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연극평론가 고수진
2014년 5월 19일에 출간된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숨진 소년 동호와 그를 둘러싼 6명의 이야기를 통해 1980년 이후 계속되고 있는 광주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룬 작품이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가 도시를 봉쇄한 1980년 5월, 중학교 3학년 동호는 며칠째 집에 돌아오지 않는 누나를 찾으러 나선 친구 정대와 함께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와 맞닥뜨린다. 시민들을 향한 군인들의 무차별 사격에 정대는 총에 맞아 쓰러지고 정대의 시신을 찾기 위해 희생자들을 모아놓은 상무관 합동분양소를 찾아간 동호는 잔인하게 살해당한 주검들을 보게 된다. 그곳에서 여고생 은숙, 노동자 선주, 대학생 진수와 함께 시신 수습을 도우며 지내던 동호는 계엄군이 도청을 침공할 것이라는 소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도청에 남아있다 죽음을 맞는다.
9살까지 광주에 살다 1980년 1월에 서울로 온 작가 한강은 친척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5.18 때 죽은 소년들에 대해 듣게 된다. 그들은 작가가 살던 광주 집에 뒤이어 이사 온 중학생들로 교사였던 아버지의 제자라고 했다. 그로부터 2 년이 지난 후 아버지(소설가 한승원)가 광주에서 가지고 온 사진집을 통해 어린 한강은 5.18의 참상을 눈으로 확인한다.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겨, 총검으로 깊게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한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소년이 온다』 199쪽)
그러나 그렇게 작가의 기억에 각인 된 5.18을 소설로 쓰기 시작한 것은 2012년에 이르러서였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그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9세에 간접 경험한 광주를 나 자신의 내면에서 다시 만났다. 어린 내가 처음으로 맞부딪쳤으며 결코 풀 수 없었던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마침내 이제 글쓰기로 꿰뚫지 않으면 더 이상 어디로도 나아갈 수 없을 거라고 느꼈다. 인간은 대체 어떤 존재인가? 어떻게 그토록 폭력적이며, 또한 그토록 존엄한가?” (계간 『창작과 비평』 겨울호- (통권 178호,2017))
지난 40년 동안 5.18에 대한 소설은 꾸준히 발표되었으나 『소년이 온다』는 희생자들의 고통과 기억에 집중한다는 데 차별점이 있다. 죽은 동호와 정대를 비롯해 살아남은 은숙, 선주, 진수, 그리고 동호의 어머니까지 등장인물의 정서가 읽는 이의 감각으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한강 특유의 생생하고 유려한 문체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문학성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평단과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한강의 전작 『채식주의자』가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이후 『소년이 온다』 또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었으며 2017년에는 이탈리아 문학상인 말라파르테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연출가 배요섭이 이끄는 ‘공연창작집단 뛰다’는 2019년 남산예술센터 시즌프로그램으로 소설 『소년이 온다』를 원작으로 한 공연 <휴먼 푸가>를 무대에 올렸다.
배우들의 신체 움직임과 오브제 활용을 통해 연극의 본질, 삶의 본질, 인간의 본질에 다가가기를 지향하는 ‘공연창작집단 뛰다’는 연극 <휴먼 푸가>에서 한강의 원작 텍스트를 거의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인물 간 관계설정이나 드라마를 배제하고 천, 유리병, 밀가루, 의자 등 오브제의 사용과 바이올린, 피아노 등 악기의 현장연주를 통해 사건의 현재화를 시도했다.
또한 남산예술센터의 기존 객석을 기억에 관한 오브제 전시공간으로 비워두고 관객의 자리를 무대 중앙에 설치된 나무벽 양옆으로 배치하여 배우들의 미세한 호흡과 세세한 움직임까지 느낄 수 있게 함으로써 극중 인물들이 경험한 고통의 감각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려 하였다.
체험하지 않은 고통을 표현하고, 타인의 감각에 공명하는 일은 배우에게나 관객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1년의 준비과정을 거치며 ‘창작집단 뛰다’와 배요섭 연출은 파격적인 무대 미장센과 원초적인 동작, 손에 잡히는 물성을 통해 5.18이라는 과거의 기억을 현재로 가져와 소설 『소년이 온다』를 새로운 작품으로 재창조했다.
2019년 초연 이후 남산예술센터는 2020년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휴먼 푸가>와 동일한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폴란드 연극 <The Boy Is Coming>의 공연교류를 추진했다.
폴란드의 연출가 마르친 비에슈호프스키가 작가 한강의 동의를 얻어 제작한 이 연극은 전반부에는 원작에 나오는 1980년 광주의 상황을, 후반부에는 2028년 폴란드의 미래 상황을 동시에 담고 있으며 관객이 무대 위의 장소를 걸으며 관람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또 원작이 피해자의 감정만을 다룬 데 반해 <The Boy Is Coming>은 폴란드의 상황을 다룬 극의 후반부에 가해자와 관련된 내용을 첨가하여 희생자와 가해자의 화해에 대한 연출가의 철학을 담았다고 전해진다.
시신이 부패하는 냄새까지 표현했다는 이 연극은 그러나 아쉽게도 코로나19로 한국에서의 공연이 무산되었다. <휴먼 푸가> 역시 코로나19를 피해갈 수는 없어 5월에 기획된 공연이 한차례 연기되자 제작진은 공연을 대신할 <휴먼 푸가>의 영상 버전을 만들었다. <휴먼 푸가>에 등장하는 실제 공간을 찾아 장면을 구성한 이 다큐멘터리는 ‘장벽 없는 온라인 극장’이라는 이름의 배리어프리 영상으로 유튜브를 통해 상영되었다.
‘푸가’는 ‘달아남’이라는 뜻의 라틴어 ‘fuga’에서 유래한 말로 하나의 주제가 한 성부에서 다른 성부로 옮겨가며 전체구조 속에 고루 퍼져가는 대위법적 모방의 원리에 기초를 둔 악곡형식이다. (참고: 어웨이던 음악지식백과)
배요섭 연출은 작품 제목을 <휴먼 푸가>라고 지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소설의 구조가 푸가 음악의 구조와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광주라는 학살의 피폭을 겪은 개인들 그 후 삶들이 교차되어 반복되듯 이어지는 것이 푸가라는 대위법과 같아 보였다.(<휴먼푸가> 2020년 공연팜플렛 연출인터뷰)”
남산예술센터는 2020년 <휴먼 푸가> 공연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공연창작집단 뛰다’ 역시 이 공연이 마지막 공연이었다. 극장이 문을 닫고 공연은 끝났지만 인간의 잔혹함과 존엄함에 대한 이 돌림노래는 여전히 사람에서 사람으로, 도시에서 도시로, 나라에서 나라로 퍼져 나갈 것이다. 80년 5월의 광주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