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기의 공연산책 2012년 11월 공연총평
박정기(朴精機)
11월의 공연총평은 필자의 부득이한 사정으로 몇 개의 공연작품에 한하는 것에 양해를 구한다.
1 극단 우인의 김태웅 작/연출의 <둥근 해가 떴습니다>(대학로극장)
이 연극은 40대 연극연출가의 가정과 일상을 통해 현재 연극인의 생각과 활동, 사랑과 우정, 그리고 고뇌와 갈등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목탁과 불경 소리에 연극이 시작되면 연출가의 방안, 어머니와 연출가가 방에 누워있다. 어머니는 침대형태의 자리에서 움직이지를 못하고, 대소변도 받아내는 형편의 중증장애환자지만, 표정이 밝고 낙천적이기도 하다.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아들인 연출가를 걱정한다. 연출가는 얼굴에 기이한 선이 여기저기 그려져 있으나, 자신은 모르는 듯하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연출가는 아내와 사별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소개가 된다.
장면이 바뀌면 연극 연습장이다. 기존의 연극처럼 작품을 정해놓고 연습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연극과 관련된 용어의 정의를 토론해 정리하고, 출연자 각자가 소재를 가져와 자신이 연기로 펼쳐 보일 내용을 연출가와 동료들에게 소개하고, 장끼를 펼쳐 보이기도 하면서 출연 배우들의 소재로 극 구성을 하는 독특한 공연방식을 택하고 있다.
다시 장면이 바뀌면 40대를 갓 넘긴 대학시절의 연극반 동료들이 만나는 공간이다. 공간은 카페로, 술병 진열장에 무게를 두었고, 테이블에 둘러앉은 동료들이 음주를 하며, 노래를 부를 수도 있는 마이크도 보인다. 카페는 혜숙이라는 여자선배가 운영하고, 모인 동료 중에는 배우와 시인도 있다. 연출가는 동료보다 일찍 취하고, 술이 깨면 음주당시의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지 못 한다. 얼굴에 울긋불긋 칠을 하고 선을 그은 행위도 물론 기억에 없다.
동료와의 대화에서 연출가의 아내 인숙은 비가 내리는 날,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급히 그 장소로 가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소개된다. 바로 그 일로 해서, 연출가는 도대체 누구의 전화를 받고 외출했는가 하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연극연습장 장면이 재현되고, 카페 장면이 되풀이 되면서, 시인인 동료가 취중에 연출가의 아내 인숙의 이름을 거명하며, 그리워하고, 사랑했노라는 말을 내뱉는다. 연출가의 눈빛과 얼굴색이 달라지니, 동료들은 우리 모두가 인숙을 사랑하고, 그리워한다고 시인의 이야기를 희석시킨다. 연출가가 분노를 터뜨리는 장면에서 암전된다. 연출가 없이 연습을 해야 하는 연습장 장면이 펼쳐지고, 연습장 대신 카페로 직행한 연출가가 지난밤의 일을 기억해 내려는 집요한 추적이 시작된다. 지난밤의 장면 하나하나를 재현해 내면서 연출가는 죽은 아내 인숙과 시인인 동료와의 이야기를 기억해 낸다. 연출가는 아내와 동료의 사이를 의심, 추궁하기 시작한다. 연출가는 왜 아내를 불러내 죽게 만들었느냐고 동료를 질책한다. 카페주인 혜숙과 여자종업원, 그리고 연극반 동료가 말리지만, 연출가의 분노는 다그침이 더해가고, 시인인 동료는 긍정도 부정도 않고, 인숙을 그리워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되풀이 할 뿐 연출가에게 전혀 미안해하는 표정을 보이지 않고 카페 내실로 들어간다. 뒤따라 간 혜숙이 얼굴이 파랗게 질려 뛰어나와 시인의 이름을 거명하는데서 장면전환이 된다.
시인동료의 장례식장, 연습장에서 연습을 하던 배우들이 문상을 하고, 한 주정뱅이가 등장해 부조금을 낸 뒤 영정 앞에 절을 한 후, 영정사진을 보고, 빈소를 잘못 찾았다며 부조금을 낸 돈보다 부풀려 받고, 되돌아가는 장면이 소개가 되기도 한다.
