞으리!”를 외친다.
제 9 곡 – 승리의 교향곡. 마지막 대사가 끝남과 동시에 관현악의 총주로 울려 퍼지는 팡파레는 앞서 설명한 서곡의 맨 뒤 1분 Allegro con brio 부분이다. 단두대로 끌려가는 영웅의 뒷모습과 그의 죽음으로 쟁취한 승리를 표현한다. 이 부분을 음악으로만 들으면 호쾌한 느낌만 든다. 음악과 나레이션을 함께 들으면 팔에 소름이 돋는다. 괴테의 에그몬트를 알고 음악과 나레이션을 함께 들으면 온몸에 간질 전류가 흐른다. 글과 음악의 시너지가 만들어내는 감동은 찬란하다. ‘승리의 교향곡’은 영웅 에그몬트 백작과 극작가 괴테와 악성 베토벤의 찬란한 승리다.
극부수음악 에그몬트의 전곡 음반 중 2개를 추천한다.
에그몬트의 ‘극적 감동’을 느끼고 싶은 분에게는 클라우디오 아바도 – 베를린 필의 91년 라이브 앨범을 추천한다.
이 음반을 기점으로 그동안 서곡만 듣던 애호가들이 에그몬트 전곡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반 기획도 잘했지만, 연주 또한 좋다. 가장 큰 장점은 나레이터 역할을 맡은 브루노 간츠(Bruno Ganz)의 호소력 넘치는 연기다. 특히 마지막 멜로드라마에서 승리의 교향곡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압권이다. 자주 반복해서 듣게 되는 부분인데, 긴장을 응축시키다가 한꺼번에 폭발시키는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이 음반의 큰 단점은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실황 연주여서 연극적인 요소를 걷어내고 음악적인 부분만 강조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막간 음악 2가 빠져있고, 나레이션 부분이 많이 생략되어 있다.
에그몬트의 ‘극적 구조’를 이해하고 싶은 분에게는 조지 셸이 비엔나 필을 이끌고 69년에 연주한 음반을 추천한다.
장점은 베토벤이 연극에 맞추어 작곡한 원형을 그대로 연주했다는 점이다. 극에 음악을 대입해보려는 분이나, 극부수음악에서 극과 음악의 유기적인 관계를 연구하시려는 분은 이 음반이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단점은 나레이터 역할을 맡은 Wussow가 마치 책을 읽듯 단조롭게 연기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목소리 톤이 너무 편평하다) 이 캐스팅은 음반 기획자나 음악 감독인 지휘자의 명백한 실수다.
에그몬트의 가장 큰 업적은 자신을 희생하여 네덜란드의 독립을 쟁취했다는 정치적,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에게 에그몬트 백작의 큰 업적은 문학적, 예술적인 것이다. 백작의 숭고한 죽음 덕분에 두 거장 괴테와 베토벤의 총체 예술 작품이 탄생하였다. 괴테가 극작하고, 베토벤이 음악을 붙여준 공연. 한 영웅의 죽음에 부치는 최고의 헌사가 아닐까?
우리에게 이런 위대한 작품을 남겨준 백작을 위해서 괴테의 희곡 에그몬트를 찾아 읽지는 못하더라도, 베토벤의 극부수음악 에그몬트 전 10곡을 들어보자. 총 40분 정도의 곡이다. 처음 들으면 괴테를 읽은 느낌이 들고, 다시 들으면 연극을 본 느낌이 들 것이다. 한 번 더 감상하면 어느새 에그몬트 백작의 휘몰아치는 머릿속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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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야비(tristan-1@daum.net)
– 자유기고가, 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 극단 동맹 연출부 드라마투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