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브레히트는 古典主義 작가인가? (6)
이재진 (단국대 명예교수)
묘비석
죽음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안쓰럽고 성스럽고 경이롭다. 그리고 또 흥미롭다. 우리가 이곳에 올 때 슬그머니 찾아왔듯이 알지 못하는 사이 이곳을 슬쩍 떠나게 된다면 그 얼마나 다행스러울까? 그런데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되돌아가는 것일까? 브레히트는 58세에 죽었다. 의사의 오진이 있었지만, 그것은 별 의미가 없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묘비석을(에세이1 참조) 세울 필요는 없다고 브레히트는 말했다. 그래도 정 원한다면 이렇게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친구 많은 제안을 했지, 우리가 그걸 받아들였어.” 몇 몇 독일 시인들의 죽음을 들여다본다.
괴테와 죽은 실러
실러는 46세에 죽었다. 요절한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로도 꽤 이른 편이다. 밤낮을 가리지 못하던 시인은 썩은 사과냄새를 맡아야 글을 썼다. 서랍속에는 그래 늘 사과가 썩고 있었다. 실러의 시신을 부검한 의사들은 너무나 놀랐다. 그 가엾은 분이 이런 상태로 그렇게 질기게 버텼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심장, 폐, 신장 등 거의 모든 내장기관이 망가져 있었다. 한밤중 실러의 유해는 텅 빈 조용한 바이마르의 골목길을 지나 공동묘지로 향하고 있었다. 그 당시 장례는 밤에 조용히 치르는 것이 상례였다. 괴테는 그 행렬에 끼어 있지 않았다. 실러의 죽음이 별로 충격을 주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괴테는 정말이지 장례식을 싫어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자기 아내가 죽었을 때도 괴테는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실러보다 10살 일찍 태어난 괴테는 실러가 죽고 나서 26년이나 더 살았다. 만년에 괴테는 실러(!)를 손에 들고 멀끔히 바라보며 “실러의 해골을 바라보며”란 시를 짓기도 했다: “어찌 내 무슨 자격으로 당신을 이 손에 이렇게 잡아 본단 말이오?!”
붓끝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라오콘 논쟁”(에세이2 참조)에서 Winckelmann의 죽음을 아쉬워한 적이 있다. 그 예술사가는 알프스를 넘다가 여관에서 칼에 맞아 죽었다. 가지고 있던 고고학적 가치가 높은 유물 때문이라는 설이 있고, 빙켈만이 호모였고 그로 인해 야기된 시비 때문이라고도 한다 — 마지막 길을 혼자 가기가 너무 외로워 병든 여인을 찾아 권총으로 함께 자살한 [깨어진 항아리]의 Kleist (1777-1811) — “이블무덤“에서 괴로워하던 Heine의 죽음은 이미 이야기했지만, — 장티푸스로 요절한 [보이첵]의 Büchner (1813-1837) — 비를 피해 샹젤리제 가로수 밑에 서 있다가 벼락이 내리쳐 부서진 나뭇가지에 맞은 [비엔나 숲속의 이야기]의 Horvath ( 1901-1938) — 2차대전의 아픔을 온몸에 품고 600km을 걸어서 집에 돌아와 버티다가 끝내 쓰러진 [문밖에서]의 Borchert (1921-1947) — 멀리서 나치의 탱크 소리가 들리자 이내 입에 약을 털어넣은 [멋쟁이 신사]의 Hasenclever (1890-1940) — 붓끝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한탄하며 좌절한 토마스 만의 장남 [메피스토]의 Klaus Mann(1906-1949) 등등. 그럼 잔다르크는?(독일식 이름은 요한나)
장작더미가 높이 쌓인 화형대로 올라가며 요한나는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천사를 불러 보았다. 늘 나타나던 천사가 이번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그리했듯이 소녀도 자신을 장작더미위에 오르게 한 이들을 용서하고 싶었다.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몸을 돌려 십자가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기적같이 군인 하나가 얼른 나뭇가지 두 개를 엮어 십자가를 만들어 건네주었다. 별다른 법적 요식행사를 거치지 않고 어린 소녀를 산채로 그대로 불에 태웠다. 요한나는 마지막 순간 이들을 용서하기 위해 기도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에 꼭 쥐고 있던 나무 십자가는 어느새 타서 이미 재가 되어 있었으니! 루앙의 광장에서 한줌의 재로 변한 요한나는 센 강에 흘러갔다. 아직 스물이 되지 않은 처녀였다.(1920년 성녀로 시성된다.)