대학연극반 동료들이 연출가와 함께 문상을 한다. 그 때 상복을 입은 묘령의 여인이 등장해, 영정 앞에 앉아 자신을 버리고 어찌 떠났느냐고 통곡을 한다. 인숙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면서……
마지막 장면은 도입에서처럼 어머니와 함께 누워있는 연출가의 방이다. 노모를 대하는 연출가의 태도가 전과는 달라 보이고, 죽은 아내와 친구를 의심하던 그의 병적인 의처증도 말끔히 가신 듯싶은 표정이다. 카페에서 늘 상 동료들과 부르던 <둥근 해가 떴습니다>를 어머니에게 불러드리는 장면에서 연극은 마무리가 된다.
박명신, 문현진, 이 원, 하지혜, 구자승, 설나리, 주보비, 이재훈, 이성근, 황순영, 김도한, 권민주, 김리나 등이 출연해 성격창출과 열연으로 객석의 갈채를 받았다.
김내하, 이승훈, 김선화, 이혜정 등이 더블캐스트로 출연한다.
남경식의 무대, 김정화의 조명, 지병국의 분장, 윤헌태의 사진, 오주형의 작곡/녹음, 박명신의 신체훈련지도, 윤대열의 랩 지도, 장경진의 디자인, 정한별의 음향오퍼, 강예슬의 조명오퍼 기획 프로젝트 썬, 조연출 이연주 등 스텝진의 기량이 합하여 김태웅 작/연출의 <둥근 해가 떴습니다>를 성공적인 공연으로 만들었다.
2 의정부 극단 한네, 최병화 작, 오경숙 연출의 <시간 밖에서>(의정부 가능역 극단 한네 소극장)
연극 <시간 밖에서>는 여자 교도소 안에서의 임신을 한 수감자와 새로 입소한 나이든 수감자간에 벌어지는 이야기다. 신입 수감자가 선입 수감자보다 나이가 많아도 수감자 서열관계로 선입소자가 후입소자에게 선배 대접을 받는 게 관행처럼 되어있기에, 신입이 나이가 많거나, 경력 따위를 내 세워도, 수감자들 사이에서는 통하지가 않는다. 만약 신입소자가 선입소자에게 손찌검이라도 할 기세를 부릴라치면, 선입은 엄살을 떨고, 마치 폭행을 당한 것처럼 소란을 떨어 교도관이 오도록 만들고, 신입자는 벌칙으로 제재(制裁)를 받게 된다. 두 수감자간에 티격태격하는 일이 빈발해 지지만, 비좁은 공간에 함께 있게 되니, 자연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임신한 수감자가 통증을 느끼거나, 통증을 호소하면, 상대는 관심을 기울이고 돌보게 되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인 것을 어쩌랴. 두 여인은 모두 고아로 자란데다가, 수감생활을 함께 하면서 두 사람은 친자매처럼, 또는 모녀처럼 가까워진다. 그런데 나이든 수감자는 지병이 있어 건강이 악화일로에 있지만, 이를 숨기고, 임신한 수감자를 돌본다. 어느 날 아기의 아빠가 될 사람이 임신 수감자 면회를 온다. 임신 수감자는 기쁜 마음으로 면회실로 향한다. 그런데 돌아온 임신 수감자가 절망적인 표정이다. 결혼할 남자가 임부의 배를 보고, 누구의 자식이냐고 묻더니, 결혼 이야기는 걷어 치고, 그냥 가버렸다고 통곡하며, 약혼자를 증오하고, 결혼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나이든 수감자는 그녀를 달래고 감싼다.
교도소 안에서 수감자들 간에 장끼자랑을 하게 되고, 부상으로 아기 기저귀박스를 탈 수 있다는 소식에 나이든 수감자는 출산일이 다가온 수감자를 위해 자신의 장끼인 노래를 부르기로 한다. 연습 삼아 부른 노래가 일품이라, 객석으로부터 갈채가 터져 나온다.
진통과 함께 임신 수감자는 출산을 하러 가게 된다. 나이든 수감자는 장끼자랑에 나가려고, 18번인 노래를 부르지만, 건강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심한 기침과 함께 주저앉는다. 교도관이 나이든 수감자에게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병원으로 가라고 이르지만 그녀는 괜찮다고 사양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영치금으로 임산부에게 기저귀 박스를 사주도록 부탁한다.
