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세상의 끝/ 권혁기

관극 일시: 2013/03/28 20:00
공연 장소: 국립극장 별오름극장
작: 장-뤽 라갸르스
연출: 까띠 라뺑
번역/드라마트루기: 임혜경
극단: 프랑코포니

 

<단지 세상의 끝>의 줄거리는 그렇게 어려운 내용이 아니다. 현대에 많은 작가들이 다루고 있는, 일반적인 삶을 거부하고 좀 특별한 꿈을 찾는 가족구성원 중에 한 명이 겪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익숙한 가족 간의 갈등이다. 이상을 가지고 세계를 따뜻한 시선으로 맞이하고 싶은 사람과 생존의 기술을 꼭 붙들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갈등이다.

그런데 이 공연은 프랑스 작가의 작품이고, 프랑스 사람이 한국에서 연출을 하였다. 한국에 온 외국인과 함께 특별한 저녁을 위해 한국전통 식당을 갔을 때, 외국인들은 의자 없이 방바닥에 앉는 것이 무척이나 어색 해 한다. 이 공연의 모습이 이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한국 배우들과 프랑스 연출가가 적절히 타협하지 못한, 대화의 부재처럼 느껴졌다.

무대에서 멋진 것을 보는 것만이 관극의 즐거움이 아니다. 비극을 보는 것도, 치열한 갈등을 즐기는 것도, 관객이 연극 안에서 가질 수 있는 정화의 장치이다. 하지만 이 공연은 무겁기만 하다. 이 공연에 등장하는 작가의, 세계를 가르는 아름다운 대사들과 정서들이 공연을 통해서는 방향을 찾지 못한 느낌이다. 프랑스식이든, 아니면 한국식이든 어떠한 결정을 통해 뚜렷한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데, 방향이 결정되지 않은 애매모호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프랑스식 인사법(Bisou)과 바닥에 앉는 모습 등이 많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공연이 프랑스의 배경으로 설명 할 수 있는 장치로서 필요한 연기 동작들이, 같이 이루어져야만 하는데, 그러한 지점에서 연출자와 연기자 간에 부자연스러운 합의가 불편한 공연의 결과를 낳게 했던 원인이 아닌가 싶다. 배우들이 한국식을 모두 던지고 프랑스식의 기호들을 정성껏 흉내 내던지, 한국화 할 수 있는 깊이 있는 고민과 대화를 통해 한국적인 ‘단지 세상의 끝’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공연을 준비하는 배우들과 스텝 모두가 쉽지 않은 작품이었으리라 상상된다. 현재 한국연극에서 주류를 이루는 공연에 비해서 익숙지 않은 무대 장치와 대사의 흐름 때문에 전달의 방식을 찾는데 쉽지 않은 시간을 노력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공연에 있어서는 연기자들이 찾은 방향이 모호한 모습을 보였다. 주인공 Louis 역을 맡은 배우는 인물의 성격을 너무나 어둡게만 잡지 않았나 생각된다. 작가는 에이즈로 사망을 했다. 에이지를 앓는 사람들도 그들의 생활이 있다. 삶 속에서 자신이 선택한 삶의 기쁨이 있을 것이라 이해되는데, 비극을 위해 달리기 좋은 음울한 자세로, 공연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된다. 따라서 Louis 역할에 목소리를 불필요하게 억누르고 출발함으로써, 전체적인 대사 전달도 어려웠지만, 주요한 독백 장면에서도 그가 찾고 만날 수 있었던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아름다운 이해를 맛볼 수가 없었다.

공연 전체의 흐름 중에, Louis 의 여동생으로 등장하는 Suzann이 Louis가 가지는 무거움을 밝게 할 수 있는 성격으로, 극구성의 주요한 역할인데, Suzann 역을 맡은 배우가 이해하는 연기방향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리고 밝은 성격의 연기의 정서가 가슴과 얼굴로만 표현되는 아쉬움이 있었다. 연기자 몸 전체가 인물의 성격을 만들어 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는다. 그리고 습관화 되어있는 한국적인 정서를 넘어서지 못하고, 소파 장면이라든지, 바닥에 앉는 연기를 할 때 지나치게 치마에 대한 불필요한 주의를 함으로써 극 진행에 방해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Louis 형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동생 Antoine는 전체 공연 진행 중 뒤 부분에서의 진지한 대사의 모습도, 전체적으로 너무나 무겁게만 흐르고 있는 상황에서, 불필요하게 고함을 지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공연 속에 진행되고 있는 쓸데없는 무게감도 있지만, 등장인물이 Louis 형과의 반대의견이, 논리적으로 연기가 됨으로서 정교하게 Louis를 아프게 함으로써 비극적인 장면이 연출 될 수 있었는데, 단순한 논리로 정면 승부를 하지 않는 느낌을 주었다.

작가 리갸르소가 여러 다양한 연극이론을 수용한 자유로운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무거웠다고 생각된다. 앞에서도 밝힌 것처럼 이 작품은 따뜻하면서 부드러운 웃음에서 출발을 할 수 있는 작품인데, 불필요한 무게감이 공연 전체를 누르고 있어, 경직되게 공연을 감상하게 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미국적인 공연이 한국 공연계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프랑스적인 사유와 즐거움을 가질 수 있는 공연이, 뜨거운 시도와 열정 속에서 한국 공연계에 소중히 자리 잡아, 세계를 이해하는 다양성을 통해 한국 관객들에게 좋은 도움이 되는 프랑스 작품을 많기를 기대한다.

– 권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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