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당신이 밤을 건너올 때>
이유영(연극평론가)
작 유혜율
연출 이은준
제작 (재)국립극단
장소 백성희장민호극장
일시 2020년 12월 3일~20일
(*사회적 거리두기 격상으로 12월 7일 이후 공연 취소)
관람일 2020년 12월 7일(19:30)
김수영의 시와 86세대
연극 <당신이 밤을 건너올 때>는 그야말로 ‘김수영의 시로 시작하여 김수영의 시로 끝난’ 연극이다. 그만큼 이 연극에서 김수영 시는 강한 힘을 보여준다. 연극에는 총 네 편의 시가 나온다. 가장 먼저 나오는 시는 「그 방을 생각하며」다. 이 시는 그 시절에 멈춘 젊은 청년 윤기의 모습을 통해, 그 당시 혁명을 갈구하고 투쟁했던 86세대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후 그들도 50대가 되고 현실에 쫓기며 살아가는 형진과 영미의 모습과 「봄밤」의 조화는, 한때 이상을 위해 투쟁했던 이들도 시간이 흐르며 현실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떠올리게 했다. 영미가 윤기를 떠올리며 등장하며 「달나라의 장난」은 자신에 주어진 삶의 무게로 윤기의 기일을 잊고 있었던 자기가 마치 ‘팽이’처럼, 즉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마지막으로 등장했던 「사랑의 변주곡」은 이 연극에 등장하는 김수영의 시 중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라는 86세대의 자기반성적 목소리와 함께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을 의심하더라도 결국은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라며 그들이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Z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목소리도 함께 담고 있는 이 시는 어쩌면 <당신이 밤을 건너올 때>가 진정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밤―시대의 밤 혹은 자기 상황의 밤―을 건너온 이들이 이제 밤을 건널 준비를 하거나 밤을 건너고 있는 이들에게 건네는 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김수영은 저항 시인으로서 혁명의 상징과도 같다. 그의 시는 광장으로 사람들을 소환하는 힘이 있으며, 저항하지 않음에 부끄러움을 느끼게도 만든다. 하지만 김수영의 시는 비단 그가 겪어왔던 그 시절에만 국한한 것은 아닐 테다. 후속 세대에게도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더라도 저항해볼 힘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당신이 밤을 건너올 때>는 김수영의 시와 주인공 형진으로 대변되는 86세대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시절 윤기의 모습을 통해 지금 MZ세대에게도 김수영의 시를 가슴에 새기며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다.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라는 말로서 말이다.
‘광장’과 ‘드랙퀸’의 상동성
이 연극의 가장 큰 미덕이자 장점은 무엇보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게 각자 나름의 캐릭터를 부여하고, 각 캐릭터가 사실적으로 그려졌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은 우리 주변에 있음직한 인물들이었으며, 그들의 내적 고민은 우리에게는 보통명사처럼 여겨질 정도로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 인물들이 함께 모여 대화하는 공간은 무대의 메인 공간인 ‘광장’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세대와 세대가 만나는, 서로의 삶이 만나는 교차로’(공연 프로그램 북 11쪽 참조)로서 설정된 광장은 때로는 실제 광장의 기능을 했으며, 때로는 다른 공간의 기능을 했다. 그러나 공통된 점은 그 공간에서 인물들이 ‘서로 대화한다’는 점이었다.
메인 공간이 광장의 기능을 할 때는 태극기 부대의 목소리와 이주 노동자를 위해 서명을 받는 목소리, 드랙퀸의 목소리, 보수 청년의 목소리 등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했다. 그리고 주인공 형진의 집에서 가족들이 모일 수 있는 응접실 같은 공간으로 기능할 때는 형진, 영미와 그의 아들 준수의 목소리가 공존했다. 학원일 때는 형진과 영미의 친구인 현과 준수가, 체 게바라 술집에서는 지금은 서로 달라진 형진, 현, 시형의 목소리가 공존했다. 무엇보다 죽은 윤기와 살아남은 형진이 함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렇듯 무대 메인 공간은 장면에 따라 서로 다른 공간인 듯 설정되기는 했지만,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각자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그 공간에서 각자 자신의 주장을 말하지만, 굳이 타인에게 자신의 잣대를 강요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공간으로서 광장이 다양성의 공존을 담고 있다면, 다양성을 담지한 인물도 있었다. 바로 ‘드랙퀸’이다. 드랙퀸은 성 정체성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규정한 정상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생각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드랙퀸이 사회를 향해 저항하고 투쟁하는 방식은 광장에서 플래시몹(Flash mob)을 하는 것이다. 이는 과거 광장에서 투쟁 구호를 외치는 것과는 또 다른 방식이자 MZ세대의 투쟁 방식이기도 하다. 이 연극에서도 기성 세대인 형진은 드랙퀸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젊은 세대인 정연은 드랙퀸의 방식을 거리감 없이 수용하는 모습에서도 세대 간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진지하지 못한 방식이라고 형진은 말하지만 드랙퀸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유쾌하면서도 진지하게 플래시몹을 하면서 직접 전달하지 않아도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충분히 전달한다. 따라서 광장이 86세대의 다양성을 담고 있다면, 드랙퀸은 MZ세대의 다양성을 담고 있는 존재였다.