나이든 수감자는 혼자남아 노래연습을 하려다가 통증으로 쓰러진 채 일어나지를 못한다.
대단원에서 교도관과 함께 출산한 수감자가 아기를 안고 들어온다. 교도관은 기저귀 박스를 함께 들여다 놓는다. 임산부는 나이든 수감가 보이지를 않으니, 교도관에게 어디로 갔느냐고 행방을 묻는다. 교도관은 그녀가 죽었다는 말 대신에 퇴원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나이든 수감자가 마련한 기저귀 박스라며, 장끼자랑에서는 특별상을 받았다는 말을 남기고 퇴장한다.
산모와 아기, 그리고 기저귀 박스가 관객의 눈길과 가슴에 각인되면서 연극은 마무리가 된다.
최금옥이 나이든 수감자로, 김연희가 임신 수감자로, 최병헌이 교도관으로 출연해 더할 나위 없는 호연으로 관객으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음향 전영옥, 진행 문인옥의 열성과 기량이 돋보인 극단 한네의 워크숍 공연, 최병화 작, 오경숙 연출의 <시간 밖에서>를 관객의 가슴과 기억에 길이 남을 공연으로 탄생시켰다.
3 경기도 광주 “박물관 얼굴” 뮤지엄 시어터에서 김정옥 작/연출의 <춘향이, 어릿광대>
뮤지엄 시어터에서 김정옥 작/연출의 음악극 <춘향이, 어릿광대>를 관람했다.
뮤지엄 씨어터는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68번지에 자리 잡은 “박물관 얼굴”에 있는 작은 공연장이다.
2004년 5월에 개관한 “박물관 얼굴”에는 석수, 목수, 도공들이 만든 70여개의 석인(石人)을 비롯해 목각인형, 도자인형, 사람 얼굴을 본뜬 와당, 초상화 등 원로 연출가 김정옥 선생이 40여 년 간 수집해온 얼굴 관련 작품 1,0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은 대지 2,000평. 150평의 실내 전시공간과 ‘야외 전시장’, 전남 강진에서 옮겨온 ‘전통한옥’ 등 세 부분으로 되어있고, 뮤지엄 시어터는 실내 전시 공간 내의 소극장이다.
박물관 얼굴에서는 2012년 상반기에 <광대의 얼굴, 무대와 인생>전을 시작으로 10월26일~11월30일, <한국적 아르 부뤼(ART.BRUT)>특별전과 극단自由와 제휴하여 준비한 김정옥 선생의 101번째 연출작 연극 <햇빛 밝은 아침>과 <우정>에 명배우 이문수와 성병숙이 출연해 성공을 거두었고, 102번째 연출작인 <춘향(春香)이, 어릿광대>의 공연이 있었다.
< ART.BRUT 한국>특별전에는 이병복, 김태순, 최석인, 오재창 등 한국작가의 그룹展이 개최되어 관객은 공연관람과 더불어 작품전도 감상할 수 있었다.
<춘향(春香)이, 어릿광대>는 퓨전극으로 초반은 <춘향전> 원본을 따랐으나, 중반 이후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펼쳐진다. 연극의 도입에 광한루 장면은 박물관 이층의 발코니로 오르는 장애인용 승강기가 광한루가 되기도 하고, 몽룡이 상경할 때, 또는 춘향이 가출을 할 때, 발코니로 승강기가 상승을 함으로써, 극적효과를 절묘하게 살려내기도 한다. 이 연극에서는 춘향이 이도령과 이별하는 장면을 전환점으로 하여, 수절을 지키는 고전적 여인상이 아닌, 부친 성 참판에게서 사서삼경을 습득하고, 모친인 월매로부터 기예를 전수한 선지식과 재예를 겸비한 생각하는 여인으로써의 발전적 행보가 펼쳐진다. 가출을 한 춘향은 명문 안 씨 가문의 멋진 후예와 만나, 성숙한 여인으로 사랑을 맺고 정염을 펼치기도 한다, 안씨댁 부자 2인의 사랑을 피해, 재차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보수적이고 몽매한 사회는, 여성 춘향의 자유를 향한 힘찬 걸음에 카펫을 깔아주는 풍토와는 거리가 멀기에 춘향은 광대 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대단원에서 춘향의 어릿광대로의 변신이 해설로 전해지면서 연극은 마무리가 된다.
