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준 배우
글_ 선연 김수미(연극평론가)
**릴레이톡톡은 오랫동안 대학로 무대에 섰던 배우들을 찾아갑니다.
긴 시간동안 무대를 지켜왔던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통해서 배우의 가치와 의미를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좋은 배우는 어떤 사람들인가요. 그들이 만드는 연극은 어떤 모습일까요. 릴레이톡톡은 배우들이 지목하는 배우들로 이어나갑니다.
원래 이번 달의 릴레이 배우는 남미정이었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터뷰가 어려워진 남미정은 바통을 이어갈 배우를 며칠간 고심했다. 그녀는 임영준을 지목했고, 함께 보내온 추천사가 살뜰했다.
“최근에 김정 연출의 <팜>을 같이 공연했어요. 임영준 배우는 독특해요. 그 배우 연기를 보면 도대체 어디서 저 열정들이 나오나 싶게 궁금해지죠. 그다음엔 매력적인 부조화들이 보이기 시작해요. 예를 들면 반듯함과 병맛? 잘생김과 너저분함? 날 선 예민함과 오래된 장맛 같은 것들이 혼합된. 그래서 무대에서 무궁무진한 것들이 막 튀어나오나 봐요. 궁금해지시죠?”
1. 맨살을 드러낸 민낯으로
임영준은 올해 15년 된 배우다. 국립극단 시즌 단원도 했고 이름있는 연출가 작품에 출연도 했지만, 대사가 적거나 눈에 띄지 않는 역할일 때가 많아서 작품마다 그를 기억하기는 쉽지 않았다. 임영준은 서울예대를 졸업하고 극단 생활을 5년 정도 한 후에 4년 정도는 방황도 했다. 영화 오디션도 보고, 프로덕션에도 들어가 봤다. 반지하에서 혼자 살 때는 괜한 고집으로 300회씩 하는 ‘돈 버는 연극’에도 출연했다.
“그런 연극은 워낙 규모도 작고 알려지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그때는 그런 연극이 좋았어요. 제가 생각한 대로 해볼 수 있었거든요, 매일 바꿔보고 발전시켜보고, 나름대로 실험을 엄청 해봤죠. 나중에 알았는데, 저 때문에 동료들이 많이 힘들었다네요.(웃음)”
임영준처럼 연극을 전공한 후에 대학로에서 연극을 시작하는 젊은 배우 중에는 이와 비슷한 과정을 겪는 이들이 적지 않다. 배역의 결정권이 없고 경험도 적어서 몇 년씩 이름도 없는 단역에 그치는 경우가 많으니, 혈기왕성한 젊은 배우들에게는 대사 많은 역할이 유혹적일 수도 있다. 젊은 연극배우가 이름 없이 대학로에서 보내는 10년이라는 시간이 때로는 암담하고 막막할 때도 있다. 하루아침에 유명해진 것처럼 보이는 방송가의 젊은 스타들을 바라볼 때면, 그 막막함은 배가 될 것이다. 연극배우의 10년이란, 배우가 되어가는 통과의례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느끼고 나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임영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2017년 공연한 <임영준 햄릿>은 실제로 임영준의 10년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 주인공이 되고 싶은 무명 배우, 다소 우울하고 무겁게 느껴질 법한 젊은 연극배우의 이야기를 <임영준의 햄릿>(하수민, 김정 공동연출)은 다소 엉뚱하고 코믹한 원맨쇼로 풀어냈다. 대부분의 스토리가 임영준의 프로필에서 나왔고, 공연 중에 겪었던 크고 작은 에피소드는 대사가 되었다.
“연출가가 2명이나 붙은 작품이었어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죠. 두 사람이 서로 친하고 신뢰가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었지, 지금은 아마 어려울 거예요. 그때는 공연 준비할 시간이 2주 반밖에 안 되었는데도, 셋이 똘똘 뭉쳐서 미친 듯이 만들었어요. 그 와중에 부모님 계시는 곳으로 엠티도 갔어요. 그때 두 분 촬영한 것도 장면으로 넣었어요. 아이디어가 될 것 같은 건 다 했죠. 김정 연출과 제가 미친 듯이 재밌게 장면을 만들면 하수민 연출이 브레이크를 걸어 주는 식이었어요. 한 씬 때문에 1주일을 지지부진하기도 했고, 처음에는 그게 1인극이 될 줄도 몰랐어요.”
첫 공연은 2017년 아라리오뮤지엄 소극장에서였다. 3일 동안 주로 지인이나 관계자들만 본다고 생각했는데, 객석의 환호가 엄청났다. 이듬해 두산아트센터 공연이 확정되었고, 그 공연으로 임영준은 2018년 동아연극상에서 유인촌신인연기상을 받았다.