86세대와 MZ세대의 동일성: ‘나’라는 정체성
<당신이 밤을 건너올 때>는 86세대와 MZ세대의 서로 상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86세대의 자기반성적 서사를 통해 MZ세대에게 과거 그들도 이상을 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후일담 연극의 특징이 있다. 하지만 이 연극의 힘은 무엇보다도 86세대와 MZ세대를 구분하기보다는 아우르고 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바로 김수영의 시다. 연극은 끊임없이 무대 위에서 시를 말하고, 관객들은 그 시를 듣는데 이 과정에서 세대의 경계가 흐려지고 공감, 연대감을 느끼게 한다. 세대의 경계가 흐려진 자리에 김수영의 시가 남았고, 그 시가 품은 의미가 남아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가 공통의 의미를 전달하고 느낄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 연극의 또 다른 핵심이자 세대를 포용하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나’라는 정체성 탐구다. 주인공 형진이 죽은 윤기를 떠올리면서 반복해서 말하는 대사가 있다. 바로 윤기는 떠났고, 자신은 이렇게 남았다는 말. 죽은 윤기와 달리, 긴 세월을 견뎌내며 형진은 변할 수밖에 없었다. 함께 했던 현은 그때와는 달리 속물적인 사람이 되었고, 시형은 변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과 아내 영미는 돈에 구애받는 삶을 산다. 돈 때문에, 가족 때문에, 그리고 시대가 변하면서 노동운동가인 형진은 소위 꼰대의 모습이 되었다. 이상을 좇기에는 현실에 딛고 있는 발을 뗄 수 없고, 현실을 좇기에는 스스로 가치관과 끊임없이 부딪치며, 그는 살아남은 자의 고뇌를 안고 있다.
형진만이 아니라 드랙퀸도 자신의 정체성으로 고뇌하는 인물이다. 능동적이고 활동적이며 감각적인 저항을 하지만 스스로 남성과 여성의 굴레, 사회가 규정해놓은 정상의 범주에 저항하며 내적 갈등을 겪는 인물이다. 그는 ‘나’ 자신으로 살기는 원하지만, 사회는 그런 그를 인정하기보다는 손가락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랙퀸은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드랙퀸이 명확한 정답 없이 계속해서 투쟁하고 고뇌하면서 자신을 찾으려고 하는 모습은 형진과 닮은 모습이다. 끝없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형진에게 드랙퀸은 어쩌면 하나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록 손가락질을 받고 비방하는 말을 듣더라도 사회의 통념과 관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방식을, 자기다움을 잊지 않으면 된다고 말이다.
<당신이 밤을 건너올 때>는 세대라는 프레임을 넘으면, 형진과 드랙퀸의 내적 고민과 갈등, 즉 모든 세대가 진짜 ‘나’, ‘나’다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사는 동안 ‘나’라는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끊임없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MZ세대가 겪는 이러한 내적 갈등을 이미 겪은 86세대라고 하여도, 그들도 나름대로 그 나이에 맞는 ‘나’라는 정체성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답을 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연극은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 찾기 과정을 관객들과 함께 하려고 한다. 그 시절 살아남은 형진과 플래시몹을 하는 드랙퀸, 그리고 김수영의 시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무대 뒤 김수영의 시구가 조명을 받아 마치 시비(詩碑)처럼 빛나듯 이 연극도 ‘나’라는 정체성을 돌아보게 만들며 관객들에게 시비처럼 새겨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