국악인 김지현이 춘향이로 출연해 열창과 열연으로 남성관객의 시선을 집중시켜, 그녀의 발전적인 장래를 예측케 했다. 국악인 곽동현 역시 열창과 열연으로 이도령과 안진사댁 자제 1인2역을 멋지게 연기해, 여성관객의 연모의 대상이 되었다, 배우 최광덕, 변주현, 윤미나, 국악인 김정보, 이래현이 함께 출연해 작중인물의 여러 역과 타악기 연주와 열창은 물론 구수한 해설로 완벽을 기해 관객의 갈채를 받았다.
<춘향이, 어릿광대>는 퓨전극이자 살롱 드라마의 성격을 띤 음악극이다. 극단 자유가 1970년대 명동에 마련한 “카페 테아트르(cafés-théâtres)”에서 20여개의 작품을 공연해 성공을 거두었듯이, 경기도 광주의 “박물관 얼굴”의 뮤지엄 시어터에서도 성공적인 공연이 이어져, 원로 연출가 김정옥 선생과 함께 그 황금기(黃金期)를 맞기를 기원한다.
4 연희단거리패의 스트린드베리 작, 이정애 역, 오동식 연출의 <채권자>(게릴라극장)
게릴라극장에서 연희단거리패의 스트린드베리 작, 이정애 역, 오동식 연출의 <채권자)·를 관람했다.
이 작품은 스트린드베리가〈채권자들 Fordringsägare〉이라는 제목으로1888에 썼다. 당시 스트린드베리는 화가 뭉크(Edvard Munch 1863~1944)와 가까이 지냈다. 뭉크는 “절규”, “마돈나”, “흡혈귀” 등의 그림으로 잘 알려진 화가다. 뭉크는 화가지망생인 스무 살 무렵 자신의 재능을 알아본 화가 프리츠 탈로(Frits Thaulow)의 형수인 밀리 탈로에게 연정을 품게 된다. 뭉크는 밀리에게만 순정을 바쳤지만, 밀리는 자유분방한 보헤미안 기질의 여인이라 많은 남성과 가까이 지냈다. 두 사람이 연애를 하면서 뭉크는 끝없는 의심과 질투로 정신적 고통을 앓았고, 결국 여성전체를 증오하기에 이르렀다. 뭉크의 걸작 “절규”라든가 “마돈나”, 그리고 “흡혈귀” 등이 밀리로 인해 탄생된 그림이다.
스트린드베리는 뭉크를 모델로 해서 희곡 <채권자>를 썼다. 당시에는 독특한 소재였으나, 현재에는 밀리 같은 모델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으니, 연극 <채권자>의 공연이 140년 전의 일 같지가 않다.
무대는 화가의 아틀리에다. 배경 막 쪽으로 복도가 있고, 그 안쪽 전체가 창이 달린 여러 개의 여닫이문으로 되어있다, 기다란 등받이 소파와 팔걸이의자가 있고, 캔버스와 이젤 등의 화구가 비치되어있다. 소형 조소대가 있어 여인두상을 발을 저는 장애인 화가가 만들고 있다. 여인 흉부를 빚은 토르소도 있는데 흰 천으로 덮어놓았다. 옛 유성기와 레코드판이 그리고 음악이 당시를 절묘하게 반영시킨다.