솔직한 이야기가 진정성이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정작 그것을 연기하는 배우에게는 쉽고도 어려운 양날의 칼이다. 자신이 본인의 캐릭터를 객관화시켜야 하는 문제도 있지만, 배우의 감정이 매번 사실과 가상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놓이기 때문이다. 맨살을 드러낸 임영준의 민낯은 솔직하고 대담했으며, 그의 연기는 허상과 실재를 오가며 관객을 동요시키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하수민과 김정이라는 두 개의 심장이 임영준을 단단하게 지지했고, 힘차게 박동하는 두 개의 심장으로 임영준은 양껏 호흡했다. 임영준의 찬란한 통과의례는 그렇게 치러졌다.
2. 그때는 미처 몰랐던 것들
서울예대에서 이기도 연출가는 임영준에게 큰 기대를 품어줬던 사람이다. 그는 <마라, 사드> 졸업 공연에서 마라 역을 임영준에게 맡겼다. 그런데 마지막 날, 극도로 고조된 흥분에 취해서 임영준은 그만 감정을 절제 못 하고 연출가의 디렉션을 모두 뒤엎어버렸다. 면목 없이 앉아있던 쫑파티에서 임영준은 실망한 연출가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런 일을 있고도 임영준은 기어코 이기도 연출가가 운영하는 극단 인혁의 단원이 되고 싶었다.
“저를 쳐다보시지도 않았어요. 그래도 계속 찾아갔죠. 제가 그분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너무 좋아해서 어떻게든지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꼭, 사도세자 같았어요. 사실 저는 선생님이 무섭고 어려웠거든요. 박수 소리가 나려면 손바닥을 마주쳐야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매번 선생님의 손바닥에 제 손등을 갖다 대고 어이없이 둥실대는 격이었죠. 그때는 어리기도 했고, 뒤늦게 깨달은 게 많아서 선생님을 생각하면 늘 아쉽고 죄송합니다.”
좌충우돌하던 인혁 단원 생활은 5년 만에 끝이 났다. 짧은 방황을 거치고 임영준은 국립극단 연수 단원이 되었다. 그제야 차츰 연극과 배우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2016년의 <국물 있사옵니다>부터가 국립극단에서 한 작품이에요. 큰 역할도 아니고 이름도 없었지만, 배우는 게 정말 많았죠. 고선웅 연출의 <산허구리>는 제 에너지가 가장 똑바로 펼쳐졌다고 느끼는 작품이에요. 그때 제가 맡은 복조는 마지막 장면에 대사도 없이 잠깐 나오는 작은 역이었어요. 그런데 연출가가 저를, 제 배역을 믿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아요. 소리를 하는 역이어서 창극단 배우를 쓰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도 연출가가 저를 끝까지 믿어주셨거든요.”
임영준은 고선웅 연출가를 만나서 처음으로 자신을 내려놓는 경험을 했다. 어떤 욕심도 없이 그 작품이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오로지 역할에만 몰입했다. 가장 온전한 상태로 배우가 무대에 선다는 느낌을, 임영준은 그렇게 배웠다.
“국립극단에서 박완규 선배님을 보고 저는 좀 놀랐어요. 선배님은 마치 힘든 일들을 다 겪은 큰 사람처럼 보였거든요. 연기하는 태도도 놀라웠죠, 하루는 연습장에서, 제가 보기에는 그날 선배님이 하신 연기가 좋았거든요? 그런데 연출이 ‘재미없어’ 한마디를 하니까, 다음 날 그걸 싹 다 바꿔오시더라고요. 무대 뒤에서는 누구보다도 연습을 많이 하시는데, 테크 리허설을 하던 날 선배님이 떨고 계시는 걸 봤어요. 그건 책임감 같은 거였어요. 무대와 연기에 대한 책임감이 그렇게 무서울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배운 것 같아요.”
기회가 와도 잡을 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다. 임영준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흡수할 기회가 왔을 때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배우 이전에 사람으로서의 임영준을 먼저 성장시켰다.