[도살장의 성 요한나](Die heilige Johanna der Schlachthöfe. 1931)
Shakespeare, Schiller, Bernard Shaw, Paul Claudel, Jean Anouilh 등 많은 작가들이 이 소재(잔다르크/요한나)를 다루었다. 브레히트의 [도살장의 성 요한나]를 연극 비평가 이어링은 “우리세대의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작품“ 이라고 평했다. 브레히트의 희곡 중에서 이보다 더 종교적이고 더 혁명적이고 더 과격한 작품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브레히트는 하나님의 이야기와 더불어 자본주의의 시장경제이론을 크게 뒤섞어 놓았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절규와 마르크스의 자본론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작품보다 더 서정적이고 더 감상적인 드라마도 또 없을 것이다. 이런 모순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런 이중성의 가운데에서 우리는 고전주의 작가 브레히트의 변증법적 다양성/복합성을 만나게 된다.
1932년 베를린 방송국은 방송을 위해 브레히트가 8장면으로 손질한 [도살장의 성 요한나]를 방영했다.
구세군 소령 요한나 다크(Johanna Dark)는 일자리를 찾아 공장앞에 몰려있는 배고픈 노동자들에게 국을 끓여주고 하나님 곁에서 위안을 찾으라고 북을 치며 찬송가를 불러준다. 배고픈 노동자들들 귀에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요한나는 노동자들의 비참함이 어데서 오는지 찾아나선다.
해결점을 찾아헤매던 중 도살장의 실세인 마울러(Mauler)를 찾아간다. 공장 문을 열어 노동자들에게 일거리를 주도록 요한나는 간청한다. 마울러는 “자본주의와 종교”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즉 자본주의의 완전치 못한 구조 때문에 누군가 한 사람의 힘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 그러므로 구세군이 북을 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런 구조를 바꾸도록 노력함이 필요하다고 설득한다. 요한나는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운명을 함께 하기로 마음먹는다. 떠나가는 요한나를 보며 마울러는 창밖을 내다보며 감상에 젖는다. 피비린내 나는 도살장의 대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허약한 모습이다.(에세이2에서 소개한 실러의 [오를레앙의 성처녀] 참조)
마울러
그래 오늘 밤
일어나거라, 마울러, 매 시간 마다
그리고 창문 밖을 내다보아라, 눈이 내리는지, 혹 눈이 내리면
저 여자 머리 위에도 내릴 것이다, 네가 아끼는 저 여인의 머리위에.
전지전능한 신들이 인간을 도우면 좋은 세상이 오지 않을까? 무능하고 무책임한 신이 변화하리라고는, 변화를 주리라고는 처음부터 브레히트는 기대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사천의 선인]의 주제). 신들은 참담한 심정으로 반문한다. “이 세상은 바뀌어야 된다고? 어떻게? 누구 손으로?” 그 해결책을 신에게서 기대하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함을 브레히트는 강조하고 있다([주인 푼틸라와 하인 맛티]의 주제). 급성폐렴에 걸려 죽어가며 요한나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면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변혁시키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조용히 소리친다. 요한나는 결국 죽은 다음에는 올바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위안은 인간에게 투쟁을 잠재우기 위한 거짓임을 깨닫는다. 종교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다. “죽은 후에 찾아가는 저 세상의 행복”을 약속해 주는 종교의 환상에서 요한나는 벗어난다. 정육업계의 대부들은 죽어가는 요한나의 주위에 둘러서서 죽음을 애도하며 칭송한다.
요한나
그러니 누군가 아래에서 말한다면, 하나님이 계시다고
그렇지만 아무에게도 보이지는 않는다고
보이지는 않으시나 자기들을 도와줄 거라고 말한다면
그런 사람은 머리를 아스팔트에 태질을 처야 될 것이다
죽어 돼질 정도로.
그륀트겐스의 함부르크 초연
브레히트가 죽고(1956) 나서 갑작스레 브레히트-붐이 일어났다. 고인에 대한 애도의 마음이 조금은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으리라. 베를린 노동자 봉기에 대한 오해기 풀렸기 때문이기도 했다(추후 상세히 다룬다.). [파우스트]의 메피스토 연기로 널리 알려진 그륀트겐스(Gustaf Gründgens, 1899-1963)가 1959년 함부르크에서 초연을 성사시켰다. 작품이 완성된 후 무려 27년이나 기다린 셈이다.