연극은 도입에 화가가 여인두상을 빚고 있다. 화가는 유성기의 태엽을 감고 판에 바늘을 올려놓는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샹송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잠시 후 은발에다가 세련된 의상과 중절모를 쓴 중년남성이 와인 병을 들고 등장한다. 그 남성은 유성기를 멈춘다. 화가는 남성을 힐끗 쳐다보고, 친숙한 사이인지 작업을 계속한다. 남성은 화가의 의사대로 와인을 따라주고, 담배도 피워 물려주면서 화가의 처와 관련된 질문을 한다. 두 사람의 대화로 화가의 부인은 여행 중 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남성의 질문이 예사롭지가 않다. 부인의 전남편의 이야기를 묻고, 화가에게 전남편을 만나본 적이 있느냐고 묻기도 하면서, 여인의 행적을 두고 화가가 의처증을 일으킬 만한 대목을 골라서 들추기 시작한다. 그 뿐 아니라, 최면술사 같은 어조로 화가를 자신의 말에 몰입되도록 유도하니, 화가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움직이고 발작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자신의 처를 의심하지 않는다. 남성은 화가의 부인이 외박을 한 일이 없느냐고 묻는다. 결코 외박을 하지 않고 자신의 처는 가끔 여행을 할 뿐이라고 대답을 하니, 여행이야말로 외박이며, 불륜을 마음껏 펼 수 있는 기회라고 의처증에 불을 집힌다. 그 결과 화가는 간질증세 같은 발작을 일으킨다. 깨어난 화가는 자신은 그림을 그리지 않고 조각에만 몰두하겠다며, 하던 작업을 계속하려한다. 그 때 부인의 음성이 들린다. 화가는 자신의 처가 돌아왔다고 반기고, 남성은 자신은 아틀리에를 방문하지 않은 것으로 해 달라며 밖으로 나가 모습을 감춘다. 화가의 부인이 등장한다. 화가는 부인을 누나라고 부르며, 응석을 부리듯 다가간다. 부인도 화가를 동생을 대하듯 한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고 누군가가 오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화가는 그런 일이 없노라고 시치미를 뗀다. 화가와 부인은 일상처럼 두 사람만의 색다른 육체접촉에 몰입하려 한다. 그 때 남성이 인기척을 내니, 부인은 놀라고, 화가는 밖으로 나간다. 화가가 잠시 나간사이에 남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부인은 남성을 예사롭지 않게 대한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남성이 부인의 전남편임이 알려진다. 그리고 전남편이 아직도 부인을 잊지 못하고 있음도 밝혀진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문밖에서 듣던 화가는 충격에 빠져 몸을 비틀거리며 사라진다. 곧이어 화가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신음소리에 놀란 두 사람은 밖으로 뛰어나갔으나 화가의 모습은 보이지를 않는다. 부인은 창문달린 여닫이문을 모조리 열어젖힌다. 그러자 목을 맨 화가의 발이 공중에서 흔들거리는 장면에서 연극은 마무리가 된다.
남녀의 성 개방풍조는 세기가 거듭될수록 확장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각종 러브호텔과 모텔이 불륜의 온상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부다처나, 일처다부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륜은 우리가 지켜야 할 절대가치다. 그렇다고 불륜에 솔깃해지는 마음은 필자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신께 모든 걸 의지해야 해야 하는가?
연극<채권자>는 관람 후 이런 생각을 갖고 귀가하게 된 작품이다.
부인 역으로 김미숙, 전남편 역으로 이 작품을 연출한 오동식, 화가 역으로 홍민수가 출연해 호연과 뛰어난 성격창출로 객석으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김경수의 무대, 조인곤의 조명, 이지연의 분장과 가발, 김이영의 소품과 조각, 이승헌의 사진, 신보희의 기획, 황유진의 디자인 등 스텝 모두의 기량이 어우러져, 연희단거리패의 스트린드베리 100주기 페스티발, 스트린드베리 작, 이정애 역, 오동식 연출의 <채권자>를 걸작연극으로 창출시켰다.
5 극단 민예의 선욱현 작, 김성환 연출의 <구몰라 대통령>(설치극장 정미소)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극단 민예의 선욱현 작, 김성환 연출의 <구몰라 대통령>을 관람했다.