“제가 유난히 뾰족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학교 때는 연기 때문에 싸움도 많이 했어요. 별명이 화쟁이였을 정도죠. 예민하기도 했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거든요. 저, 그 문제를 10년 만에 깨달았어요. 형들한테도, 같이 했던 동료들에게도 미안해지더라고요. 지금은 저 되게 노력해요. 많이 참아도 보고, 태도나 말을 다르게 해보려고도 해요. 연습할 때는 선후배와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마음속으로 늘 다짐하죠. 다짐만 한다고 되는 일은 아닌데, 안 잊어버리게 기억하려고요. 늘 기억해서 습관이 되게. 아, 이번에 저, 그거 했어요. 연습하다가 후배랑 이야기하고 싶은 게 생겼는데, 살짝 밖으로 불러냈죠. 그리고 진심을 담아서 제 생각을 전했는데, 이야기가 잘 되었어요. 저도, 그게, 되더라고요.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시골에서 자란 임영준은 차가운 시멘트보다 논밭의 초록빛을 더 많이 보고 자랐다. 농사짓는 부모님께서 늘 하시던 잔소리는 ‘조심해라’ ‘인사 잘해라’ 였다. 넘어지고 엎어져도 툭툭 털고 일어나서 다시 뚜벅뚜벅 걸을 수 있던 까닭은, 귀에 박혀 있는 그 말들 때문이었다. 스스로 자신을 돌아볼 수만 있다면, 사람들과 겪는 갈등은 오히려 자신을 성장시키는 기회일 될 때가 더 많다. 실수는 누구나 한다. 문제는, 늘 그다음이다. 그다음이 어떤가에 따라 인생은 얼마든지 달라진다. 임영준이 다른 것은 ‘그다음’이 달랐기 때문이다.
3.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전 공고생이었어요. 공부 안 하고 게임 좋아하는. 그런데 누나 때문에 영화를 많이 봤어요. 누나가 영화를 전공했거든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그로테스크한 역설적 상황들이 그렇게 좋았어요.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에는 제가 특히 좋아하는 장면이 있어요. 막둥이가 제대하고 전철 입구에 서서 표지판을 올려다봐요. 그런데 왼쪽 오른쪽 내용이 같아요. 어느 쪽으로 나가도 마찬가지인 거죠. 무슨 암시 같았어요. 그때 그 장면이 인상적이어서 제가 카톡 사진으로도 오랫동안 썼어요. 아마 제 환경과 예술에 대한 간극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제가 그걸 그런 식으로 느꼈던 것 같아요.”
한석규가 연기했던 <초록물고기>의 막둥이는 순진한 청년이다. 군대를 막 제대한 막둥이가 전철 역 입구에서 마주쳤던 표지판은 왼쪽 오른쪽 내용이 똑같다. 어디로 나가든 마찬가지라면, 그것이 인생이라면, 우리는 그때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1년쯤 복싱을 하고 있어요. 연습은 지루해요. 혼자 하는 싸움이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 싸움을 잘 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공부가 필요할 때라는 생각도 부쩍 들어요. 가정도 꾸렸고, 이제는 제가 중심을 잡아야 할 때거든요. 임영준의 햄릿은 잊어주세요. 지금 저는 시즌2를 준비 중입니다.”
임영준은 올해 유독 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1월에는 <체액>(하수민 연출), 4월에는 <리어외전>(고선웅 연출), 6월에는 <팜>(김정 연출)의 재공연까지 올렸고, 현재는 9월에 예정된 경기도립극단의 <신의 막내딸 아네모네>를 연습하러 수원을 오가고 있다.
일본 극작가 마츠이 슈의 <신의 막내딸 아네모네>는 스트린드베리의 <꿈, 연극>을 각색한 작품이다. 경기도립극단 상임연출가 김정이 도립극단 배우들 외에도 임영준, 박종태 배우와 함께 협업한다. 상황에 따라 9월 말 무관중 1회 공연이 될 수도 있지만, 공연 영상본은 도쿄페스티벌에 출품될 예정이다.
“끝났어요? 안 되는데. 아내 이야기 꼭 해야 하는데. 제가 있는 건 다 아내 때문이거든요. 제가 힘들어하면 먹을 것부터 챙기는 사람이에요. 결혼은 3년 차예요. 싸움요? 하죠, 저희도. 부산 여자 대 에너지 왕성한 남자배우의 싸움이라서 아주 그냥, 시원하게 한 바탕씩 하죠(웃음). 제게는 아내가 너무 소중해요. 너무 이쁜 사람이에요.”
‘여여(如如)’하다는 말이 있다. 산스크리트어가 어원인데, 주변 상황에 크게 동요되지 않고 한결같은 본래의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임영준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몇 번인가 그 단어가 떠올랐다. 누군가는 그의 삶에서 끊임없이 출렁이는 물결을 보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의 설익은 웃음과 깃털처럼 가벼운 시간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 매력적인 부조화들, 그 모든 것들과 함께 오늘의 임영준은 참으로 여여했다. 본래의 이치가 근간인 사람을 닮아 있는 듯.
이제, 임영준의 바통은 최희진 배우에게 넘어간다.
“밸런스가 좋은 배우라고 생각했어요. 지성적인데 몸도 잘 쓰죠, 긍정적이죠, 책임감 있고, 좋은 욕심이 많은 배우 같아요. 무엇보다도 앞뒤가 같습니다. 제가 사람을 잘 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