객석에 빈 자리는 없었다. 막이 내리자 관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 속에 혼이 나간 듯 정신없이 환호성을 질렀다. 누구보다도 연출자 그륀트겐스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고 있었다. 1782년 만하임 극장에서 실러의 [군도]가 막을 내렸을 때 이와 같았으리라!(에세이2 참조) 함부르크 극장의 이 공연은 독일연극사에 한 획을 긋는 굉장한 사건이 되었다. 여주인공 요한나 역은 브레히트와 첫 번째 부인 초프(Marianne Zoff. 1893-1984)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한네 히오프(Hanne Hiob. 1923-2009)가 맡았다.
그륀트겐스는 이 작품에 진하게 묻어있는 볼셰비키, 공산주의, 무신론, 프로파간다와 관련된 표현은 조심스레 잘라냈다. 반 브레히트라는 정서를 고려해서 그에 맞추어 철저하게 고전비극으로 연출했다. 시카고의 도살장 공장주들은 마피아처럼 정장을 하고 하얀 구두에 우산을 칼처럼 휘두른다. 통조림공장주들이나 도살장 주인들은 햄릿과 같은 고전작품의 주인공들처럼 운율에 맞추어 귀족이나 쓰는 고양된 언어를 사용한다. 도덕군자의 냄새를 풍기고 싶어 하는 시카고의 권력자들은 바로 귀족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한국초연
[도살장의 성 요한나]는 브레히트 탄생 100주년 기념공연으로 1998년 12월 대학로 문예회관 대극장의 무대에 올랐다. 작품제목은 [도살장의 잔다크](김태수 연출)로 바뀌었다. 공연이 끝난 후 나는 아는 친구에게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작품에 대한 연구나 열정이 보이지 않아, 너무나 아쉽고, 많이 실망했어.” 하긴 이 작품을 이해하고 소화하기에 브레히트는 여전히 우리에게 낯설었다.(이 작품에 대해 나는 자세하게 해설을 달아놓았다. [도살장의 성 요한나], 지만지, 2017)
*본 기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은 필자의 주장에 따라 국립국어원의 규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좋은 세상이 올까요?’좋은 세상’, ‘덜좋은 세상’에 대한 판단은 지극히 정치적인 견해에 따른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고 아우성 또한 끝이 없고…..하지만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이 참으로 공평합니다.
누구나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아니겠죠.
무더운 여름 건강하세요
에세이란 사전적 의미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체험 혹은 느낌을 생각나는대로 쓰는 짧은 산문형태의 글” 이다.
대부분의 에세이는 그래서 읽을때 부담이 없다. 일반적으로 글에는 글쓴이의 학식과 경험 뿐 아니라 당대의 시대정신과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가벼운 글 일수록 시대조류에 민감하고 시대를 적극 반영하게 마련이다. 자유민주주의란 커다란 사회체계의 틀 속에서 우린 너무나 커다란 정치적 혼돈과 이념 갈등을 마딱뜨리며 살고 있다.
그런 시대적 배경이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요즘의 글들은 너무 자극적이거나 정파적 이며 또 일방적이고 가볍다.
이런 가운데, 아주 오랫 만에 깊이와 재미가 있고 절제되어 있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그러면서 시대적 메세지가 담겨 있는 ” 브레히트 에세이” 를 오늘의 서울연극에서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은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커다란 기쁨이임과 동시에 행운이 아닐수 없다. 이런 글들은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하며 글쓴이와 편집자에게 감사의 인사들 드린다…
유영호
(만족스럽지는 않겠지만 써놓았던 시 중에서 몇줄 옮겨 답글로 대신합니다. 비유적인 글입니다.)
죽음과 삶은 하나이며 동시에 또 다른 인간의 축복이다/ 삶이 없으면 죽음이란 없다/ 죽음이 없으면 어찌 삶이 있단 말인가/ 나의 죽음이 없다면 어찌 다른 이의 태어남이 있으랴!/ 신들은 인간을 만들었다/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통해 창조의 지루함을 이겨보려고!/ 불멸의 신들은 인간을 부러워한다/ 인간에게는 죽음이란 축복이 있기에!
Dr. Park
글쓰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무엇보다 독자의 반응이 적기 때문입니다. 원문보다 더 좋은 댓글을 달아주니 고맙구려. 아직 꼭 다루고 싶은 작품들이 여럿(억척 어멈/코카서스 백묵원/코리올란 등) 남아있습니다. 금년은 아마 버틸 것입니다.
찬찬히 읽어보게되는 선생님의 글은 꼭 두 번을 읽게 합니다. 찬찬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