<구몰라 대통령>은 8과 10사이에 있는 9라는 숫자를 모르는 대통령 이야기다.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대통령이 연말에 격무의 피로를 풀 겸 아름답고 젊은 여비서와 교외에 있는 어느 신축 건물로 드라이브를 하다가 교통사고로 3일간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 후 다행히 의식을 되찾은 대통령은 9라는 숫자를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는 설정으로 연극이 전개된다. 향후 대통령과 정부고위인사의 뜻에 따라, 9라는 수자를 알거나, 9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반정부 인사로 취급되어 체포, 구금되거나 처형되는 등의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40만 명의 국민이 9로 인해 수감되어 처형을 기다리게 되니, 국민은 9의 존재를 일컫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애써 모르는 척 하고, 외면하게 된다. 대통령과 총리는 9라는 숫자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관계부처장관과 여당당수가 참석한 국무회의를 개최하는 등 국가중대지사로 취급된다. 그러나 여론조사의 의하면 국민의 87%가 9라는 숫자를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9라는 숫자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어느 누구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한 시인이 “9는 길가 민들레에 깃들어 있고, 바다 갯벌에 묻혀있고, 당신에게 밥을 내미는 손끝에 만져진다.”라고 노래해 대통령 앞에 끌려오지만, 실제로 시인 역시 9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때 대통령의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여비서가 죽음을 각오하고 9의 존재를 대통령에게 알린다. 대통령은 격노한다. 여비서는 떠나간다.
대단원에서 9의 존재를 믿는 국민을 처벌하려는 마지막 국무회의가 개최되고,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9의 존재를 믿는 40만 명 모두를 석방하도록 결정한다.
무대는 대통령 집무실의 벽과 문 하나하나가 완벽한 조형예술이다. 책상과 의자도 조화를 이루어 극장의 무대조건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조명의 색상과 변화가 극적효과를 100% 창출시키고, 극중 음악 역시 절묘하고 인상적이다. 돼지나 고양이 마스크를 한 작중인물이나, 각 등장인물의 분장도 개성과 성격창출에 빼어남을 보인다.
염동헌…이런 성격배우가 있었다니…. 그의 대통령 역은 독특하고 탁월하고 출중하기에, 감탄사와 함께 연극에 몰입하게 된다. 총리역의 김상복의 열연도 살만하였고, 비서실장 역의 이윤숙…이런 좋은 배우가 있었다니… 그녀의 단정하고 절제되고 명확한 어조는 여배우의 귀감처럼 느껴졌고, 장관과 학자역의 손대방, 여당대표와 시인 역의 고경진, 2인은 독특한 분장과 1인 2역에 어울리는 호연으로 관객의 주목을 받았다. 대통령 애인이자 여비서 역으로 박선혜가 출연해 남성관객의 주목을 끌었다. 서정하가 대통령, 김시원이 여비서로 더블 캐스팅되어 열연을 한다.
음악 심영섭, 무대 민병구, 조명 이재호, 사진 이지락, 음향오퍼 박귀임, 조명오퍼 신슬기, 진행 장호길과 조세환, 기획 이주영과 이초희 등의 열정과 기량이 합하여, 극단 민예(대표 이혜연)의 선욱현 작, 김성환 연출의 <구몰라 대통령>을 문제작이자 걸작연극으로 탄생시켰다.
6 연희단거리패의 스트린드베리이 작, 이정애 역, 이윤택 재구성/연출의 <꿈>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연희단거리패의 스트린드베리이 작 이정애 역 이윤택 연출의 <꿈>을 관람했다.
스트린드베리이의 <꿈>은 몽환극(夢幻劇)이다. 몽환극이란 현실적인 인생보다는 꿈이나 환상의 세계에서 소재를 얻어 구성된 극을 말한다. 단순히 엽기적이거나 기괴한 환상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깊이와 진실성과 함께 현실적인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에 소재와 장면전개가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러운 색채가 강하다.
스트린드베리이의 다른 작품인 『다마스쿠스로(Till Damascus, 1904)』와 『유령 소나타(Spöksonaten, 1907)』등에서도 이러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꿈은 단순한 환영이나 환상이 아니라 현실을 보다 더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고통 또한 통한의 고통으로 실제보다 한 단계 높게 다루어, 마치 지옥을 재현해 놓은 듯싶게 탁월하고 독특한 표현력을 발휘한다.
다른 작가의 몽환적인 정서를 다룬 작품으로는 헝가리의 극작가 몰나르의 『릴리옴(Liliom, 1909)』, 벨기에 출신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메테를링크의 『파랑새(L’Oisear Bleu, 1908)』, 윌리엄 사로얀의 『내 마음은 고원에(My Hear’s in the Highlands, 1939)』등이 있으며, 독일 낭만주의 시대에 천재시인 노발리스의 『파란 꽃(Die Blaue Blume, 1799)』또한 환상적이면서도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연극 <꿈>은 2시간동안 가슴을 예리한 칼날이나 송곳에 찔리는 것 같은 심정으로 관람을 하게 된다. 칼로 에이는 듯한 고통을 수반하지만 몽환과 환상이 어우러진 무대장치와 음악, 대도구 등과 조명이 연기자들의 혼연 일체된 연기력과 조화를 이루어 고통을 상쇄시킨다.
여주인공이 천상세계에서 지상으로 잘 못 낙하해, 비록 짧은 시간동안이지만 지상의 인간들 중 장교와 변호사, 그리고 시인과 사랑을 나눈다. 그러면서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도외시하고, 소홀히 했던 부분만 골라내듯 확대시킨 장면에 접근시킨다. 장교와의 안락과 풍요보다는 사랑을 택해 변호사에게로 옮겨가지만 변호사의 격무와 서류철 속에 쌓이는 중첩된 일의 축적은 하루하루의 생활에서의 숨통을 조이고, 절망에 빠지게 만든다. 그녀는 이곳에서 뛰쳐나와, 시적언어와 신앙심이 쌓인 공간으로 옮겨보기도 하고, 지성의 본산인 법학자, 신학자, 의학자, 철학자들이 모여 있는 공간에서 생의 본질을 타진해 보기도 하지만 결정적 답변을 얻어내지 못한다. 결국 인간이 겪어야 하는 시련이나 고통은 떨치기가 어렵고, 기독교적인 신앙심과도 무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대단원에서 여주인공은 유리를 굽는 불가마 속으로 들어가 불꽃으로 산화되면서 인간이 얼마나 가련하고 힘든 존재인지를 관객의 가슴과 뇌리에 못을 박듯 심어놓으며 연극은 마무리가 된다.
스트린드베리이가 1903년에 쓴 <꿈>도 뛰어나지만 1세기 뒤, 이윤택 연출가의 재구성과 발군의 연출력으로 탄생된 <꿈>을 스트린드베리이가 관람했다면, 그 자신도 감탄하고, 감동을 받았으리라 느낌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배보람, 윤정섭, 박정무, 조영근, 이승헌, 김미숙, 김철영, 김하영, 김해선, 황인택, 민혜림, 손청강, 오동석, 김아라나, 김미혜, 이동준, 기재현, 김동훈, 김덕환, 박창현, 김수경, 김진경, 이건희, 신민주, 이예선, 미스미 신이치, 변정원 등이 출연해 각자 독특한 성격창출과 혼연일체된 연기력으로 조화를 이루어 공연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신선희의 무대가 돋보였고, 최우정의 음악 또한 절묘했다, 이윤정의 의상 또한 적절했고. 이지연의 분장 또한 그 기량을 다했다. 김경수의 제작감독, 조명디자인과 영상의 조인곤, 작품분석 하형주 등 스텝진의 열정이 하나가 되어, 연희단거리패의 스트린드베리이 작, 이정애 역, 이윤택 연출의 <꿈>을 우수작이자 걸작연극으로 탄생시켰다.
7 극단 집현의 에우리피데스 작, 이상희 재구성/연출의 <메데이아 코리아>(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인천소재 극단 집현의 유리피데스 작, 이상희 재구성/연출의 <메데아 코리아>를 관람했다.
유리피데스 (Euripides BC484~406)작품 중 상연연대가 분명한 것은 <알케스티스 Alkēstis>(BC 438) ,메데이아 Mēdeia>(BC 431) <히폴리토스 Hippolytos>(BC 428) <트로이의 여인 Trōades>(BC 415) <헬레네 Helenē>(BC 412)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Iphigeneia he en Taulidi>(BC 405) <바카이 Bakchai>(BC 405) 등이고, 그 밖에 <안드로마케 Andromachē> <헤라클레스의 후예 Hērakleidai> <헤카베 Hekabē> <구원을 청하는 여인들 Hiketide>> <엘렉트라 Ēlektra> <발광한 헤라클레스 Hēraklēs mainomeno>》 <타우로이의 이피게네이아 Iphigeneia en Taurois> <이온 Ion> <페니키아의 여인 Phoinissai> 등이 있다.
인간의 정념(情念)을 적나라하게 묘사해 비극성을 강조한 작품이 그의 특징이며, 특히 여성심리를 묘사에서는 고대 그리스 작가들 중에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 생전에는 비교적 불우했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사후에 그의 명성은 다른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 2대가를 압도하기까지 하였으며, 후세 문학에 끼친 영향도 대단하다.
<메데이아>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 그리스 전역에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우던 기원전 431년에 상연된 작품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폭력성과 그로 인한 공포가 이 작품에 드러나고 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이 비극의 중심 갈등은 이방인인 콜키스 출신의 공주 <메데이아>와 그녀의 남편 이아손의 갈등이며, 새장가를 들어 메데이아를 배반한 이아손에 대한 <메데이아>의 복수가 중심 내용이다.
<메데이아>는 아버지를 배반하고 동생을 죽이면서까지 기지를 발휘해 이아손을 도왔던 장본인이다. 이아손과의 사랑에 눈이 멀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정열적인 여인이다. 그러나 <메데이아>는 사랑을 배신한 이아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신부인 공주와 그 아버지 크레온 왕을 죽이고, 이도 모자라 자신의 자식들까지 죽인다. 그 잔인성과 폭력성에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는 여성이 메데이아다.
에우리피데스는 전반부에서 <메데이아>를 동정적인 인물로 재현한다. 그러나 극이 진행될수록 전반부에서 보여 준 <메데이아>에 대한 동정은 점차 사라져 버린다.< 메데이아>의 격정과 격렬한 분노는 도를 넘어 너무나 지나친 면모를 드러내고, 자식을 살해하는 <메데이아>의 행동에서 그 폭력성은 극대화된다. <메데이아>가 자행하는 폭력은 “피압박자에게서 나오는 형언할 수 없이 무도한 폭력”이다.
이 작품은 이아손과 <메데이아 >가족의 혼란뿐이 아니라 우주의 혼란을 극화한 작품이다. 에우리피데스는 깨어진 도덕적 질서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메데이아>를 끝맺음으로써, 인간의 도덕이나 법칙에 무심한 신들의 세계와 배신과 분노가 극단적인 폭력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인간 세상을 냉정하게 비추어 낸다.
극단 집현의 <메데이아>는 사방이 칠 흙처럼 어두운 벽과 무대에서 등장인물 전원이 검은색 의상을 착용하고 시종일관 무대를 종횡으로 누비며 달리고, 춤추고, 두드려 패고, 싸우기도 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기타와 드럼을 함께 두드리기도 하면서 관객을 팽팽한 긴장감과 박진감에 잠기도록 하면서 1시간 30분 동안을 관객에게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극을 이끌어 간다. 가끔 연기자들이 아름다운 음악에 맞춰 기다란 붉은색 천을 이끌며 무대를 가로질러 가지만 그 위에는 한지로 장식을 한 상여나, 관 같은 상자가 놓여있어 처절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니, 동서양 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비극이라고 생각은 필자만의 느낌일까? <메데이아>의 반 흑, 반 금발의 머리칼은 그녀의 번뇌를 제대로 반영시킨 듯싶은 분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경희, 박진성, 이수진, 제희찬, 장미옥, 곽현석, 신효원, 이지혜, 김윤진, 염문경, 이슬기, 백자람 등이 출연해 탁월하고 독특한 성격창출과 열연으로 관객을 지옥의 문턱에까지 이끌어 간 느낌이 들도록 관객을 극 에 몰입시켰다.
예술감독 박계배, 제작 최경희, 무대/의상디자인 최경희, 안무 최태선, 의상제작 이수진, 음악 황종하, 기획 이창희, 사진 임승규, 조연출 한희선, 음향오퍼 김세웅, 기획진행 유선자, 최윤아, 무대진행 최지원 등 스텝진의 기량이 돋보인, 에우리피데스 원작, 이상희 재구성/연출의 <메데이아 코리아>를 해외에 내보여도 좋을 걸작공연으로 창출시켰다.
11월 공연작에 12월 공연작이 몇 개 포함되었고, 12월 공연총평에는 2012년도 필자가 관람한 250편의 공연 중 우수하고 탁월한 공연 10편을 선정해 소개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